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균의 역사여행⑬…손무의 후궁 군사훈련
상태바
손봉균의 역사여행⑬…손무의 후궁 군사훈련
  • 손봉균
  • 승인 2018.01.17 11: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춘추시대에 지금 중국의 상하이시의 북쪽에는 오(吳)나라가 있었고, 남쪽에는 월(越)나라가 있었다. 이 두 나라는 수십 년 동안을 전쟁하여 그것을 오월대전이라 부른다. 오월대전을 시작한 오왕 합려가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를 대장군으로 등용하는 과정에서 손무가 오왕 합려의 후궁들을 군사 훈련시킨 고사를 소개하겠다>

 

▲ 손봉균씨

 

중국 춘추시대, 기원전 515년경, 오왕 합려 시대.

오나라의 공자 광(光)이 쿠테타를 일으켜 오왕 왕료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오왕의 위에 올라 합려(闔閭)라고 하였다.

오왕 합려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오자서(伍子胥)의 원수를 갚아주기 위하여 초나라를 칠 작정이었다. 큰 나라인 초나라를 치기 위하여는 훌륭한 장수가 필요했다. 오자서가 초나라를 쳐서 이길 수 있는 장수로 손무(孫武)를 추천하였다. 손무는 역사상 유명한 장수로 손자병법을 직접 저술한 사람이다.

 

▲ 손무 초상화 /위키피디아

 

오왕 합려는 손무를 예의로서 초빙하였고, 손무도 초빙에 응하여 합려를 만났다. 손무가 자신이 저술한 병법 13편을 합려에게 설명하였다.

합려는 손자병법 13편을 다 듣고 나서 옆에 있는 오자서에게 말한다.

‘이 병법은 참으로 하늘과 땅을 꿰뚫는 재주라 하겠다. 그러나 과인의 나라는 크지 않고 군사는 많지 못하니 어찌할꼬?’

이 말을 듣고 손무가 대답한다.

‘신의 병법은 비단 병졸에게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군령만 지키면 비록 부녀자라도 나아가서 싸울 수 있습니다’

합려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선생의 말은 참으로 우활하오. 천하에 어찌 부녀자에게 무기를 주어 훈련시키는 자가 있으리오’

손무가 다시 말한다.

‘왕께서 신의 말이 우활하다면 청컨대 신으로 하여금 후궁 궁녀들을 훈련케 합시오. 그래도 신의 명령대로 되지 않으면 그 때엔 여하한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오왕 합려는 뜰 아래로 궁녀 300명을 불러 모으고 손무로 하여금 군사조련을 하게 했다.

손무는 군사란 먼저 호령을 엄격히 하고 나중에 상벌을 내리므로, 비록 이 훈련이 규모는 작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어야 한다고 하면서, 오왕 합려에게 요청하였다.

‘대왕께서 아끼는 후궁 두 사람만 선정해 주십시오. 우선 대장 두 사람을 세운 연후라야만 비로서 훈련에 계통이 섭니다‘ 오왕 합려는 평소 자기가 사랑하는 궁녀 2명을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아울러 훈련에 필요한 관리를 요청하여 선발하였다. 집법관(법을 집행하는 관리) 1명, 고리(鼔吏, 북치는 관리) 2명, 군리(집유관, 장군의 명령을 전달하는 관리) 2명을 세워 장수의 명령을 전달하게 하고, 그리고 힘센 역사(力士) 몇 사람을 뽑아 도끼와 창을 들고 단하에 늘어세워 장군의 위엄이 서게 하였다.

 

손무는 궁녀들을 좌우 2대로 나누고, 오왕 합려가 선정한 2명을 대장으로 삼고 훈시한다.

‘지금부터 군법에 대해서 말하겠다. 첫째는 행오에 혼란을 일으키지 말고, 둘째는 함부로 말하거나 떠들지 말고, 셋째는 일부러 약속을 어기지 말라. 이 세 가지를 특히 잘 지켜야 한다. 내일 복장을 갖추어서 훈련을 시작할 것이니 내일 여기에 다시 모여라’

이튿날 모든 궁녀는 몸에 갑옷을 입고 머리에 투구를 쓰고 오른 손에 칼을 잡고 왼손에 방패를 들고 있었다. 두 대장은 추가로 깃발을 들게 하여 선도가 되게 하고, 궁녀들은 두 대장을 뒤 따르게 하였다.

집유관이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북소리가 울리거든 양 부대는 다 같이 일어나라. 두 번째 북소리가 울리거든 좌대는 오른 쪽으로 돌아서서 행진하고 우대는 왼쪽으로 돌아서서 행진하라. 세 번째 북소리가 울리거든 각기 칼을 들고 싸우는 태세를 취하라. 그리고 금이 울리거든 본 자세로 돌아가 물러서라’ 집유관의 명령이 끝나자 궁녀들은 모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킬킬 웃었다.

고리(鼔吏)가 첫 번째 북을 울렸다. 그러나 궁녀들 중엔 혹 일어서는 자도 있고 그냥 앉아 있는 자도 있어서 그야 말로 뒤죽박죽이었다.

손무가 일어나 말한다.

‘명령대로 거행하지 않으니 명령이 분명치 못한 때문인 즉 이는 장수의 죄로다. 군리는 한 번 더 명령을 내리고 고리도 다시 북을 쳐라’

집유관이 명령을 다시 내리고 다시 북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궁녀들은 다 일어섰다. 그러나 비스듬히 섰거나, 서로 몸을 기대고 서서 여전히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번에는 손무가 직접 북을 치면서 집유관으로 하여금 다시 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궁녀들은 여전히 킬킬 거렸다.

손무의 두 눈은 무섭게 치켜졌다. 그리고 집법관을 불러서 물었다.

‘명령을 내려도 명령을 거행하지 않으면 이는 장수의 죄다. 그러나 세 번씩 명령을 내려도 거행하기 않으니, 이는 사졸의 죄다. 군법은 이런 죄를 어떻게 다스리나뇨?’

집법관이 대답한다. ‘마땅히 참해야(목을 쳐서 죽여야) 합니다’

손무가 명령한다.

‘모든 사졸을 다 참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니 이 죄는 두 대장에게 있다. 즉시 두 대장을 참 하여라’

좌우에 늘어선 군사들이 즉시 좌희, 우희 두 대장을 끌어내어 묶었다.

이 때 오왕 합려는 뒤에 있는 망운대에서 손무가 궁녀들을 조련시키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좌희, 우희 두 궁녀가 결박을 당하지 않는가! 오왕 합려가 신하 백비에게 표절을 주면서, ‘급히 가서 나의 명령이라 하고 두 대장을 구하여라’고 하면서 손무에게 보냈다.

백비가 나는 듯이 말을 달려가 손무에게 표절을 보이고 오왕의 명령을 전한다.

그러나 손무는 왕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대는 왕께 가서 내 말을 전하오. 자고로 군중(軍中)엔 장난삼아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신은 이미 왕의 명령을 받고 장군이 된 사람입니다. 장군이 군중에 있을 때엔 임금의 명령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임금의 명령대로 죄 있는 자를 용서한다면 많은 군사를 어찌 지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손무가 아장들에게 명령하여 두 대장을 참하게 하였다. 아장들은 두 대장의 목을 쳤다.

손무는 궁녀들 중에서 대장 둘을 다시 선출해 세웠다. 그리고 다시 명령을 내리고 고수로 하여금 북을 치게 했다. 이번에는 북을 치는 데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 정연하게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손무가 집법관에게 분부한다. 대왕에게 가서 내 말을 아뢰어라. ‘이제 병사가 다 조련됐으니 왕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사열합시오, 비록 끓는 물과 불구덩이 속이라도 나아갈 뿐 물러서는 군사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 孫武公園 옛 오나라 영토인 중국 쑤저우(蘇州) 손무공원에 세워진 손무상 /손무공원 홈페이지

 

훈련이 끝난 후, 오왕 합려는 사랑하는 두 궁녀의 죽음을 애석해 하면서, 손무를 등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오자서가 아뢴다.

‘신이 듣건대 무기는 바로 흉기(凶器)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장난조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상벌(賞罰)이 엄하지 않으면 명령이 서지 않습니다. 대왕이 큰 나라인 초나라를 정복하고 천하패권을 잡으시려면 반드시 좋은 장수를 얻어야 하며, 좋은 장수란 반드시 과감하고 엄해야만 합니다. 만일 손무를 버린다면 누가 능히 많은 강을 건너고 천리 먼 곳에 가서 싸우겠습니까. 아울러 아름다운 여자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진실로 훌륭한 장수는 얻기 어렵습니다.’

오왕 합려는 오자서의 말에 다시 깨달은 바 있어 마침내 손무를 장군으로 등용하고 장차 초나라 칠 일을 맡겼다.

 

손무는 초나라를 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여건이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오왕 합려와 함께 출전하여 초나라를 대파하고 초나라 수도인 영도까지 점령하였다. 초나라는 거의 망하였으나, 진(秦)나라 군대를 지원받아 반격하여 다시 나라를 회복하였다. 오왕 합려의 동생인 공자 부개가 반란을 일으켜, 오나라가 진(秦)나라 군사와 전쟁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도 초나라가 나라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초나라를 정벌하고 돌아 온 손무는 ‘공을 세우고 물러서지 않으면 반드시 불행히 닥쳐 온다’고 하면서 오왕 합려를 떠났다. 그 후 손무가 어디서 살다가 언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사신(史臣)이 시로써 손무를 찬탄한 것이 있다.

 

손무의 재주는 오자서를 빛냈도다.

군법으로 두 총희(寵姬)를 참하고 삼군(三軍)에 그 위엄을 떨쳤도다.

한결같이 대군을 거느리고 귀신처럼 적군의 계책을 알아냈도다.

강적 초나라를 크게 무찌르고 진(秦)나라 군사에게 약간 꺾였도다.

그의 지혜는 야비하지 않았으며 추잡한 계책을 쓰는 일이 없었도다.

마침내 높은 벼슬을 사양했으니 망하고 사는 길을 알았도다.

세상에 나와선 실력을 발휘하고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천추에 그 이름을 남겼도다.

그의 저서 손자(孫子) 십삼편(十三編)은 이로부터 병가(兵家)의 경전(經典)이 되었도다.

 

<여기서도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중요성이 나온다. 후궁을 훈련시키는 작은 일에도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여 명령을 잘 듣게 하였다>

 

손봉균씨는
국토교통부에서 30년간 재직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행정고시 19회에 합격. 전 국토지리정보원장.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