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도 종묘 성격의 왕실사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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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도 종묘 성격의 왕실사원 있었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3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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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 터에서 드러난 신라 왕실의 위엄…60m 회랑식 건물터 확인

 

서울의 종묘(宗廟)는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불교국가였던 신라에는 종묘가 없었을까. 신라에도 유교국가였던 조선시대 종묘의 기능을 하는 왕실사원이 있었다는 추정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 발굴조사 지역 전경 /문화재청 제공

 

재단법인 성림문화재연구원이 경주 낭산 일대에서 신라시대 왕실사원의 위엄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유물을 발견했다고 문화재청이 31일 발표했다. 대석단(大石壇) 기단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기단의 건물지와 회랑(回廊, 긴 복도) 터가 발견되었고, 연못 등에서 금동입불상과 보살입상 7점 등 1,0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어쩐지 서울의 종묘를 보는 것 같다. 60m의 긴 회랑의 터와 주춧돌의 흔적으로 보이는 큰 돌덩어리가 나왔으니, 그 위에 지어졌을 건물을 상상해보자.

 

▲ 황복사지 유구분포도 /문화재청 제공

 

성림문화재연구원이 발굴하고 있는 낭산의 터는 황복사지 터로 추정된다. 황복사(皇福寺), 이름 그대로 황제의 복을 비는 절이다. 황제는 중국의 황제가 아니라 신라 임금임은 당연지사.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義湘)대사(625~702)가 29세에 출가해 머리를 깎은 곳이다.

그동안 황복사의 위치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부족했지만, 낭산 동북쪽 구황동의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주변에서 발굴된 기와 조각에서 ‘황복’ 또는 ‘왕복’이라는 명문이 나와, 그 곳을 황복사 터로 추정하는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1942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해 수리할 때 사리함에서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는 명문이 나왔다. 이 글귀를 통해 황복사가 신라 왕실의 종묘적 기능을 한 왕실사원이라는 추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당시 석탑의 해체수리 과정에서 금제여래입상(국보 제79호), 금제여래좌상(국보 제80호)등의 국보급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전경 /문화재청 제공

 

이 황복사터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이 착수되었다.

문화재청은 황복사로 추정되는 터를 발굴하기 위해 2016년 6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구황동 100번지 일대의 과수원과 경작지(4,628㎡)를 대상으로 1차 발굴을 진행했다. 이때 효성왕(재위 737~742)을 위한 미완성 왕릉과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 도로 등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이어 지난해 8월부터 시작한 2차 조사에서 마침내 황복사터의 웅장한 규모가 드러났다. 2차 조사는 석탑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경작지(4,670㎡)를 대상으로 했다.

2차 조사에서 통일신라 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와 부속 건물지 그리고 회랑 터, 담장 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이 드러났다. 이 정도면 신라왕실 사찰임을 확인하고도 남는 유구들이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왕실사원의 위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대석단 기단 건물지다. 이는 서쪽의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에 덧붙여 조성한 것으로, 동·남쪽 면에는 돌을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북쪽 면에는 자연석을 쌓아 약 60m에 이르는 대석단을 구축했다. 전면 중앙부 북쪽에 돌계단을 설치했다.

대석단 기단 건물지는 내부를 회랑을 돌린 독특한 구조로 이는 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되지 않은 가람배치 방식이다. 이 특징을 볼 때, 그 위에 들어선 건물은 특수한 용도의 건물이거나 황복사지의 중심 건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는 십이지신상 중 묘(卯, 토끼), 사(巳, 뱀), 오(午, 말), 미(未, 양))등 4구가 조각되었다. 조각된 석재는 불규칙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이 건물터는 대석단 건물터와 함께 황복사지의 중요 전각지로 추정된다.

 

▲ 양, 말, 뱀, 토끼 신상의 모양 /문화재청 제공

 

십이지신상은 신라 왕릉에서 확인된 십이지신상 탱석(고임돌)과 비교했을 때 더 발달한 형태를 보이며 김유신묘(사적 제21호)의 십이지신상과 더불어 조각미가 뛰어나다. 이 탱석의 도상(圖像)은 김유신묘와 헌덕왕(809~826) 능의 십이지신상보다 앞서며, 제작 연대는 8세기 중후반으로 추정한다. 축조 당시 십이지신상 탱석은 다른 왕릉에서 옮겨와 건물지의 기단석으로 다시 사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편, 출토된 1,000여 점 이상의 유물은 대부분 토기와 기와다. 대체로 7∼9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장식이 화려한 신장상(神將像) 화상석(畫像石), 치미(鴟尾,지붕 용마루 끝의 장식기와), 기와 등을 통해 당시 격조 높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금동불입상과 금동보살입상 등 7점의 불상 유물은 황복사지가 7~10세기까지 신라 왕실사원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 계단지 모습 /문화재청 제공

 

발굴팀은 이번에 확인된 건물의 배치나 도로 등을 볼 때, 낭산의 동쪽 지역(지금의 보문동 지역)이 도시계획의 하나인 방리제(坊里制,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를 설계)에 의한 계획도시였다고 평가했다.

 

▲ 십이지신상 기단 연못에서 나온 유물들 - 금동입불상과 보살상 등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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