산 정상에 큰 연못이…호암산성 한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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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에 큰 연못이…호암산성 한우물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0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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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물을 가둬 수도 한양에 불의 기운을 막으려 했다는 설

 

관악산과 삼성산은 쌍봉으로 서울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다. 금천구에서 호압사에 들러 삼성산을 오르면, 산성터가 나타난다.

산세가 호랑이 형상을 한다고 하여 호암산(虎岩山)이라고 한다. 호암상은 삼성산의 지류에 솟아오른 지봉(支峰)이다. 그 아래의 절이 호압사(虎壓寺)이니, 호랑이와 연관성이 많은 산이다.

호암산 정상에 큰 연못이 하나 나타난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 이렇게 높은 곳에 우물이 있다니….

연못 이름은 ‘한우물’. 큰 우물이란 뜻이다. 또는 하늘의 연못이라는 뜻으로, 천정(天井)이라고도 한다. 이곳 유적지는 ‘한우물 및 주변산성지’라고 불리었으나, 2011년 호암산성(虎岩山城)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주소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 산83-1번지 외. 사적 343호로 지정되어 있다.

 

▲ 호암산성의 한우물 /사진=김인영

 

산성에서 우물은 가장 필수적인 요소다. 일본 구마모토(熊本)의 번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임진왜란때 조선을 침공했다가 울산왜성에서 조·명 연합군에 포위되어 물 부족으로 오줌까지 받아먹고 말까지 잡아먹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귀국해 구마모토 성을 쌓으면서 우물을 120개나 팠다고 한다.

 

한우물 안내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한우물은 큰 우물이라는 뜻으로 호암산성 안에 있는 커다란 연못이다. 이 연못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발굴조사 때 연못 터 아래에서 통일신라시대 연못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호암산성은 해발 325m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퇴뫼식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1,250m다. 성 내부에는 여러 가지 건물터와 두 기의 연못터가 발견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류와 철기류,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한우물로 불리는 1호 연못은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동서 17.8m, 남북 13.6m의 장방형이며 깊이는 2.5m 가량이다. 2호 연못에서는 잉벌내역지내미(仍伐內力只內未)라는 글이 새겨진 청동숟가락이 출토되어 이 일대가 통일신라시대 잉벌노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이 연못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져 지금의 연못 밑에 묻혀 있고, 조선초기에 그 위에 연못을 축조해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다.

한우물의 조선시대 석축지는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이고, 그 아래에서 동서 17.8m, 남북 13.6m, 깊이 2.5m의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지가 확인되었다.

우물은 지표 밑 30cm까지는 백자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그 아래에는 유물이 거의 없는 굵은 모래층이 있고, 이 모래층 아래에 뻘층이 계속되고 여기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유물의 중심연대는 7∼8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우물의 석축구조는 남동 모서리의 경우 모두 13단으로 쌓여져 있고, 석축의 제일 아랫단은 약 20cm 가량 앞으로 내어 쌓고, 위로 가면서 들여 쌓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축조방법은 안압지의 축조수법과 동일한 것이다.

또 한우물에서 남쪽으로 약 300m로 떨어진 곳에서도 남북 18.5m, 동서 10m, 깊이 2m로 석축된 제 2우물지가 확인되었다.

 

1,250m의 산성 가운데 약 300m 구간의 흔적이 남아있다.

 

▲ 호암산성의 석구상 /사진=김인영

 

우물지 근처에서 개 모양의 동물상(석구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서울에 화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설화와 관련 있다고 한다. 삼성산은 불(火)의 기운이 강한 상이기 때문에 화마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한우물 근처에서 석구지(石拘池)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이 연못이 석수상과 관련되어 석구지라고 불려진 것이라고 보여진다.

 

▲ 한우물 주변 산성지 발굴작업 /문화재청

 

그러면 이 우물은 왜 팠을까.

첫째 기우제 관련있다는 설이 유력하다. 동국여지승람에 "호암산에는 견고한 성이 있다. 성안에 연못이 있어 가물 때면 비를 빈다"고 했다.

둘째는 군사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이 부근에서 진을 쳤으므로 이 우물은 군사들의 식수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번째는 풍수설에 의한 소화용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호압사를 짓게 하고 방화신인 석구를 세우는 등 이 우물은 방화를 상징하게 했으리라는 것이다. 석구상은 호랑이 형상인 호암산을 풍수적으로 경계하는 의미로 세운 것이다.

 

▲ 2호 연못에서 발굴된 청동 숟가락 /문화재청
▲ 호암산성 길가에 늘어진 개들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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