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본문 4문단③…昻明 人中天地一 ⇛ ‘化三極’
상태바
[천부경] 본문 4문단③…昻明 人中天地一 ⇛ ‘化三極’
  • 주우(宙宇)
  • 승인 2018.01.27 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투명성이(明) 높아지는(昻) 덕택에 사람(人)이 중심(中)되어 천지(天地)와 하나(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존재됨됨이(一)가 완전한 십(十)이라는 단련된 경지로(鉅) 한 단계씩 닦여가는(積) 덕택에, 빈틈없이 완수해냄으로써(無匱) 완벽한 삼극(三極)으로 승화된다는(化) ‘화삼극(化三極)’과 대응된다.

 

昻明(앙명)에서 明은 ‘밝은 明’인데 투명성(透明性)을 말하고, 昻(앙)은 높다, 들다, 오르다, 뜻이 높다, 말이 저벅저벅 걷다 등의 뜻이 있는데 물가앙등(昂騰)에서처럼 점점 높아지는 개념으로 ‘해가 높이 떠오르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昻明은 해가 높이 떠오르면서 햇빛이 점점 투명해지듯이 ‘점차 투명성이 높아져 간다’는 의미로 ‘투명성이 높아진다’입니다.

앞에서 각자의 존재상태를 반영한 담마가 내포되어 내면에서 떠오르는 도우미인 本心(담마의 마음)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그 마음상태를 반영한 담마가 내포되어 외부에서 발생하는 도우미인 本太陽(담마의 현상)을 겪게 된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本心을 수용하지 않아서 本太陽이 발생합니다.

本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정직하게, 진실하게, 투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외부 눈치를 보는 수치심(羞恥心) 때문이고, 생존에 관련한 두려움 때문이며, 양심을 속이기 때문이고, 근본적으로 용기를 낼 기회를 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주의 힌트인 本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무시하면 삶이 뜻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꼬인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용기를 내서 자신의 단점을 내포하고 있는 本心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여기서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외적 모습’을 보게 하는 것을 가시성(Visibility 可視性)이라고 하고, 자신의 ‘내적 모습’을 알리는 것을 투명성(Transparency 透明性)이라고 합니다. 전자는 외부에서 벌어진 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하는 외적 정직이고, 후자는 내면에서 벌어진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내적 정직입니다. 이처럼 정직해지려는 것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부에서 양극화 해소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예산을 짜는지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 가시성이고, 어떤 이유로 예산을 책정했는지 의사결정 동기를 드러내는 것이 투명성입니다. 열린 행정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전체 맥락과 숨겨진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지 형식적으로 시민이 참여한다고 해서 펼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처럼 외적인 정직인 가시성을 넘어서 내적인 정직인 투명성을 높여감으로써 그래서 숨겨진 은밀한 의도까지 드러냄으로써 昻明할 때에야 人中天地一, 즉 사람이 중심이 되어 천지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투명성을 높여가서 자신의 생각·말·행동·믿음을 일치시키면, 더 자세히 표현해서 속마음·겉마음·말·행동·믿음을 일치시키게 된다면 사실 완전히 투명해집니다. 투명성이 어떤 경지가 되면 투명인간이 되는데 이것이 사실상 ‘신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투명해져서 ‘인간에게 보이지 않으면서 활동하는’ 투명한 신처럼 활동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아! 드디어 신이 되는 비법이 드러났군요. 속내·겉내·말·행동·믿음을 일치시켜서 투명성이 높아지면 신이 된다! 그러면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손처럼 남모르는 도움을 주는 투명인간이 된다는 거군요.

 

죽간노자를 해석한 󰡔노자의 발견󰡕에서 마음과 행동에서 벌어진 사실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에둘러 말하거나 거짓말하거나 실천하지 않거나 체하거나 위장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心言行(심언행) 불일치를 위(爲)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습대로 즉, 감정이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을 ‘무위’(無爲)라고 합니다. 죽간노자에서 무위는 도(道)가 아니라 사람이 항상 가야 할 길이라고 합니다.

‘행위상태’인 ‘爲’에는 창조, 연출, 거짓, 위장, 허영심, 위증, 사기, 표리부동, 꼼수, 체면치레, 허위, 과시, 흉내, 변장, 탈 쓰기, 속임수, 사이비, 가식, 허세, 비열 등이 있습니다. ‘존재상태’인 ‘無爲’에는 정직, 언행일치, 진실, 가시성, 투명성, 실상, 일관성, 사실대로 등이 있습니다.

 

저는 위(爲)의 존재상태이네요. 후아~ 단군신화에서의 사람이 되고 싶은 제 목적에 비추어, 사람이 항상 가야 할 길인 무위(無爲)로 있는 그대로의 본심과 감정을 꾸미지 않고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어 속과 겉을 일치시키는 도전과제가 있음이 알아집니다. 후아~ 제겐 너무나 어려운 숙제이지만 미루고 미뤄 둔 미뤄냈던 오래된 숙제를 풀어서 무위(無爲)의 존재로 거듭나겠습니다.

 

다음은 사람이 중심 된다는 ‘人中’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주인공이 수행을 시작하기 전의 세간 상태에서는 天極·地極인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사실상 주도합니다. 人極은 천지가 주인공의 자각을 돕도록 짜놓은 각본이나 연출대로 연기하는 배우일 뿐이고, 이런 진실을 자각하지 못한 주인공도 대체로 三極이라는 환경에 좌우되고 맙니다.

인간이 나름으로 열심히 활동한다고 하나 결국 천지신명의 의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인간이 일을 꾸며대지만, 결과는 하늘에 달려있다’고 하는데, 공명(孔明)이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주인공이 수행하기 시작한 출세간 상태에서는 주인공이 사실상 주도합니다. 물론 여전히 주인공이 자각하도록 天極은 각본을 쓰고 地極은 연출하며 人極은 이 시나리오대로 연기하지만, 이를 자각한 주인공은 자신에게 제공되는 本心 本太陽에서 本을 의식해서 받아들이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이제 三極이라는 환경에 좌우되지도 않습니다.

천지신명이 다양한 의도로써 本을 제공하지만, 결국 이를 알아차린 사람은 수행을 통해 자신의 존재상태를 바꿔갑니다. 이것을 ‘하늘이 일을 꾸며대지만, 결과는 인간에 달려있다’고 하는데, 증산(甑山) 상제님은 한마디로 모사재천 성사재인(謀事在天 成事在人)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사재천 성사재인이 바로 ‘人中’, 즉 ‘사람이 중심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중심 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인존시대(人尊時代), 민주주의(民主主義), 인본주의(人本主義),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지와 하나 된다는 ‘天地一’은 우주와 하나 되는 합일의 경지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사람이 천지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지 ‘천지가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대통령이 국가의 일을 책임진다(대통령이 국가가 된다)는 것이, 대통령이 곧 국가라(국가가 대통령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대통령≢국가’이듯이 ‘사람≢천지’이므로 존재됨됨이가 승화한 사람이 천지와 협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동안 아리송했던 의문이 풀립니다. 우주와 나는 하나다는 세상의 말이 설명하신 것처럼 ‘사람≢천지’이듯이 나≢우주이므로 우주가 나와 하나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우주와 하나 된다 이군요. 투명해지기로 결단해서 昻明의 존재가 되어 천지와 제대로 소통한다면 천지신명과 합일한다는 뜻이고요.

 

사람이 성장해서 천지와 (일심동체가 아닌) 동심일체(同心一體)가 됨으로써 천지에 대한 일방적 관계에서 벗어나 상호 의존하고 협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지와 같은 결정을 하리라는 것이 예측되므로 천지의 일을 대행할 수 있게 되며, 미리 예비된 동시성(同時性)의 현상이 벌어지곤 합니다.

 

일심동체(一心同體) 동심일체(同心一體)

일심동체란 설령 자신에게 다른 의견이 있거나 상대에게 오류가 있어도 한마음으로 통일한다는 의미로 주로 부부가 한편임을 강조할 때 씁니다. 동심일체란 설령 자신에게 다른 의견이 있어도 함께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서로 피드백을 통해 오류를 바로잡아 가는 공동체임을 강조할 때 씁니다. ‘一’에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가, ‘同’에는 동등하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이 동시성을 통해서 자신에게 벌어졌던 별개의 사건들이 우연히 벌어지지 않았음을 깨닫고, 그 사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알아보면서 지금 이 순간에 펼쳐지는 어떤 사건도 자신의 존재상태와 별개가 아님을 통찰하게 됩니다. 이런 관계를 알아보는 것이 바로 반야(般若)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과 관련한 반야를 터득하다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특정 패턴 속에 있는 타인들이 보이고 어떤 식으로든 타인의 자각을 도와주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에서 펼쳐지는 메커니즘을 파악해가듯이 우주의 메커니즘도 파악해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온 주변의 패턴을 알아보듯이 타인이 펼치는 특정 패턴도 알아보게 됩니다.

만일 앞의 실례에서 주인공이 부인의 바가지나 자녀의 장난을 통해서 자신에게 분노가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타인의 공격성도 알아봄으로써 내면의 분노를 인정해주고 잘 다루도록 보살펴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다수 수행인이 각성(覺醒)을 통해 세상사를 통찰하는 실력을 갖추면 만사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품는데, 이는 마치 CT MRI 촬영을 통해서 정밀하게 진단하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의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진단과 치료의 메커니즘이 다르듯이 각성과 해결의 메커니즘도 다를 뿐만 아니라 대다수 각성했다고 하는 분들도 (중이 자기 머리를 못 깎듯이) 자신의 주변 처사도 어려워하는 실정입니다.

무당이나 명리, 점성, 타로 등 타인의 운명을 보는 분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삶이 꼬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주가 리딩하는 분들이 자신의 도움을 받으러 온 내담자와 리딩하는 분의 존재상태를 연결해서 반야를 터득하기를 근본적으로 바라는데도 타인의 운명을 보는 데 급급해함으로써 그러한 우주의 바람에 부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디 자신을 알고 이해하는 데 확실히 도움되는 ‘운명을 읽는 기법’이 비록 상대에게 도움되려는 좋은 의도로 시작하고, 일부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나, 결국 상대를 조종하는 단기적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결론은 신통력이 사람을 자각하게 하지 못하며, 이 세상은 신통력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의식을 성장시키는 곳입니다.

 

타인의 생각을 읽는 방식 -앙굿따라니까야(A3:60)

붓다께서 타인의 생각을 읽는 방식으로 ①상(nimitta相)을 읽기 ②천신의 목소리로 읽기 ③탐색과 검토를 통한 사유의 확장으로 읽기 ④삼매를 성취해서 자신의 생각으로 타인의 생각을 헤아리기가 있습니다. 이 중 ④번 방식이 가장 뛰어납니다.

 

시대가 어려운 만큼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앞날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알아봄으로써 ‘모르고 가는 두려움(도전)’보다 ‘알고 가는 희망’을 꿈꾸는 것으로 보입니다. 역술가나 점성가에게서 운명을 보든, 타로 ‧ 주역 ‧ 신을 통해 점을 보든 한결같이 과거는 잘 맞히지만, 미래는 예언이나 점괘대로 되는 경우가 (내담자가 상담내용을 잊어버렸던 경우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이는 성선·성악설이 모두 교육에 취지가 있듯이 운명·숙명도 인과를 터득하라는 취지임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계획이 결정되어 있다는 관점이 숙명의 결정론(決定論)이고, 변화하고 있다는 관점이 운명의 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입니다. 이는 내일이나 한 달 후나 일 년 후를 계획하나 그때가 되어서 실제 결정하는 삶의 방식에 비유해볼 수 있습니다. 즉 계획대로 실행하기도 하나 (대다수처럼)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변경하며, 아니면 (포기를 포함해서) 완전히 다른 방식을 택하기도 하듯이 운 ‧ 숙명도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한마디로 거의 바꾸기 어려운 계약인 숙명도, 노력을 통해서 쉽게 바뀌는 계획인 운명도 나름의 방식으로 운영되다가 자신의 운 ‧ 숙명을 개인의 순수한 노력이 아니라 운명을 보거나 점을 통한 리딩, 즉 커닝하는 순간에 우주의 계획이 변경됩니다. 삶에서 인과를 터득하기보다 인과를 무시하려는 의도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운명이나 점을 봐주는 분들이 이 우주의 시스템을 혼란하게 하는 주범이므로 자신의 머리조차 깍지 못하고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같이) 어렵게 생활합니다.

진단과 치료 메커니즘은 달라서 인체를 자세히 진단해주는 MRI·CT로는 치료할 수 없듯이, 미래를 미리 일러주는 명리나 점으로는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 운영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명리나 점이 자신을 알고 이해하는 데 확실히 도움되지만, 이에 의한 조언이나 치유는 근본 치료가 아니라 약 만능주의적 임시처방입니다.

당면한 현실을 내가 자유의지로 행한 것에 의한 당연한 귀결, 즉 결정된 숙명으로 받아들이되 (미리 계획한 운명 숙명이 아니라) 미리 주어진 자유선택권으로 나날이 새롭게 선택하는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의 ‘성장에 성공하는 삶이’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昻明 人中天地一은 대전제인 1문단의 출세간 문장 중 化三極(화삼극)을 자세히 설명한다고 했습니다.

먼저 ‘化’는 昻明, 즉 투명성을 높여감으로써 일어나는 본질적 변화, 다른 말로 내적 존재상태가 바뀌어버리는 승화(昇化)를 말합니다. 투명한 신으로 승화해버린 것이죠. 이렇게 天一地一人一에서 天二地二人二로 승화한 여기의 ‘三極’은 완벽한 天三地三人三의 三極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三極의 모습이 바로 사람이 중심 되어(人中) 천지(天地)와 하나(一)가 된다는 人中天地一입니다. 이것이 소위 천인합일(天人合一), 신인합덕(神人合德),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 도즉아 아즉도(道卽我 我卽道), 그리고 사람이 곧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 수행과정을 거쳐서 마침내(終乃) 하늘이 된다는 인내천(人乃天)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천지 만물과 하나가 되는 합일(oneness)의 경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人中天地一에서 人과 天地는 동시에 작동하는 완벽한 三極의 모습인 天二三地二三人二三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는데, 수행과정에 주인공을 자각하도록 도우려고 상대역을 맡았던 人一三에는 주인공 자신은 포함되지 않으나, 투명해지기로 결단해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담마를 완수해냄으로써 승화한 주인공은 여기 人二三에는 포함됩니다.

이제 주인공은 맞상대의 배역이 필요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타인들로 하여금 자각하도록 신과 공조(共助)하는 ‘협업모드’에 돌입해서 소위 ‘신의 일’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전의 ‘반야모드’에서는 영혼이 맞상대를 통해서 자각하도록 작동하므로 ‘영혼의 일’이라고 합니다.

天地와 함께 타인을 자각하도록 협업하려면 천부경에서 제시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天地와 어떻게 역할을 분담하는지, 언제 개입해야 하는지, 어떻게 인식을 공유해가야 하는지, 어떻게 손발을 맞춰야 하는지 등 다양한 소양을 갖춰야 합니다. 여하튼 신의 일을 하려면 天地의 일을 대행하는 실력을 갖춰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 드디어 천부경에 󰡔신나이󰡕에서 말하는 자신을 깨어나게 하는 ‘영혼의 일’과 다른 사람을 깨어나게 하는 ‘신의 일’이 등장하네요.

인계(人界)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 人一三일 때 타자를 통한 담마로써 나로 하여금 자각하게 하는 것이 영혼의 일입니다.

인계에 내가 포함되는 人二三일 때는, 소명을 완수하여 투명한 존재가 됨으로써 人中天地一로 승화된 나는 이제 천지와 공조하고 협업해서 신의 일을 합니다.

 

本心 本太陽과 昻明 人中天地一을 연결해서 자세히 서술해본다면, 자신의 존재상태를 반영한 담마의 마음인 本心이 드러나지 않으면 결국 本太陽이라는 특정 외부현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즉 ‘어! 내 본심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고 마네. 그러니 어차피 내 속마음을 드러내는 게 낫다’는 점을 깨달을 때에야 자신의 의도를 투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해서 투명성을 높여갈(昻明)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람이 중심 되어 천지와 하나(人中天地一) 됩니다.

 

정리해보면, 내면에 떠오른 本心(담마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으면 외부에 本太陽(담마의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만일 本心을 숨겨도 어차피 담마의 현상으로 드러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本心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낼 것이고, 이 덕택에 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실천함으로써 결국 천지와 하나 되어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적중하는 本(담마)이 바로 반야이고 정견(正見)이므로 이 本(담마)을 용기로써 완수해낸다면 존재상태는 완전히 다른 완벽한 차원으로 승화할 것입니다(無匱化三極).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