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④ 서울 강남에 있었던 시립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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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 서울이야기]④ 서울 강남에 있었던 시립 공동묘지
  • 강대호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22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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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강대호 칼럼니스트] 강남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소문을 어린 시절에 들었습니다. 강남으로 이사하던 날 어머니는 친구분 산소와 가까운 데로 간다며 좋아하셨지요. 그런데 우리 가족이 이사한 1976년 겨울쯤의 강남은 새로 지은 아파트단지나 주택가, 혹은 앞으로 들어설 건물이나 도로의 터만 보여서 어머니가 말씀하신 공동묘지와는 상관없는 동네 같았지요.

6학년이었던 1978년 대모산으로 봄 소풍 갔을 때도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산길 주변을 가리키며 예전에 공동묘지였던 곳이라 했거든요. 하지만 무덤 형상이 보이지 않아 아이들은 농담으로 여겼지요. 그래도 저는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동네 형들이 구룡산과 대모산 언저리에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했거든요. 

어머니는 결국 친구분의 산소를 찾지 못하셨습니다. 1960년대 수유리에 살 때 어머니의 교회 친구셨는데 그분의 가족들이 고인을 한강 건너 ‘학동 공동묘지’에 모셨다고 했습니다. 뚝섬에서 관을 상여로 옮겨 나룻배로 한강을 건넜다는 사연이 어린 마음에도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나네요.

자라면서 들었던 어머니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그분의 산소는 지금의 영동고등학교 인근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주택가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니 저는 믿기 힘들었지요. 어머니는 그 근처 교회를 다니셨는데 어쩌면 친구분이 묻혔던 곳과 가까운 곳이라 그리로 다니셨는지도 모르겠네요.

조선일보 1962년 9월 14일 ‘대혼잡 이룬 나루터’ 기사. 한남동 나루터가 폐쇄돼 언주 공동묘지로 가는 성묘객들이 서빙고 나루터로 몰린다는 내용. 사진제공= 조선일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나루터에 성묘객이 몰린 사연

그런데 우연히 접한 과거 기사 덕분에 오래 묻혀 있던 이런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1962년 9월 14일 <조선일보>에 실린 ‘대혼잡 이룬 나루터’라는 기사인데 추석을 앞둔 한강 서빙고 나루터에 성묘객 5000여 명이 몰려 크게 혼잡했다는 내용입니다. 

서빙고 나루터에 성묘객이 몰린 이유는 한남 나루터가 침몰 사고의 여파로 폐쇄되었기 때문이고, 5000여 명의 인파는 “광주군 언주면 반포리에 있는 시립 언주 공동묘지로 가는 성묘객들”이라고 기사는 전합니다. 

광주군 언주면은 지금의 강남구 일대를, 반포리는 지금의 개포동 일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강남구 개포동에 서울시립 공동묘지가 있던 거지요. 그런데 이들은 왜 나루터로 몰려왔을까요?

1962년도는 한남대교가 계획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강북에서 육로를 통해 강남으로 가려면 한강대교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다리를 건너도 광주군 언주면의 공동묘지는 흑석동과 동작동을 거쳐 멀리 돌아가야 하는 곳에 있었으니 도심에서 가까운 한남동이나 서빙고에서 배를 타고 잠원동으로 건너가서 말죽거리 방향으로 향하는 게 훨씬 가깝고 편했을 겁니다. 

‘묘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누군가의 죽음을 공유하고 기억하는 행위가 공동체 가치의 기본이라는 걸 보여주는 공간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가문의 산소인 선산이나 마을 주민이 공동의 묘지로 쓴 마을 주변의 공산(公山)이 공동의 가치와 규범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명절마다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는 거겠지요.

이렇듯 공동체의 가치가 담긴 묘소를 일제는 관리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을 만들어 정해진 장소에 신고를 하고 시신을 매장하도록 합니다. 이는 죽은 자를 관리하고 도시의 묘지 증가를 막으려는 정책이었지만, 토지 수탈을 위한 사전 작업이기도 했다고 학자들은 분석합니다.

묘지 관리의 연장선에서 총독부는 경성 외곽에 공동묘지를 만듭니다. 1930년에는 미아리에, 1933년에는 망우리에 경성부립 공동묘지가 들어섰지요. 그래도 모자라 1939년에는 한강 남쪽에다 경성부립 공동묘지를 신설하게 됩니다. 이때 광주군 언주면에 공동묘지가 들어서게 되었지요.

그때의 일을 1939년 3월 18일 <조선일보> 기사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사를 보면 당시 경성의 공동묘지가 포화 상태라 경기도 시흥군 동면(지금의 신림동 일대)과 광주군 언주면에 각 10만 평의 땅을 경성부가 구매해 공동묘지를 신설합니다.

이때 ‘언주 공동묘지’는 경성부립(京城府立)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복 후 서울시에서 행정 권한과 부동산 권리를 이어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1957년, 미아리 공동묘지가 각종 언론의 관심사로 떠오릅니다. 당시 미아리는 동소문 바깥의 대표적 서민 거주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주택 지을 공간이 모자라자 공동묘지 인근까지 판자촌이 들어섰다고 하네요.

그래서 도시 미관과 공중위생을 위해서 미아리에 도시계획이 필요함을 여러 언론이 제기하게 됩니다. 당시 기사들을 보면 도시 개발에 공동묘지가 방해된다는 느낌이 풍깁니다. 

서울시는 결국 미아리 공동묘지를 택지로 개발하기로 하고, 기존 분묘들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의 공동묘지로 이장하기로 합니다. 1958년 연말 기준으로 미아리 공동묘지의 분묘 1만9000여 기를 언주 공동묘지로 이장했다고 하네요. 

이런 사실들을 다룬 기사들을 보면 언주 공동묘지를 ‘서울시 지정 공동묘지’라거나 ‘서울시립’으로 표현하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립 공동묘지가 있던 광주군 언주면은 1963년 1월 1일부로 서울로 편입됩니다. 그런데 1960년대 말부터 서울의 공동묘지가 꽉 찬 상황을 전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히 망우리 공동묘지는 매장을 더는 할 수 없는 상태이고, 언주나 신림 등 한강 이남의 시립묘지들도 월평균 5백 기의 묘소가 늘어나는 형편이라 포화 상태라면서요.

1972년 개포동 일대 항공사진 확대. 서울시립 언주 공동묘지의 분묘들을 이장한 지 2년여가 흘렀지만 파묘한 구덩이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구덩이가 보이는 야산은 나중에 ‘개포공원’이 되고, 공원 바로 옆으로 개포동 2단지, 3단지, 개포도서관이 들어서게 된다. 사진제공=서울시항공사진서비스, 국토지리정보원

도시개발의 걸림돌이었던 공동묘지

1970년이 되자 서울시는 관내의 시립묘지를 폐쇄하고 서울 외곽으로 이전할 계획을 밝힙니다. 당시 기사들을 종합해보면 서울시는 강남 개발에 유리하도록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는데요, 전문가들은 묘지 관리를 일원화하는 한편 묘지의 택지 전환을 원활히 하려는 목적이 보인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한강 이남의 8개 공동묘지의 분묘들은 1970년 6월부터 이장해야 했습니다. 그 8곳 중에 언주, 신사, 학동 등 3개의 공동묘지가 지금의 강남구에 있었지요. 이런 내용을 다룬 과거 기사들을 읽으며 어머니의 친구를 모셨다는 ‘학동 공동묘지’가 생각났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개포동에 있었다던 언주 공동묘지가 정확히 어디인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온갖 문헌을 뒤져 봐도 강남에 서울시립 공동묘지가 존재했었다는 내용조차 찾기 어려웠지요. 

그러다 서울시립 공동묘지들의 옛 지번이 나온 기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모든 지번이 반가웠지만 ‘학동 공동묘지’와 ‘언주 공동묘지’의 지번이 특히 반가웠습니다. 학동 공동묘지에는 한 개의 지번만 있었는데 언주 공동묘지에는 29개의 지번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넓다는 거겠지요.

이를 현재 지번으로 바꿔서 지금의 지도와 과거 항공사진을 비교해봤습니다. 학동 공동묘지는 어머니의 기억처럼 영동고등학교 인근 논현동 주택가에 있었고, 언주 공동묘지는 구룡산과 대모산 자락을 포함한 개포동 일대에 넓게 퍼져 있었습니다. 개포동 아파트단지들이 대거 포함된 모습이었지요.

특히 1972년 개포동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에는 아직 구덩이가 남아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대략 2년 전에 이장하고 미처 덮지 못한 봉분으로 보였습니다. 마치 분화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었지요. 그곳이 세월이 지나 차츰 수풀이 덮이는 모습을 항공사진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022년 9월경 대모산에서 바라본 개포동. 앞에 보이는 숲과 구릉은 물론 멀리 보이는 아파트단지 자리까지 언주 공동묘지였다. 위의 1972년 항공사진 우측 아래와 연결되는 지역이다. 사진= 강대호

지난 가을 강남의 서울시립 공동묘지에 관한 자료를 수소문할 때 저를 이상하게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예전에 개포동에 살았거나 지금 사는 분들은 불쾌하게 생각하기도 했지요. 아파트단지가 공동묘지 자리였다니 놀라는 게 당연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무덤 위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역사가 긴 만큼 그동안 죽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테고, 그들은 이 땅 어딘가에 묻혔을 테니까요. 

그러니 우리가 사는 집은 물론 도시의 지층 저 아래에 이 땅에 살다 간 누군가가 아직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거지요. 몇 해 전 어느 재벌의 이태원 저택 앞마당에서만 61기의 유골이 나왔다고 할 정도니까요. <매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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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2023-01-25 04:58:43
좋은 내용의 기사 잘 읽었습니다. 공들인 내용 같아서 좋습니다. 다른 기사들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