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⑧ 흙이 모자라 연탄재도 쏟아부은 잠실 매립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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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⑧ 흙이 모자라 연탄재도 쏟아부은 잠실 매립공사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2.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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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석촌호수는 그곳으로 한강이 흘렀다는 흔적입니다. 잠실의 남쪽으로 흐르던 물길을 막아 호수가 되었지요. 그렇게 한강의 섬이었던 잠실은 육지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1971년이었으니 50년 정도 되었네요.

잠실섬을 육지로 만드는 공사는 잠실의 지역성을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잠실이 언론에 나오면 홍수가 났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한강의 섬이었던 잠실은 예로부터 크고 작은 홍수에 시달렸지요. 그래서 누에치기를 위한 뽕나무숲이 있었던 잠실섬이 황폐해진 적이 많아 지금의 서초구 잠원동에 신잠실(新蠶室)을 설치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는 한강 유역의 지형을 바꿀 정도로 큰 피해를 줬습니다. 조선총독부의한 자료는 잠실섬이 을축년 대홍수로 “퇴적한 모래와 진흙 때문에 도로와 마을의 형적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한 모래벌판”으로 변했다고 전합니다. 송파동의 송파근린공원에 가면 이때의 피해를 기록한 ‘을축년대홍수기념비’를 볼 수 있습니다. 

송파동 송파근린공원의 ‘을축년대홍수기념비’. 사진=강대호

강북쪽 섬이던 잠실이 강남에 붙은 까닭

서울의 낙도라는 별명이 붙었던 잠실섬은 1970년대 초반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한강의 섬이었던 잠실이 육지가 된다는 뉴스였지요. 이때부터 잠실은 홍수 소식이 아닌 부동산 뉴스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여러 언론 기사 중 1971년 2월 18일, 조선일보의 ‘잠실지구 개발 착공’ 기사를 보면 “잠실도를 육속화(陸續化)하여 신흥도시를 형성한다는” 정부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특히 ‘육속화’라는 용어를 써서 공사의 성격을 명확히 했습니다. 섬을 뭍으로 잇는다고요.

그런데 왜 섬이었던 잠실을 육지로, 그것도 잠실과 가까운 강북이 아닌 굳이 한강 이남의 연안에다 붙였을까요?

관련 자료들을 종합하면 한강 연안의 홍수 대책과 관련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잠실섬의 북동쪽 돌출부를 제거해 한강의 물줄기를 직선화하고, 동시에 탄천 하류에 제방을 겸하는 도로를 건설하는 계획이었습니다. 한강 연안의 저지대를 홍수 피해에서 보호하려는 목적이 있었지요.

당시 지도를 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리시 즈음에서 크게 휘어서 흘러오는 한강의 물길을 잠실섬이 막고 있는 형국입니다. 만약 한강 상류에서 물이 불어나면 잠실섬과 만나 더 불어나게 되어 한강 이북과 이남의 저지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구조인 거죠. 그래서 섬 일부를 잘라내고 강남 쪽 연안에다 붙여서 물길의 활로를 뚫어주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잠실섬 개발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활발했던 공유수면 매립공사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공유수면은 바다나 호수, 또는 강의 수면과 그 수면에 면한 땅을 의미하고, 대부분 국가의 소유이지요. 한강을 예로 들면 모래사장과 샛강, 즉 하천부지와 한강에 면한 저지대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한강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제방공사

서울시는 1960년대에 홍수 피해가 잦은 한강 유역에 제방 공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공사가 뜻밖의 결과, 즉 택지가 조성된다는 걸 관계자들이 알게 된 거죠. 1967년에 완공된 한강대교 남단에서 영등포 입구까지의 강변도로 인근에 택지가 조성된 게 학습효과로 작용했습니다. 제방을 쌓은 안쪽, 그러니까 하천부지였던 곳이 택지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었죠.

이후 한강 연안 곳곳에는 공유수면인 하천부지를 메워 대규모 택지가 들어서게 됩니다. 이를 공유수면 매립공사라고 하지요. 이촌동, 반포동, 압구정동 등의 아파트단지들이 모두 공유수면 매립공사의 결과물이었고, 잠실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1971년 잠실섬 육속화 공사.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1971년 2월에 시작한 잠실섬 육속화 공사는 섬 남쪽으로 흐르는 송파강의 물길을 막고, 잠실섬 북동쪽 자락을 잘라낸 후 섬 북쪽의 신천강을 한강의 본류로 삼는 작업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잠실섬 주민들은 섬 북쪽으로 흐르는 강을 샛강, 즉 신천강으로 불렀고 남쪽으로 흐르는 강을 송파강으로 불렀습니다. 송파강이 한강의 본류였고 신천강은 을축년 대홍수로 물길이 넓어졌다지만 말 그대로 샛강이었지요. 잠실섬 일부를 걷어내고 샛강을 한강의 본류로 만들어야 했으니 무척 규모가 큰 공사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개월여가 지난 1971년 4월 16일, 동아일보의 ‘송파강 물막이 공사 끝내’ 기사는 “잠실도 육속 개발을 위한 잠실도 남쪽 한강 본류 송파강의 물막이 공사”가 이날 끝났음을 전합니다. 제목과 본문에서 잠실 일대를 지나는 강을 한강이 아닌 송파강이라 부른 것이 이채롭습니다. 

물길을 막은 후에는 잠실을 신도시로 만들기 위한 토지구획정리가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방을 쌓고 저지대를 높여 택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흙이 부족했습니다. 섬을 잘라낸 흙과 강에서 퍼낸 토사를 썼지만 모자랐던 거죠. 그래서 공사장 남쪽의 한 언덕을 허물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하네요. 

잠실섬 육속화 이전과 이후를 보여주는 그림. 북동쪽 섬 일부를 잘라내 물길을 넓히고 남쪽의 물길은 막은 걸 보여준다. 사진=나무위키

그곳이 바로 몽촌토성 자리입니다. 지금은 복원돼 토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당시는 동산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흙을 가져다 쓰자는 의견이 나왔겠지요. 그래도 그 자리가 백제의 오랜 유적지임을 알아본 이들 덕분에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몽촌토성이 없어질 뻔한 사연

꿩 대신 닭이라고 할까요. 모자라는 흙은 서울시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로 대체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연탄재가 효자 노릇을 했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잠실동과 신천동 일대의 바닥 깊은 곳에는 연탄재가 묻혀 있는 거죠.

그런데 석촌호수는 왜 호수로 남았을까요? 한강의 흔적이었으니까 기념으로 남겨둔 걸까요? 그런 건 아니고 경제적 이유 때문으로 보입니다. 

잠실 개발 초기 석촌호수 일대는 ‘포락지’였습니다. 토지가 물에 침식돼 수면 밑으로 잠겨버린 토지를 말하지요. 그러니까 커다란 웅덩이였습니다. 이를 두고 서울시 등 개발 주체들은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1976년 잠실 주공아파트단지 전경. 멀리 석촌호수가 보이고 잠실 주공5단지는 기초 공사 중으로 보인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그러던 1973년 7월 23일 동아일보의 ‘잠실 토지구획정리지구 감보율 50% 내정’ 기사에서 이 포락지 처리를 언급합니다. “송파 잠실동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포락지 8만여평(수심 10m)을 자연호수로 개발”해 공원을 만들 예정이라고요. 포락지 규모가 크고 깊어 이를 메우는 비용이 땅 매각 수입보다 클 것으로 예상돼 그냥 호수 공원으로 개발하기로 한 겁니다. 

이 호수가 지금의 석촌호수이지요. 제가 석촌호수를 처음 본 게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1977년 봄입니다. 결혼한 누이가 신혼살림을 차린 잠실주공아파트를 혼자 찾아가다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 석촌호수까지 가게 된 것이지요. 호수 주변에 넓게 펼쳐진 평지와 멀리 보이는 아파트 건설 현장이 제 기억에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누이 내외가 살던 13평 주공 아파트에 연탄 보관하는 공간이 있었던 것도 기억납니다. 제가 살던 역삼동의 아파트는 중앙난방이 공급되는 맨션아파트라 연탄 때는 아파트가 신기했었지요. 5층짜리 주공 아파트단지가 있었던 잠실은 지금 모습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중앙난방의 고층아파트에 다른 단지보다 넓은 평수였던 5단지 정도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요.

잠실이 속한 송파구는 언제부터인가 강남 3구라며 부동산 뉴스에서 주요한 이슈로 다루고 있습니다. 송파 지역 오래된 아파트단지들의 재개발을 언급하는 뉴스도 많은데 아마도 몇 년만 지나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지금의 잠실과 송파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벌써 궁금해집니다. <매주 일요일 연재>

석촌호수와 놀이공원. 그리고 아파트단지.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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