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종묘(宗廟)는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불교국가였던 신라에는 종묘가 없었을까. 신라에도 유교국가였던 조선시대 종묘의 기능을 하는 왕실사원이 있었다는 추정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재단법인 성림문화재연구원이 경주 낭산 일대에서 신라시대 왕실사원의 위엄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유물을 발견했다고 문화재청이 31일 발표했다. 대석단(大石壇) 기단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기단의 건물지와 회랑(回廊, 긴 복도) 터가 발견되었고, 연못 등에서 금동입불상과 보살입상 7점 등 1,0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어쩐지 서울의 종묘를 보는 것 같다. 60m의 긴 회랑의 터와 주춧돌의 흔적으로 보이는 큰 돌덩어리가 나왔으니, 그 위에 지어졌을 건물을 상상해보자.
성림문화재연구원이 발굴하고 있는 낭산의 터는 황복사지 터로 추정된다. 황복사(皇福寺), 이름 그대로 황제의 복을 비는 절이다. 황제는 중국의 황제가 아니라 신라 임금임은 당연지사.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義湘)대사(625~702)가 29세에 출가해 머리를 깎은 곳이다.
그동안 황복사의 위치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부족했지만, 낭산 동북쪽 구황동의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주변에서 발굴된 기와 조각에서 ‘황복’ 또는 ‘왕복’이라는 명문이 나와, 그 곳을 황복사 터로 추정하는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1942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해 수리할 때 사리함에서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는 명문이 나왔다. 이 글귀를 통해 황복사가 신라 왕실의 종묘적 기능을 한 왕실사원이라는 추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당시 석탑의 해체수리 과정에서 금제여래입상(국보 제79호), 금제여래좌상(국보 제80호)등의 국보급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 황복사터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이 착수되었다.
문화재청은 황복사로 추정되는 터를 발굴하기 위해 2016년 6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구황동 100번지 일대의 과수원과 경작지(4,628㎡)를 대상으로 1차 발굴을 진행했다. 이때 효성왕(재위 737~742)을 위한 미완성 왕릉과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 도로 등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이어 지난해 8월부터 시작한 2차 조사에서 마침내 황복사터의 웅장한 규모가 드러났다. 2차 조사는 석탑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경작지(4,670㎡)를 대상으로 했다.
2차 조사에서 통일신라 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와 부속 건물지 그리고 회랑 터, 담장 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이 드러났다. 이 정도면 신라왕실 사찰임을 확인하고도 남는 유구들이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왕실사원의 위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대석단 기단 건물지다. 이는 서쪽의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에 덧붙여 조성한 것으로, 동·남쪽 면에는 돌을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북쪽 면에는 자연석을 쌓아 약 60m에 이르는 대석단을 구축했다. 전면 중앙부 북쪽에 돌계단을 설치했다.
대석단 기단 건물지는 내부를 회랑을 돌린 독특한 구조로 이는 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되지 않은 가람배치 방식이다. 이 특징을 볼 때, 그 위에 들어선 건물은 특수한 용도의 건물이거나 황복사지의 중심 건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는 십이지신상 중 묘(卯, 토끼), 사(巳, 뱀), 오(午, 말), 미(未, 양))등 4구가 조각되었다. 조각된 석재는 불규칙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이 건물터는 대석단 건물터와 함께 황복사지의 중요 전각지로 추정된다.
십이지신상은 신라 왕릉에서 확인된 십이지신상 탱석(고임돌)과 비교했을 때 더 발달한 형태를 보이며 김유신묘(사적 제21호)의 십이지신상과 더불어 조각미가 뛰어나다. 이 탱석의 도상(圖像)은 김유신묘와 헌덕왕(809~826) 능의 십이지신상보다 앞서며, 제작 연대는 8세기 중후반으로 추정한다. 축조 당시 십이지신상 탱석은 다른 왕릉에서 옮겨와 건물지의 기단석으로 다시 사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편, 출토된 1,000여 점 이상의 유물은 대부분 토기와 기와다. 대체로 7∼9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장식이 화려한 신장상(神將像) 화상석(畫像石), 치미(鴟尾,지붕 용마루 끝의 장식기와), 기와 등을 통해 당시 격조 높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금동불입상과 금동보살입상 등 7점의 불상 유물은 황복사지가 7~10세기까지 신라 왕실사원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발굴팀은 이번에 확인된 건물의 배치나 도로 등을 볼 때, 낭산의 동쪽 지역(지금의 보문동 지역)이 도시계획의 하나인 방리제(坊里制,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를 설계)에 의한 계획도시였다고 평가했다.
저작권자 © 오피니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