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본문 1문단②…一析三極 無盡 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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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본문 1문단②…一析三極 無盡 本
  • 주우(宙宇)
  • 승인 2018.02.04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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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에서 언급하듯이 오직 자신이 현실을 펼쳐낸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언제나 자신에게 제공되는 本(담마)의 제안에 따라서 수행해나감으로써 외적 변신이 아닌 내면의 본질적 변화가 일어나고, 각자의 존재상태가 바뀌어서 무의식적 지향성에 변화가 일어나야만 一과 自然이 바뀝니다. 이렇게 되려면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체득된 결단이 중요합니다.

존재됨됨이인 自然이 바뀌려면 그냥 결정하는 정도로는 어림없음을 깨닫고 단호히 결단할 정도로 각오해야만 본질에서 변화할 기회가 우연을 가장해서 미묘하게 펼쳐져도 그것을 놓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제와 오늘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듯이 오늘의 선택이 내일을 좌우하기도 하고 좌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즉 삶은 자신의 기대대로 되지 않고, 本(담마)에 의한 析의 작용으로 펼쳐지는 오묘한 맥락 관계가 있다는 진실을 이론이 아닌 몸으로 체득해야 합니다.

 

천부경의 ‘析’과 죽간노자의 ‘道’가 같은 의미로 쓰였다는 것은 둘 다 ‘一’과 ‘天極’ 그리고 ‘自然’과 ‘天’ 사이를 매개해주는 공통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析이 노자가 말하는 道 자체는 아닐지라도 道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천부경에서 道에 해당하는 단어는 바로 담마인 ‘本’입니다. 그러면 析은 本에 따라서 기능하는 역할입니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아직 분노를 마스터하지 못한 상태라면, 그래서 주인공에게 제공된 ‘상사의 막말에서 너 자신의 분노를 보라!’는 本을 무시한다면, 이런 本에 합당한 太陽이라는 외부현상인 三極이 펼쳐지는데, 이 메커니즘이 바로 ‘析’입니다.

一析三極과 一妙衍 萬往萬來를 비교해보면 三極이 萬往萬來에 해당하므로 결국 析과 妙衍의 기능이 같습니다. 즉, 析에는 ‘묘하게 펼쳐낸다’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천부경은 곳곳에 힌트가 숨겨져 있습니다.) 주인공이 평상심으로는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의 묘한 방식을 동원해서 펼쳐집니다. 本心은 미묘하게 本太陽은 오묘하게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주변에서 반복해서 벌어지는 별거 없어 보이는 소소한 일상에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 낮에 지인이 기르는 강아지 동영상을 보는데 강아지를 부르며 동영상을 찍는 지인의 화난 듯 단호한 목소리에 엄격함이 느껴졌어요. 평소 친절한 목소리와 달리 그녀답지 않다고 여기곤 지나쳤죠. 그런데 저는 오전부터 식구에게 겉으로는 친절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싫어서 단호하고 엄격한 마음상태였거든요. 무위(無爲)의 존재가 되기로 결단했음에도 겉으론 아닌 척하나 속으론 불편하게 지내다가 저녁에 동영상 속 그녀의 목소리가 제 본심인 게 떠올라 깜짝 놀랐죠. 일상생활 중 그냥 별 대수롭지 않게 쓰윽 강아지 동영상에서 제 내면이 펼쳐질 줄이야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어요. 아주 오묘했죠.

 

一析三極과 一積十鉅는 대구이므로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析은 자신의 존재상태가 여러 사람에게 몰래 모습을 나누어서 투사됨으로써 자신이 나누어지는 느낌입니다. 이는 자신의 모습을 대변해대는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너무 똑같아서 원수처럼 보입니다.

積은 각자가 자신의 존재상태를 여러 사람과 솔직히 나누어서 닦아감으로써 자신이 쌓여나가는 느낌입니다. 이는 자신의 모습을 대변해주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타나는 덕택입니다. 심지어 아주 똑같아서 천사처럼 보입니다.

재물을 쌓아두면 (잔머리를 굴리다 보니) 인격이 분열되기 쉽지만, 재물을 나눠주면 (선심을 내다가 보니) 인격이 쌓여가기 쉽습니다. 이처럼 재물을 쌓아두면 자신의 존재상태는 나누어지지만, 재물을 나눠주면 자신의 존재상태는 쌓여갑니다. 나눠주고 싶지 않은 욕심과는 달리 인격은 분열되기 손쉽고, 반면에 나눠주고 싶어 하는 적선과는 달리 인격은 고양되기 쉽습니다.

‘析’의 기능이 주로 자신의 감춰진 모습을 외부 세상에 투사하므로 세상은 자신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析’이라는 단어를 연상하려면 ‘분석할 析(석)’에서는 ‘자신을 분석해서 보여주는 외부 세상’을, ‘나눌 析(석)’에서는 ‘자신을 여러 모습으로 분리(분열)한 외부 세상’을 떠올리면 도움됩니다. 그리고 ‘積’이라는 단어를 연상하려면 ‘쌓을 積(적)’에서는 덕(德)이나 인격, 수행(修行)을 쌓아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도움됩니다.

 

현실을 유지해가는 메커니즘

현실을 극복해가는 메커니즘

존재상태를 나누고 확대해서 본다.

인격을 닦고 활용해서 쌓아간다.

투사를 통해 묘하게 펼쳐낸다.

수행을 통해 자신이 변화한다.

한 꺼풀씩 벗겨내서 드러낸다.

한 단계씩 닦아가서 성장한다.

현실이 반복될 때 작동하는 本(담마)이 작동하는 메커니즘

마음이 닦여갈 때 작동하는 수행이 작동하는 메커니즘

자신의 존재상태가 타인에게 나눠지는 당혹감

자신의 존재상태가 하나하나 쌓여가는 뿌듯함

 

用變에서 자신이 바뀌는 것과 외부현상이 바뀌는 것 간의 상관관계를 터득한다고 할 때 바로 이 상관관계가 析이고, 상관관계를 알아보고 수행을 쌓아가는 것이 積입니다. 왜 외부현상이 벌어지는지를 알아보려면 학식이 많다거나 무식하다는 생각에 좌우되지 않고 지금 벌어진 사건에 관련해서 자신이 과거에 놓은 원인이나 미래에 벌어질 요인을 기억해내면 됩니다.

一析은 자기 정체성이 분열되어 나누어진다는 것이고, 一積은 통합되어 쌓여간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정체성이 마음·말·행동으로 나누어진다면 (자기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三極의 현상으로 펼쳐지지만, 각자의 정체성이 하나로 통합되어 쌓여간다면 완전한 十의 상태로 변화해갑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一析三極은 一이라는 나의 존재상태에 따라 나로 하여금 자각하도록 도울 天極이 펼쳐지면서 천신(天神)들이 시나리오를 기획하고, 그다음 地極이 펼쳐지면서 지신(地神)들이 만물(萬物)을 포함한 지리적 환경을 연출하며, 人極이 펼쳐지면서 인신(人神)들이 연기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人極에 ‘나’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人(인)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고요? 저는 사람(人)이니 당연히 ‘나’도 포함된다고 여기고 있는데요. 왜죠?

 

‘세상은 나의 거울이다’는 말은 내 주변 사람과 사물이 나를 비춰주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는 뜻인데, 이렇게 주변에서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과 사물을 타자라고 합니다. 앞에서 언급되는 人이 바로 타자입니다.

그런데 주변에 사람들이 펼쳐지기 전에 먼저 天極이 펼쳐지고, 그다음 地極이 펼쳐진다는 것은 죽간노자에서 사람이 自然을 결정하면 道가 따르고 道를 天이 따르고, 地가 따르며, 그다음 人이 따른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했듯이 無盡本 바로 다음에 오는 ‘天一一地一二人一三’은 一析三極의 ‘三極’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天極·地極·人極의 모습이며, 그중에 ‘天一地二人三’은 三極이 天1極·地2極·人3極의 순서로 생성된다고 설명하므로 두 단어는 동떨어진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天一一地一二人一三에는 天一地一人一, 즉 ‘一’이 반복해서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간과 출세간의 구조에서 언급한 대로 天二地二人二와 대구며, 아직 상승하지 못한 ‘반야모드’를 말합니다.

 

一析三極은 ‘一’, 즉 나의 존재됨됨이가 天1極에 의한 地2極 人3極의 현실로 펼쳐지는데, 이 三極이 드러나는 현실이 바로 붓다 사상으로 말하면 일체(一切)가 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들어보셨을 텐데, 붓다께서 일체를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수행인들이여, 일체(一切, sabba)란 바로 눈과 형상, 귀과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mano)과 담마(dhamma)를 말한다. 이것을 떠나 다른 일체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일 뿐 물어봐야 모르고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대상(visaya)이 아니기 때문이다.

- 쌍윳따니까야(S35:23)

 

이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이나 만사(萬事)를 일체(一切)라고 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포함한) 감각 기관을 통해 자신과 연관된 것만을 일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체유심조란 세상 모든 것을 마음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는 ‘각자의 존재상태가 (자신과 관련된) 외부상황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一析三極(일석삼극)의 三極은, 유심조(唯心造)한 일체(오로지 각자가 마음으로 만들어낸 일체)라고 할 때의 ‘일체(一切)’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一析三極의 三極, 즉 天1極 地2極 人3極도 앞에서 다루었듯이 하늘·땅·만물·사람들 전체가 아니라 나와 관련된 하늘의 중심, 땅의 중심, 인간계의 중심입니다.

대다수 불자(佛子)가 붓다가 말씀하신 ‘일체(一切)’를 우주 전체로 오해하듯이, 대다수 사람도 천부경의 ‘一’을 우주의 법칙이라고 생각하고 三極을 天地人 전체 우주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오해가 풀렸으면 합니다.

 

네, 저도 주요 개념 ‘一’에 대해 설명할 때 정정되었지만, 다시 정리해보죠.

∎ ‘세상천지가 다 나의 창조다.’는 오류는 ➔ ‘내 세상인 현실은 다 내 존재상태에 따르는 창조다.’로

∎ ‘一이 우주의 법칙 또는 하느님이다.’는 오류는 ➔ “一은 ‘나’, 내가 정한 나, 나의 존재상태, 내 됨됨이이다.”로

∎ ‘天地人三極은 天地人 전체다.’는 오류는 ➔ ‘天地人三極은 나와 관련된 천지인 3계다.’로

∎ ‘일체(一切)는 세상만사나 우주 전체다.’는 오류는 ➔ ‘일체란 감각 기관을 통해서 나와 연관된 것만이다.’로 바로잡았음을 고합니다!

 

無盡은 ‘없을 無’, ‘다할 盡’이니까 다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함이 없다는 것은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겁니다. 소위 말해 ‘뺑뺑이를 돈다’는 거지요.

어떤 사람을 보면 똑같은 삶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계속 반복하는 모습이 있어요. 밖에서 보면 명확하게 보이는데, 그 속에 들어있는 사람은 자기 모습을 모르거든요. 맹점(盲點)이라고 해서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요.

재혼하려는 사람이 전 배우자와 같은 인간은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며 전혀 달라 보이는 사람을 고르지만, 재혼해보면 멀지 않아서 전 배우자와 너무도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당혹해하게 됩니다.

이처럼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無盡(무진)’입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반복될까요?

 

원인은 바로 앞에 있습니다. 一析三極 때문입니다.

一析三極의 ‘析’에는 ‘나무(木)를 도끼(斤)로 자른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一析三極은 자신에게서 三極을 분리하는 것, 즉 외부에 벌어진 현상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분리하는 것이 됩니다.

붓다의 원음이 기록된 니까야(Nikāya)에 의하면 외부에 특정 현상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내 존재상태와 연결하면 반야(paññā般若)라고 하고, 어떤 현상이 벌어지든 그것을 내 존재상태와 연결하지 않으면 식(viññāṇa識)이라고 하는데, 이 식(識)이 대상을 나와 분리하는 析에 해당합니다.

사실 윤회란 우리가 인간세에 계속해서 태어나는 건데, 이 반야를 터득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윤회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것도 괜찮은 상황으로 윤회하는 게 아니라 점점 악화하는 상황으로 윤회하게 된다고 하거든요. 이처럼 無盡의 뜻도 윤회의 방식과 일맥상통하는 겁니다.

이렇게 반야를 터득할 때까지 계속해서 윤회하게 되듯이, 여기서도 외부현상이, 즉 내 앞에 나타나는 현실이 내 존재상태에 의해서 나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주어진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이것을 통해 터득하지 못하면 특정 현상이 계속 반복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삶이 반복되는 것은 내 존재상태에 따라 내 현실이 펼쳐졌으니 나를 깨닫게 해주기 위한 상황임을 알아보라는 뜻인데, 이 상황을 통해 터득하지 못하니 유사한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군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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