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중립외교론의 허구②…내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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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중립외교론의 허구②…내치 실패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0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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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모살제, 정적 제거에 혈안…무리한 궁궐 축조로 국력낭비

 

광해군 중립외교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광해군이 여진족의 동태를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국방태세를 강화했다고 주장한다. 일부 그런 흔적은 보인다. 광해군은 군사훈련을 직접 참관하고 방어진지를 점검하고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확대 개편했다. 하지만 이 정도도 하지 않은 임금이 있었나. 여진족의 동태를 그렇게 챙겼다면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국론 통합에 앞장서고 전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대비했어야 했다.

광해군은 내치에 실패했다. 광해군은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심하(深河) 전투(1619년, 즉위 11년) 이전까지 11년 동안 전쟁이 목전에 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 증거는 정적제거에 혈안이 되었고, 역대 임금중 가장 많은 궁궐 공사에 국가 재원을 쏟아 부었다는 점을 들수 있다. 외교는 내치의 연장이다. 현명하게 국정을 운영하지 못한 임금에게 중립외교라는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한명기라는 역사학자는 저서 「광해군」의 중반쯤에 ‘외교전문가’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그 대목에서 그는 거의 시사평론가 수준이다. 팩트는 사라지고 자신의 주장으로 글을 이어나갔다. ‘순이’(順夷)니 ‘역이’(逆夷)니 하는 용어를 써가며, 상국 명나라의 지시를 거부하는 주권국 임금이라는 논리를 펼치며, 자주외교, 중립외교를 설명해 나갔다.

하지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에서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궐기에 대응하지 못했다. 국력을 분산시킨 책임이 광해군에게 있다. 그 점은 한명기도 인정한다.

전쟁에 앞서 내치를 다지는 것은 국가운영의 필수다. 국가 재원을 국방에 집중시키고 지도층을 담합시켜야 한다. 그런 면에서 광해군은 실패했다.

 

④ 씨를 말리는 정적 제거의 결과는?…국론 분열

 

광해군이 여진족의 움직임에 예의주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그는 여진족의 흥기를 알고만 있었을뿐, 자신은 콤플렉스와 주술에 빠져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의 가장 큰 콤플렉스는 태생적 한계였다. 그는 왕후 태생이 아닌, 후궁 태생이며, 맏이가 아닌 차남이었다. 부왕 선조가 뒤늦게 왕후(인목대비)를 맞이해 적자 영창군을 낳았다. 적자가 생산되었으니, 세자 광해군에 대한 대신들의 견제가 심해졌다.

그런 와중에 1608년 선조가 갑작스럽게 죽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즉위 첫해에 광해군은 자신의 대리청정을 견제한 영의정 유영경을 죽였다.

즉위 초기에 광해군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만회하기라도 한 듯, 충실하게 국정운영을 다지는 듯했다. 세자 시절에 자신을 보호한 북인이 집권했지만, 남인 출신의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이원익은 평소 신념이었던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고, 광해군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경기도에 한해 시험운영을 시행했다. 당시로선 현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바꿔 내도록 한 조치로도 관리와 상인들의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겐 큰 은전이었다. 의서 동의보감도 편찬해 전란에 남은 백성들의 상처를 치유케 하는 선정도 베풀었다.

하지만 그의 콤플렉스는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도져 나왔다. 정인홍과 이이첨등 그의 측신들이 임금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먼저 형인 임해군이 타깃이 되었다. 명나라가 형이 있는데 왜 동생이 즉위했느냐고 다그치자, 집권 북인들은 임해군을 죽여야 한다고 여론을 형성했다. 광해군은 우물쭈물 했지만 결국은 북인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임해군을 죽게 했다.

즉위 4년째 되던 1612년 2월,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황해도 봉산군수 신율이 국새를 위조한 김제세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연루된 남인과 서인들을 대거 숙청했다. 권신 이이첨은 이미 처형된 유영경에게 추가 형을 가할 것을 요청해 유영경의 시신을 부관참시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사건은 그나마 약과였다.

이듬해인 1613년 서자(庶子) 출신 7명이 문경 새제에서 은(銀)을 거래하는 상인(銀商)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을 취조해보니, 거대한 음모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적서 차별에 불만을 품고, 상인을 습격해 은을 빼앗아 그 자금으로 권력을 탈취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거병 규모는 300명, 대궐 습격 계획까지 드러났다. 그들은 “왕(광해군)과 세자를 제거하고 국새를 인목대비에게 넘겨 수렴청정케 하고,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옹립하고자 했다”고 진술했다. 그 배후엔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이라는 자백도 나왔다.

이젠 타깃이 분명해졌다. 인목대비와 영창군이다. 그후 영창군은 서인으로 강등되고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김제남도 처형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잃은 인목대비에 대해서 폐모(廢母)라는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비해 9살 어렸다. 나이가 어리지만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였다.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하는 유교국가에서 어머니를 폐하는, 사대부들로선 납득할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일련의 사태를 주도한 인물이 대북파 수령 이이첨(李爾瞻)이다. 그는 차제에 남인과 서인등 정적 제거에 앞장섰다. 그는 어느날 궁궐에 들어가기 전에 가족들을 불러 놓고 “오늘 이 적들을 섬멸한다면 큰 복이지만, 만일 그렇지 않아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목슴을 바쳐야 할 것이다”고 비장의 각오를 바쳤다고 한다. 그 때, 이이첨은 어찌나 많은 역적을 토벌(討逆)했던지 조정이 텅 비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정치보복을 당한 자들은 일단 움츠리지만, 언젠가 앙갚음을 하려고 때를 기다린다. 광해군의 묵인을 받은 이이첨 일당의 횡포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킨다. 1623년 광해군은 재위 15년만에 반정에 의해 쫓겨난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국론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갈등을 증폭시킨 결과다.

 

▲ 경희궁내 숭정문. 광해군이 축조한 이 궁궐의 원명은 경덕궁이었다. /사진=김인영

 

⑤ 지나친 궁궐 축수는 어떤 결과 초래했나…국력 낭비

 

청조 말기, 권력을 장악한 서태후가 이화원(頤和園)이란 궁궐을 건축하는데 군함 건조 재원을 쏟아 넣는 바람에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패했다는 일화가 있다. 광해군이 그런 짓을 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궁궐을 짓는데 국고를 소진해버렸다.

서울 종로구 역사박물관 뒤편에 가면 경희궁이 있다.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다. 그 곳은 나중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이었는데, 왕기가 서려 있다해서 광해군이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 광해군은 또 사직단 북쪽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축조했다.

두 공사 모두 엄청났다. 지금 경희궁은 1826년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만 남아있지만, 당시엔 창덕궁 이상으로 지었다고 한다. 정궁인 경복궁을 동궁, 경덕궁을 서궁이라고 했으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수 있다.

광해군은 궁궐 건축에 이상할 정도로 강한 집착을 보였다. 즉위 직후 왜란으로 불타버린 종묘를 중건하고 창덕궁 중건 작업을 재개해 3년만에 완공한다. 이 것은 이해가 된다. 궁궐은 나라의 위신과 임금의 권위를 상징한다. 전란으로 소실된 것을 복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여거서 더 나갔다. 나가도 너무 나갔다. 창덕궁을 다 지었으면 그리로 들어가서 정무를 보아야 했을 터인데, 광해군은 창경궁을 다시 지었고, 경덕궁과 인경궁, 자수궁(慈壽宮)을 지었다.

광해군이 궁궐을 많이 지은 것은 주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덕궁을 다 지어놓고 그는 들어가지 않았다. 창덕궁이 노산군(단종)과 연산군이 폐위되었던 곳이라는 도술사 이의신의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창덕궁 대신에 좁고 불편한 정릉행궁(덕수궁)에 기거하면서 다른 궁을 지으라고 했다.

이때 도술사 이의신은 서울은 기운이 쇠하였으므로, 명당자리인 교하(交河, 파주)로 천도해야 국운이 융성할 것“이라고 건의했다. 광해군은 이 말에 귀가 솔깃해 교하로 천도할 것을 지시하자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딛쳤다. 교하는 서해가 가까워 습기가 많은 지역으로 도읍지로 적합하지 않고,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이 피폐한 상황에 천도는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천도를 포기하고 다른 궁을 짓는데 몰두했다. 그러나 정궁인 경복궁 복원에는 떨떠름해 했다. 부왕 선조가 왜군을 피해 경복궁을 떠날 때 성난 민심의 반발을 보았을 것이요, 기운이 쇠했다는 술사의 권고를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경제력으로 궁궐공사는 엄청난 토목공사였다. 백성들에게서 토목공사 조로 쌀이나 포목을 걷어야 했고, 인력을 차출해야 했다. 공사 초기에 한달에 쌀 2,000석, 포목 1만필이던 궁궐공사용 세수가 즉위 10년차엔 쌀 5,000석, 포목 2만필로 급격히 증가했다. 또 멀리 산간지역에서 대형 목재를 베어 운반해야 했고, 장인들을 조달하고 물감을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재정이 파탄날 것이 눈에 보였다. 대신들 사이에선 북쪽 오랑캐가 세력을 키워나가는데, 지나친 궁궐공사를 중단해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가 들어왔다. 하지만 광해군은 밀어붙였다.

광해군은 궁궐 축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농민들 뿐 아니라 문무관리들에게도 포목을 징수했다. 세금을 내지 않고 살던 사대부층의 반발이 커지는 것은 당연지사.

이것도 모자라 금이나 은을 바치는 백성들에게 공명첩을 나눠주고, 죄수들에게는 은을 바치면 속죄시켜주었다. 나중에는 은 이외에 비단, 소금, 철, 목재나 석재를 바치는 백성들에게도 벼슬과 면죄부를 팔았다. 그 결과는 벼슬아치들의 양산이었다. 양반의 상대적 가치가 하락하게 되었다. 당시 은을 상납하고 벼슬에 오른 사람을 ‘납은당상’(納銀堂上)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대부들의 시각에서는 말세였다.

세금을 쥐어짜기 위해 특별 감찰사 격으로 조도사(調度使)를 파견했다. 이들은 어명을 빙자해 마구잡이로 징세를 하고, 지방수령과 토호를 압박해 마찰이 빚어졌다.

 

그의 궁궐사업은 조선군 1만명이 파병되어 패전한 심하 전투(1619년) 이후에도 이어졌다.

참다못해 이창정(李昌庭)이란 대신이 상소를 올려 광해군의 궁궐 사업에 직격탄을 날렸다.

“지금 누르하치는 사납고 교만하고 중국은 군대를 잃어 요동민들이 피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적이 또다시 틈을 노려 우리를 삼키려 하니, 묘당이 강구해야 할 바는 마땅히 자강(自强)을 급무로 하는 것입니다. 궁궐 건축을 위한 기관들을 없애 공사를 중지하고, 쓸데 없는 비용을 줄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고, 금고를 덜어서 병력을 기르고, 탐오한 자를 제거해 백성들의 힘을 펴 주어야 합니다. 절의를 숭상해 사기를 기르고, 장수를 선발하고 수령을 신중히 뽑으며 군사를 다스리고 병기를 단련하여 오로지 적을 막는 것을 도모해야 합니다.”

광해군은 이창정의 우국충정을 듣지 않았다. 그는 누르하치의 군사적 위협을 무시한 것이다. 그에게 위기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임금을 중립외교론의 화신으로 부상시킬수 있는가. 심하 전투에서 패했더라도 광해군은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국가의 재원을 국방에 전량 투입해야 했다. 경덕궁 공사는 재위 12년(1620년)에 마무리되었지만, 인경궁 공사는 그가 쫓겨날 때까지 이어졌다. 곡창인 삼남지역에서 심각한 기근이 발생해 농민들이 아우성인데도 그는 조도사를 보내 세금을 갈취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반정세력은 후에 광해군을 단죄할 때 무리한 궁궐공사를 축출 이유중 하나로 들었다.

 

▲ 경기도 남양주군의 광해군묘. 왼쪽이 광해군, 오른쪽이 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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