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이야기③…박연 “옷깃 다 젖을때까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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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이야기③…박연 “옷깃 다 젖을때까지 울었다”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2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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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조선여인과 결혼해 잔류…하멜, 탈출해 세계에 조선을 알려

 

1653년 10월 29일 오후, 제주도에 표착해 억류되어 있던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일행이 제주 목사에게 불려갔다. 그때 길고 빨간 수염이 난 사람이 나타났다. 그 붉은 수염의 주인공은 그에 앞서 제주도에 표착해 조선에 귀화한 얀 얀스 벨테프레(Jan Janse Weltevree)였다. 그는 조선식으로 박연(朴淵)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 제주에 난파한 스페르베르호의 모습을 묘사한 목판화. 네덜란드 판본에 나온다.

 

하멜은 그 때 상황을 그의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총독(제주목사)이 우리에게 ”이 사람이 누군지 알겠는가“라고 묻기에 우리와 같은 화란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총독은 웃으면서 ”틀렸다. 이 사람은 코레시안(Coresian, 조선인)이다“라고 했다. 여러 가지 말과 몸짓을 서로 주고받은 뒤에,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던 그 사나이가 몹시 서툰 화란어로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암스테르담에서 온 화란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우리가 어디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를 물었다.

 

시간을 달리하지만 해상에서 표류하다가 조선 땅에 도착한 네덜란드인들끼리 만나는 장면이다. 하멜 일행은 상선 스페르웨르(Sperwer)호를 타고 나가사키로 항해하는 도중에 태풍을 만나 그해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해 제주도 관청에 억류되어 있었다. 한편 박연은 앞서 26년전에 조선 땅에 표착해 귀화인으로 살아가던 중이었다. 제주 목사가 네덜란드인 36명이 표류해 감금해두었다고 한양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 박연을 통역 겸 상황파악 차 제주로 보낸 것이다.

여기서 제주목사가 박연을 소개하면서 조선인이라고 한 대목이 흥미롭다. 박연은 이때 이미 조선에 귀화해 있었다는 얘기다.

하멜 표류기에는 박연의 자기 소개 대목이 나온다.

 

“나는 데 레프 출신의 얀 얀스 벨데프레라고 하는 사람이오. 1626년 홀란디아호를 타고 고국을 떠났소. 1627년 오버커크호를 타고 일본에 가던 중 역풍을 만나 코레아 해안에 표착하게 되었소. 마실 물이 필요해서 보트를 타고 물에 올랐다가, 동료들과 함께 붙들렸소. 다른 선원들은 보트를 타고 모선으로 되돌아 갔소.”

지금으로부터 17~18년전 타르타르인(만주의 청나라)이 이 나라를 쳐들어 왔을 때(병자호란) 벨테프레의 두 동료들은 전사했다고 했다. 그들은 데 레프 출신의 데릭 히스버츠와 암스테르담 출신의 얀 피터스 버바스트였다. 두 사람 모두 벨테프레와 함께 동인도제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박연도 여러 차례 국왕과 고관들에게 일본에 보내달라고 탄원을 올렸지만 번번히 거절됐다. 그는 원하든 원치않든, 조선 땅에 살면서 국왕으로부터 식량과 의복을 지급받아 비교적 넉넉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주도에 남만인(南蠻人, 당시엔 서양인을 그렇게 불렀다)이 파도에 휩쓸려 도착했다니, 조정에서 사정을 알아볼 겸 해서 제주에 내려 가라고 해 온 것이다.

 

박연 일행 3명은 인조 5년인 1627년 5월 12일 제주 인근에서 표착해 부산 왜관에 보내졌다. 당시 기록인 「접왜사목초록」에 따르면 남만인 3명을 왜관에 보냈지만 왜관에서는 일본인이 아니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부산에 4~5년 머물다가 조정의 명으로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박연 등 3명이 한양으로 이송된지 몇 년후 1636년에 청나라군이 침략하자 이들은 전투에 참여했고, 그중 두명이 사망한 것이다.

박연은 그후 조선에 살면서(귀화) 수도방위사령부 격인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근무했다. 그는 훈련도감에서도 외국인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병법에 재주가 있어 대포를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효종 때 북벌이 추진되면서 서양의 군사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박연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훈련도감에 배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 땅에 오래 살면서 모국어를 잊고 있었다. 하멜 일행과 만났을 때 그는 자기의 모국어를 거의 다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한다. 박연은 제주에서 하멜 일행과 한달 여 함께 지내면서 화란어를 다시 회복했다고 하멜은 회고했다.

어쨌든 먼 타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들이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하멜은 자신의 일지에 그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조 때 윤행임(尹行恁)이란 문신이 쓴 글에는 그들의 감정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박연에게 가서 알아보라고 명했다. 박연은 그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뒤에 눈믈을 떨어뜨리며 자기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었다.”

 

하지만 하멜은 자신의 기록에 이런 표현을 담지 않고 오히려 박연의 말을 듣고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었다고 적었다.

 

그(벨테프레)는 자기도 여려번 국왕과 고관들에게 일본에 보내 달라고 탄원을 올렸으니 언제나 거절되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새라면 그곳으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거요. 그러나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소. 그 대신 당신들을 보살펴 주고 식량과 의복도 지급해 줄 것이니, 이 나라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살아야 할 것이요.”

그는 우리를 많이 위로해 주면서, 우리가 국왕을 만나게 된다고 해도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지 통역을 만난 기쁨이 거의 슬픔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듬해 서울로 이송된 후 하멜 일행도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박연의 휘하에 들어갔다. 박연은 하멜 일행의 통역자이자 상관이 된 것이다. 당시 훈련도감의 대장은 이완(李浣)이었다. 하멜은 이렇게 기록했다.

 

다음날 우리는 모두 훈련대장 앞에 불려가 정렬했는데, 그 대장은 벨테프레의 통역을 통해 국왕이 우리를 자신의 호위병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월 70 캐티(근)의 쌀을 지급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나무로 만든 소패(小牌, 호패)를 하나씩 주었는데, 거기에는 우리의 이름과 나이, 출신국, 근무처가 (자기네 글자로) 새겨져 있었으며, 국왕과 대장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

그들은 세계의 무게가 자기들 어께에 얹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맹렬히 군사훈련을 했다. 중국인 호위병(호위병으로 근무하는 중국인이 많았다)과 벨테프레가 지휘관이 되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그 나라 식대로 가르치고 감시했다.

 

훈련도감에서 임금 호위병으로 근무하던 중, 하멜 일행 중 두명은 청나라 일행이 돌아갈 때 접견을 요청해 일본으로 건너가게 해달라고 충원을 넣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 조정은 청의 사신에게 뇌물을 써 무마하고 하멜 일행을 청나라 사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호남지역으로 쫓아 내기로 한다.

일행은 한양에 올라온지 2년후인 1656년 3월 전라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되는데, 이때 박연이 배웅나온다. 하멜과 박연의 만남은 2년이었다. 하멜은 일지에서 이렇게 쓰여 있다.

 

3월초 우리는 말을 타고 도성을 떠났다. 벨테프레와 지기들이 도성 외곽 1밀렌(7.4km) 지점에 있는 강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우리가 거룻배를 타자 벨테프레는 도성으로 돌아갔다. 이 것이 우리가 그를 보거나 또는 그에 대해 믿을만한 소식을 들은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후 박연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자료가 희박하다.

박연은 조선 여자와 결혼해 1남1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91년에는 네덜란드 벨테프레 가문의 후손(헹크 벨테프레)이 찾아와 박연의 후손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는 데 레프에 600여 명의 벨테프레 성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어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네덜란드는 박연의 고향인 암스테르담 북쪽 데 레프(De Rijp)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 기념하고 있다.

 

▲ 박연의 고향인 네덜란드 데 레프에 세워진 그의 동상 /위키피디아

 

박연과 하멜, 두사람은 상이한 길을 걸었다. 한 사람은 조선 땅에 살면서 가정을 꾸렸고, 하멜은 기어이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갔다. 하멜 표류기에 등장하는 박연과 하멜의 스토리를 유추해 보면, 박연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반면, 하멜은 외향적이고 모험적이었던 것 같다.

 

▲ 조선 궁궐에 불려간 하멜 일행이 효종 임금을 알현하고 있는 모습. 네덜란드 판본에 실려 있는 목판화의 하나다.

 

하멜이 모험적인 사실은 몇가지로 정리된다.

① 하멜은 세 번이나 탈출을 시도해 마침내 성공했다. 처음은 제주도 표착 이후, 두 번째는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세 번째는 마지막 탈출이다.

② 하멜은 자신이 근무한 동인도회사와 투쟁해 조선 체류기간의 체불 임금을 받아냈다. 탈출에 성공한 대다수 선원들은 돌아가 동인도회사로부터 3개월치 위로금을 받는데 그쳤다. 하지만 하멜은 달랐다. 하멜은 다른 사람이 고국으로 돌아가도 1년여 더 남아 표류기를 써 제출하며 체납 봉급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670년 동인도회사 이사회는 그에게 15년치 밀린 봉급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조선 억류 기간 13년, 나가사키 체류 1년, 바타비야 에류 1년을 합친 금액이다.

③ 하멜 일행은 탈출후 조선에 남은 8명의 선원들이 귀국하도록 노력했다. 이들은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잔류인원 귀국을 위한 외교적 압박을 넣도록 했고, 이에 일본이 나서 이들의 귀국을 성사시켰다. 8명중 1명이 사망해 남은 7명이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로 귀국했다.

④ 좋은 체험이든, 굴욕적인 체험이든 자신의 경험을 널리 알리는 용기가 있었다. 그는 효종 임금 앞에서 시키는대로 춤도 추고 노래도 했다. 제주도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해 곤장 25대나 맞고 한달간 누워 있었다는 내용도 공개했다. 나쁜 사령관을 만나 고생하던 얘기도 적었다. 대개의 회고록은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창피한 얘기는 쓰지 않지만, 하멜은 그런 얘기도 써 넣어 당대 유럽인이든, 후세 한국인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17세기 조선의 모습을 알게 해주었다.

 

▲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큄에 세워진 그의 상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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