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⑤ 서울은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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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⑤ 서울은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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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서울은 넓다. 아홉 개의 구(區)에, 가(街), 동(洞)이 대충 잡아서 삼백팔십이나 된다. 동쪽으로는 청량리 너머로 망우리, 동북쪽으로는 의정부를 바로 지척에 둔 수유리, 우이동, 서쪽으로는 인천 가도 중간의 영등포 끝, 동남쪽으로는 한강 건너의 천호동 너머, 서남쪽으로는 시흥까지 이렇게 굉장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1966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滿員)이다>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소설은 1960년대 중반 서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데요, 위 대목에서 언급한 망우리, 수유리, 천호동, 시흥 등은 1963년 1월부로 경기도에서 서울로 편입된 지역들입니다. 이때부터 서울은 한강 이남에서 동서로 확장되며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서울은 원래 한 나라의 수도(首都)를 의미하는 우리 말이면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고려시대에 남경(南京)이었던 한양은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시로 발전합니다. 

조선시대 한양의 범위는 '성저십리'

그렇다면 조선의 수도 한양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사대문 안쪽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행정적으로는 성저십리(城底十里), 즉 한양도성으로부터 십 리(4km) 이내 지역까지도 한성부가 담당하는 영역이었습니다.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에 수록된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 한양도성과 함께 성저십리의 영역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저십리를 도성에서 정확하게 10리 떨어진 지역으로 구분한 건 아니었고 강이나 하천, 혹은 산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동쪽으로는 중랑천, 서쪽으로는 홍제천, 남쪽으로는 한강, 북쪽으로는 북한산 주변을 경계로 했습니다. ‘경조오부도’를 보면 지금의 서울 강북 많은 지역이 성저십리에 속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성저십리에서는 시신을 매장할 수 없었고 벌목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릉이 성저십리 바깥인 태릉이나 구파발 등에 몰려있었다고 합니다. 대신 성저십리는 채소류나 생필품을 공급하는 지역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조선 후기에 용산이나 마포 등은 물류의 거점이 되며 도성 안 만큼이나 번창하게 됩니다.

대한제국 시기까지 한양은 북한산이 북쪽 경계, 한강이 남쪽 경계였지요. 그러다 서울이 한강 이남으로 그 영역을 넓히게 된 건 일제 강점기부터였습니다. 그 중심에 영등포가 있는데요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군 땅이었습니다.

1963년 당시 서울시 행정구역. 자료=나무위키

사실 영등포의 경성 편입은 일제 초기부터 관심사였습니다. 영등포는 교통의 요지여서 경인선 철도는 물론 한반도의 남과 북으로 연결되는 철도가 지나는 곳이었으니까요. 

영등포는 당시로서는 첨단이었던 면직, 설탕, 밀가루 공장 등이 즐비한 ‘삼백산업(三白産業)’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조건들이 합쳐지며 일제의 대륙 침탈을 위한 배후기지가 된 영등포는 돈이 몰리는 지역이 되었지요. 

영등포가 한창 발전하던 1926년 9월 <동아일보>의 ‘대경성 계획과 노량진 발전책’ 기사에 ‘강남발전준비회’가 언급됩니다. 강남발전준비회는 영등포 개발을 촉구하는 지역 유지들이 결성했는데요, 관련 자료에 ‘조병상’이라는 친일파의 이름이 보이지만 주로 일본인들 중심으로 모인 압력단체였습니다. 

이 단체의 명칭에 들어간 ‘강남’은 영등포 일대를 말합니다. 이후의 다른 신문 기사들에서도 ‘강남발전위원회’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지요. 

그러던 1936년 조선총독부는 ‘대경성계획’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시흥군의 영등포읍을 경성부로 편입하게 됩니다. 지금의 영등포역 일대는 물론 노량진, 흑석동, 대방동, 상도동 등도 이때 함께 편입되었지요. 

1920년대와 30년대 기사들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요, 노량진, 대방동, 상도동 등 영등포와 함께 경성부가 된 지역을 ‘강남’으로 칭하는 걸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 후로 한동안, 심지어 1970년대까지도 ‘강남’ 하면 영등포 일대를 뜻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1970년대까지 '강남'은 영등포 일대를 의미

그러다 1963년 1월 1일부로 경기도 땅이 대거 서울특별시에 편입됩니다. 경기도 양주군의 일부가 지금의 도봉구, 노원구, 동대문구가 되고, 경기도 시흥군의 일부가 지금의 강서구, 양천구, 금천구, 관악구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강남 3구인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도 이때 경기도에서 서울로 편입되었습니다. 1963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울은 얼추 지금의 영역을 갖게 되었고,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표현한 것처럼 굉장한(?)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강남 3구가 되는 지역들은 1960년대에 행정적으로 다른 지역에 예속되었습니다. 지금의 강남대로를 기준으로 서쪽은 영등포구에, 동쪽은 성동구에 속했었는데 워낙 넓은 지역이라 출장소를 설치해 구청 소관 업무를 담당하게 했지요. 

신사역 버스중앙차선에서 바라본 강남대로. 도로를 중심으로 오른쪽이 서초구, 왼쪽이 강남구이다. 사진=강대호

영등포구에 속한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이었고, 서울로 편입된 후에는 영등포구 신동출장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성동구에 속한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이었고, 성동구 언주출장소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서초동이나 양재동 주민들이 구청 볼일을 보려면 영등포구 신동출장소에, 압구정동이나 논현동 주민들은 성동구 언주출장소에 가야 했지요. 

어쩌면 ‘신동’이나 ‘언주’라는 지명이 낯익은 분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네요. 각급 학교의 이름 중에는 그 지역 이름에서 따온 게 많으니까요. 서초구 잠원동의 ‘신동초등학교’와 강남구 도곡동의 ‘언주초등학교’가 각각 신동면과 언주면이었던 옛 지명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들 지역은 오래도록 경기도에 속했었다가 어느 날, 서울특별시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변화가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만큼 서울은 지방과 다른 특별한 지위를 가졌으니까요. 관청부터 그랬습니다. 1960년대에 경기도청 등 지방은 내무부 소속 지방 행정기구였지만 서울특별시는 총리실 직속 행정기구였습니다.

주민들도 다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일례로 경기도민 등 지방 주민들에게 각 도에서 발행한 ‘도민증’이 신분증이었다면 서울 주민들에게는 서울특별시에서 발급한 ‘시민증’이 신분증이었지요. 전국적으로 통일된 신분증인 주민등록증 발급은 1968년 주민등록번호 제도와 함께 시행되었습니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울시 소속이 된 면사무소 공무원

당시 ‘시민증’과 ‘도민증’은 서울시민과 지방 사람을 구별하는 잣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경기도에서 서울로 편입된 지역의 지방 관청과 공무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자료들을 살펴보니 경기도에서 서울이 된 지역들의 모든 행정업무도 경기도에서 서울로 이관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면사무소에서 보유한 재산은 물론 부채까지 1963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서울시가 인수하는데요, 이때 소속 공무원도 신분을 보장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원한다면 경기도의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공무원이 서울특별시 소속 공무원으로 신분이 바뀔 수도 있었던 거죠.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 1966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소설. 기사 앞부분에 발췌된 대목이 나오는 11회차. 출처=동아일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그러고 보면 서울은 우리나라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도시인 것 같습니다. 이 글 처음에 소개한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언급한 수치를 지금과 비교해 보면 서울의 변화된 일면을 확인할 수 있지요. 

1966년에 9개의 구(區)가 있었다면 2023년 1월 현재 25개의 자치구가 있고, 당시에 동(洞)이 약 380개 있었다면 지금은 425개의 행정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1966년에 약 370만 명이 살았다면 2023년 1월 현재 약 975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숫자로만 봐도 서울이 변해왔다는 걸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계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서울의 변화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살아 숨 쉬는 유기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미래에는 서울이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매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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