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개로왕이 죽은 곳…아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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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개로왕이 죽은 곳…아차산성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2.0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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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방어 위한 백제 성이었지만 빼앗겨…한성백제 토벌 거점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 경계에 아차산(峨嵯山)이 있다. 그곳에 가면 산성이 있는데, 아차산성(峨嵯山城)이다.

아차의 한자 표기는 '阿嵯', '峨嵯', '阿且' 등으로 혼용되는데, 「삼국사기」엔 ‘阿且’와 '阿旦(아단)' 두가지로 나타나며, 고려사에서 峨嵯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의 휘(諱)가 '단(旦)'이기 때문에 단(旦)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자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씨를 고쳐 썼다고 한다.

아차산 영화사(永華寺)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아차산 능선을 탈수 있다. 남으로 한강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오고, 강남의 빽빽한 건물 숲이 펼쳐진다. 건너편에는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과 눈에 들어온다.

이 곳이 고구려의 성이었다고 한다. 저 아래가 바로 한성백제의 수도 위례성(慰禮城)이란 말인가. 한강을 해자로 삼아 백제가 고구려에 버티다가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충청도 공주 땅으로 망명케 한 곳이 바로 이 아차산성이다.

 

▲ 아차산에서 내려다본 한강의 모습 /사진=김인영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조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이때(개로왕 21년, 475년),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병사를 옮겨 남쪽 성을 공격하니 성 안이 위기와 공포에 빠졌다. 임금은 탈출해 달아났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더니, 임금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이다.”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북쪽성(풍납토성?)에서 버티다가 함락당하자, 남쪽성(몽촌토성?)에서 포로로 잡힌다. 치욕적인 장면이다. 개로왕은 한때 자신의 신하였다가 반역을 해서 고구려 앞잡이가 된 걸루와 만년이라는 자들에게 굴욕을 당한다. 그때 개로왕이 살해당한 곳이 아차성이다.

 

▲ 아차산 홍령봉 1보루 발굴모습(2004년)/문화재청

 

아차산성은 원래 백제의 것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조(286년)를 보자.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쳐서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를 부인으로 삼았기에, 임금이 이르기를 “대방은 장인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임금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단성이 아차산성이라는데, 학계에서 거의 이견이 없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해서 쌓은 성이다.

그러면 언제 이 성이 고구려에게 빼앗겼을까. 「광개토왕릉비」에는 영락(永樂) 6년(396)에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점령한 58성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도 ‘아단성’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고 한다. 광개토왕이 빼앗았고, 장수왕이 이 곳을 거점으로 한성백제를 멸한 것이다.

 

이 성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한번 더 나온다. 온달에 관한 스토리다.

 

영양왕 원년(590년), 온달이 길을 떠날 때 맹세하며 말했다.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되돌리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침내 떠나 아단성(阿旦城)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서 죽고 말았다.

 

이 아단성을 놓고는 견해가 구구하다. 백제본기의 아단성과 비교하면 온달이 죽은 곳이 아차산성이라고 비정하는 이가 있고, 충북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이 아단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설은 없다. 단양의 온달산성이 언제, 어떻게 축조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게다가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거의 점령한 상태인데, 중류 지역인 단양에서 신라군과 교전했다는 논리도 설득력을 잃는다. 하지만 단양 주변에는 온달에 관한 전설이 많이 전해진다는 점에서 온달이 온달산성에서 죽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사적 234호로 지정된 아차산성은 아차산 남쪽 붕우리에 쌓은 태뫼식 석성이며, 보루(堡壘)를 9곳 설치해 전체적으로 포곡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길게 성을 쌓지 않고, 주요 거점에 보루를 설치해 전략적으로 대응한 방어형 산성이다. 전체 길이는 1,125m이며, 성 한가운데에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 아차산성 보루 흔적 /사진=김인영
▲ 아차산성 보루 흔적 /사진=김인영
▲ 아차산 정상의 정자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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