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균의 역사여행⑮…와신상담(臥薪嘗膽)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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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균의 역사여행⑮…와신상담(臥薪嘗膽)의 유래
  • 손봉균
  • 승인 2018.01.30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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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에 지금 중국의 상하이시의 북쪽에는 오(吳)나라가 있었고, 남쪽에는 월(越)나라가 있었다. 이 두 나라는 수십 년 동안을 전쟁하여 그것을 오월대전이라 부른다. 이 과정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성어가 생겼다. 와신상담의 고사를 소개하겠다.>

 

중국 춘추시대, 기원전 490년경, 오왕 부차, 월왕 구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가시 많은 거친 나무 위에서 누워서 자고, 쓰디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디어 심신을 단련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자어를 직역하면 臥(누울 와), 薪(섶나무 신), 嘗(맛볼 상), 膽(쓸개 담)이다.

 

춘추시대에 지금 중국의 상하이시의 북쪽에는 오(吳)나라가 있었고, 남쪽에는 월(越)나라가 있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인접한 국가로서 지리상으로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두 나라는 서로가 라이벌인 동시에 철천지 원수 간이었다.

오왕 합려는 손무를 등용하여 초나라를 크게 이기고 돌아온 후에, 지난날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쳐들어오려다가 그만 둔 일에 대하여 언젠가는 보복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때 월왕 윤상이 죽고 그 아들 구천(句踐)이 월나라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왕 합려는 국상(國喪)이 난 월나라를 치러 갔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 군사를 맞이해서 싸우려고 나왔다.

그들의 싸움은 지금의 절강성에 있던 취리(檇李)라는 곳에서 격돌한 것이 절정이었는데, 합려는 이때 월나라 장수인 영고부가 쏜 화살에 맞았다. 상처를 입고는 회군하였다. 오왕 합려는 돌아오는 길에 상처가 크게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임종에 앞서 합려는 손자인 부차(夫差)에게 말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네 할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오나라 왕위에 오른 부차(夫差)는 선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갈았다. 부차는 선왕의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해 항상 열 명을 교대로 궁전 뜰에 세우고, 부차가 출입할 때마다 큰 소리를 지르게 하였다.

‘부차야! 너는 월왕이 너의 할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잊었나뇨!’

시자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왕 부차는 걸음을 멈추고 ‘음, 내 어찌 그 일을 잊으리요!’ 하고 힘 있게 대답하면서 복수의 결심을 굳게 하였다.

부차는 그런 한편 군사 훈련에 박차를 가해 군대를 정병으로 탈바꿈시키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준비를 끝낸 부차는 드디어 태묘에 고하고 오나라 군사를 모조리 일으켜 월나라로 쳐들어 갔다. 월왕 구천도 모든 신하와 함께 상의하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는 오나라 군사를 맞이해 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부 범려와 문종이 이를 반대했다.

‘오나라는 전번에 그들의 임금 합려가 우리나라를 치다가 전사한 것을 철천지 원한으로 여기고 우리나라를 치려고 맹세한지도 3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오나라 군사들의 분노는 충천하고 그들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러니 우리로선 도저히 오나라 군사를 당적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는 군사를 거두고 굳게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월왕 구천은 부차를 얕잡아보고는 범려와 문종 대부의 만류를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려서 출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구천의 생각과 정반대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군은 호랑이같이 사나워, 월나라군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오나라군은 적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몰아넣고는 철통같이 포위해버렸다.

 

월왕 구천은 크게 후회하였다. 이제는 사지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든가, 앉아서 굶어 죽든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월왕 구천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곁에서 문종이 아뢴다.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닙니다. 오왕에게 항복하고 앞으로 신하로서 섬기겠다고 약속하여 일단 이 국면을 벗어난 다음 훗날을 도모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월왕 구천이 “우리가 화평을 청해도 저편에서 들어주지 않을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하였다.

문종이 대답한다.“오나라 태재 백비(伯嚭)는 재물과 여색을 좋아하며 또 시기하는 마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오왕 부차는 오자서가 만만치 않아서 은연중 백비를 좋아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백비의 영채에 가서 그의 환심을 사면 화평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왕 부차는 백비의 말이라면 다 잘 듣습니다.”

월왕 구천은 문종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문종을 보내 오나라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부탁한 후 오왕 부차에게 항복을 하였다.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의 항복을 받아들이려고 하자, 오나라 대신들 중에서도 강경론자인 오자서(伍子胥)는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우리 오나라와 월나라는 서로 국경을 접한 이웃 간입니다. 우리 두 나라는 공존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우리가 월나라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월나라가 우리 오나라를 없애 버릴 것입니다. 항복을 받고 월왕을 살려 주는 것은 안 됩니다.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그의 명맥을 끊어 놓아야 합니다. 더구나 선왕의 원수인 월나라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지난날의 맹세를 어찌하시렵니까?”

 

그러자, 월나라로부터 뇌물을 받은 백비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월나라군은 사생결단으로 덤빌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앞에 당할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끝내 이기더라도 우리 병사들 역시 부지기수로 죽거나 다칠 것인즉, 실로 그 뒷일이 걱정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침을 삼키며 이 싸움의 향방을 지켜보고 있을 사방의 군웅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오왕 부차는 결국 백비의 의견에 따랐다. 항복한 구천으로부터 신하로서 섬기겠다는 약속을 받아들이고,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에게 잠시 월나라에 가서 신하가 될 준비를 해서 다시 오나라에 오라고 하였다. 월나라에 돌아 온 구천은 문종에게 나라 일을 맡기고 범려를 데리고 오나라로 들어갔다.

 

월왕 구천은 조그마한 석실에 살며 낮에는 말을 기르는 신세가 되었다. 오왕 부차가 수레를 타고 행차 할 때면 언제나 월왕 구천은 말고삐를 잡고 걸었다. 오나라 백성들은 ‘저것이 월왕이란다’ 하고 조롱했다. 월왕 구천은 머리를 숙이고 그저 걷기만 했다.

월왕 구천은 이러한 조롱받는 생활을 2년 넘게 하다가, 오왕 부차가 용서해 주어서 월나라로 돌아왔다. 월왕 구천이 속마음을 숨기고 오왕 부차를 진심으로 섬기는 태도를 취하여 부차가 마음을 놓게 하였고, 태재 백비가 도와주어서 자기 나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고국에 돌아온 구천은 문종으로 하여금 나라 살림을 다스리게 하고, 범려는 오로지 군대 양성을 맡아서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월왕 구천은 오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자기 자신부터 가혹하게 다루었다. 의자나 침상을 쓰지 않고 장작을 깔고 그 위에서 기거했다. 또 쓰디 쓴 쓸개를 매달아 놓고 수시로 그것을 핥으면서 자신을 격려했다. (여기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는 밤중이면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고 울다가는 다시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듯 혼자서 ‘구천아! 지난 날 회계에서 오나라에게 항복하던 그 당시의 수치를 잃었나뇨! 하고 중얼거리면서 복수의 맹세를 굳게 하였다.

 

▲ 월왕 구천이 와신상담하는 모습. /바이두백과

 

구천이 은밀히 군사력 증강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오자서는 임금에게 건의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구천은 목숨을 살려 준 전하의 너그러운 은혜도 잊고 군사를 기르기에 여념이 없다 합니다. 월나라는 우리에게 창자의 병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에 비한다면 제나라는 몸에 생긴 종기에 불과합니다. 월나라에 대한 시급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당시 부차의 관심은 중원 쪽으로 쏠려 있었고, 중원에 진출하여 제(齊)나라를 치고, 더 나아가서 천하 패권 쟁탈의 제일차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자서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간언하자, 마침내 화가 치민 부차는 오자서에게 촉루검을 보냈다. (촉루검을 보낸 것은 자결하라는 뜻이다)

촉루검을 받은 오자서는 껄껄 웃었다.

“너의 할아버지가 패왕이 된 것도, 네 놈이 왕위에 오른 것도 모두 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위에 올랐을 때 네 놈은 오나라의 반을 내게 주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난 그걸 받지 않았지. 그런 나를 이젠 모함해서 나를 죽이려고 하다니! 내가 죽고 나면 과연 네가 무얼 하겠다는 거냐?”

 

※ 오자서는 할아버지인 오왕 합려가 임금이 되기 전인 공자 광시절부터 오왕 합려를 모시었다. 공자 광이 쿠테타를 일으켜 임금이 되도록 하였으며, 오왕 합려가 후계자를 정할 때도 부차가 후계자가 되도록 하였다. 즉, 부차가 왕이 되는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오자서는 죽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눈을 빼서 동문(東門) 위에 놓아 다오. 내 눈으로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망하는 꼴을 확인해야겠다.”

회계의 치욕적 항복이 있었던 날로부터 12년이 지난 봄, 월왕 구천은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번개같이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부차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노나라 제후와 제나라 제후와 함께 황지(黃池)란 곳에서 여러 제후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패자(覇者)가 되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오왕 부차가 많은 군사를 데리고 갔기 때문에 국내의 오나라 군대는 월나라 군대를 맞아 제대로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장장 7년 동안 오나라와 월나라는 전쟁을 계속했는데, 그 결과 초전의 승기를 끝까지 살린 월나라의 승리가 결정되었다. 부차는 월나라군이 서울인 고소(姑蘇)로 육박하자, 하는 수 없이 나아가 무릎을 꿇었고, 이로써 오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구천은 과거에 부차가 자기를 살려준 은혜를 생각하고 말했다.

“내 그대를 죽일 것이로되, 회계에서 진 빚이 있어 목숨을 빼앗지는 않겠다. 그 대신 용동(甬東)으로 가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도록 하라.”

그러나 부차는 그 호의를 사양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부차가 꿈꾸었던 천하패자의 자리는 구천의 차지가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월왕 구천이 와신상담으로 복수의 결심을 굳게 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킨 결과만을 설명하였으나,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약화시키고 월나라의 군사력을 강하게 한 구체적인 방법과 정책에 대하여는 소개하지 못했다. 다음번 글에서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치기 위하여 실질적으로 채택한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

 

손봉균씨는
국토교통부에서 30년간 재직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행정고시 19회에 합격. 전 국토지리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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