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⑦ 한강의 섬이었던 잠실의 '상전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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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⑦ 한강의 섬이었던 잠실의 '상전벽해'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2.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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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행렬은 수구문으로 도성을 빠져나와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넜다. 강은 얼어 있었다. 나루터 사공이 언 강 위를 앞서 걸으며 얼음이 두꺼운 쪽으로 행렬을 인도했다. (중략) 임금은 새벽에 남한산성에 들었다.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의 한 대목입니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지요. 그런데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는 대목이 이상하지 않나요?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있고, 송파나루도 한강 남쪽 잠실의 석촌호수 인근에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송파에서 남한산성을 가려면 배를 탈 일은 없는데 말이죠.

이 대목은 잠실이 예전에 섬이었던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잠실에서 그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 않은데요 원래 하중도(河中島), 즉 한강의 섬이었던 잠실은 물길 매립공사를 거쳐 육지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1971년이었으니 이제 50년이 좀 넘었네요. 

잠실섬 매립 당시 개발 구역에 포함돼 살던 마을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종합운동장역 인근 ‘아시아공원’의 ‘부렴마을’ 표지석과 삼전역 인근 ‘잠실근린공원’의 ‘새내 내력비’가 그렇습니다. 이 표석들을 읽다 보면 섬이었던 잠실의 과거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종합운동장 역 인근 아시아공원에 있는 ‘부렴마을’ 표석. 잠실과 부렴마을의 역사를 기록했다. 사진=강대호

육지였다 섬으로, 다시 그리고 육지로

그 기록에 따르면 잠실은 원래 살곶이, 지금의 광진구 자양동 아래 자락에 붙은 반도(半島)였습니다. 그러니까 잠실은 강북에 면한 육지였지요. 하지만 중종 15년(1520년)의 대홍수로 인해 뚝섬 아래로 샛강이 생겨 반도였던 지역이 뭍에서 잘려 나갔다고 합니다. 육지에 속했던 잠실은 그렇게 섬으로 변한 거죠. 

섬이 된 잠실에는 두 동리가 있었습니다. 섬 북쪽의 샛강에 면한 마을이 신천리(新川里), 섬 남쪽에 있는 마을이 잠실리(蠶室里)였습니다. 두 동리의 이름은 지금의 신천동과 잠실동이 이어받았지요. 여기서 잠실이라는 지명은 이 섬의 본래 모습을 알려줍니다. 

조선 초기 잠실섬에는 조정에서 설치한 동잠실(東蠶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뽕나무숲이 무성하고 누에치기가 성행했겠지요. 김정호가 제작한 <경조오부도>에 잠실섬이 뽕나무숲(桑林)으로 표시된 것에서도 잠실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김훈 작가가 『남한산성』을 집필할 때 참고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권25,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 故事本末)’의 한 대목입니다. 잠실섬의 지리적 특성을 알려주고 있지요.

“유시(酉時)에 신천(新川)과 송파(松坡)의 두 나루를 건너니, 강물이 처음 얼었다. 산 밑에 이르자 날은 이미 캄캄하고 이경에서야 비로소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임금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단지 5, 6명뿐이었다.”

임금 일행이 건넌 두 나루는 지금의 자양동에서 잠실섬 북단의 신천리로 건너가는 나루터와 섬의 남단인 잠실리에서 송파로 건너가는 나루터를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잠실이 한양도성에서 남한산성을 잇는 지름길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지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남단에 자리한 ‘송파나루터’ 표석. 사진= 강대호

『대동여지도』에서 길은 검은 선으로 표시되었는데요 도성을 나와 육로를 거쳐온 길이 잠실섬을 관통해 다시 육로로 이어지며 남한산성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육로와 육로를 연결하는 것이 잠실섬 북단과 남단에 있는 두 곳의 나루터였지요. 

잠실이 섬이었던 시절의 행정구역은 모두 강북에 속한 지역이었습니다. 잠실섬은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부터는 고양군 뚝도면에 속하게 되었지요. 해방 후 1949년에는 잠실섬과 인근 자양동 등이 서울의 성동구에 편입됩니다. 양주군과 고양군, 그리고 서울특별시 성동구는 모두 한강 북쪽에 자리한 행정구역이지요.

그래서일까요. 이 시기 잠실섬에 살았던 주민들은 뚝섬이나 자양동 등 지금의 광진구 지역과 생활권이 같았다고 합니다. 잠실섬 주민들은 나룻배를 타고 자양동으로 건너가 장을 보고 학생들은 광진구의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잠실은 강북 생활권이었습니다. 강남 3구의 한 곳으로 분류되는 송파구에 속한 지금의 잠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지요.

홍수땐 미군 헬기로 구조하기도

그런 잠실은 서울로 편입되었어도 한동안은 낙후 지역의 대명사였습니다. <경향신문> 1965년 12월 25일의 ‘서울 속의 낙도 잠실마을 딱한 사정’ 기사를 보면 교통수단과 통신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잠실섬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강의 섬이긴 했지만, 제목에서부터 잠실을 낙도(落島), 즉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비유하고 있네요. 

기사는 잠실섬에 사는 2000여 주민이 “문명에서 외면당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교통수단이라곤 “정원이 되어야 건너는 나룻배”만 있고 전기는 커녕 전화조차 없어 집중호우로 섬이 잠겨도 “SOS를 알릴 통신 수단이 없”는 잠실섬의 실상을 알리는 기사였지요.

그런 현실에도 잠실섬에 사는 어린이들은 “비행기를 탔다고 자랑”하는 “기막힌 현상”을 기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 어린이들은 집중호우 때 섬이 잠겨서 헬기로 구조된 경험을 비행기를 타본 거라고 자랑하는 것이었지요. 

서울의 낙도 잠실은 간혹 뉴스의 초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큰 홍수가 닥치면요. 그래서 미군이 헬리콥터로 주민들을 구조했다는 기사를 큰 홍수가 날 때면 볼 수 있습니다. 

경향신문 1965년 12월 25일 기사 ‘서울 속의 낙도 잠실마을 딱한 사정’. 출처=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 사례 중, <동아일보> 1966년 7월 25일 ‘잠실리 한때 고립’ 기사는 한강 물이 불어나 고립된 신천동과 잠실동 주민 1400여 명이 구조되었다고 전합니다. 처음에는 수방대책본부가 선박으로 구출하다가 물살이 거세지자 미군에 헬기를 요청했다고 하네요. 

같은 신문 7월 27일 기사에서는 미군이 선박 6척과 헬기 3대를 동원해 잠실섬 등에서 주민들을 구조했다고 전합니다.

강북과 가까운 한강의 섬이었다거나,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다는 과거의 잠실은, 고급 아파트 단지와 고층 건물들이 들어선 지금의 잠실을 떠올리면 무척 낯선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래전에 뽕나무숲이 있었던 잠실은 상전벽해(桑田碧海), 즉 뽕나무숲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는 고사성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인 거 같네요.

이러한 상전벽해를 가능하게 한 게 바로 잠실섬 주변의 물길을 막고 매립한 육속화 공사였습니다. 그 과정은 어떠했고 육지가 된 잠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다음 글에서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매주 일요일 연재>

송파구 잠실의 롯데타워. 사진=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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