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굴욕만큼이나 수난 겪은 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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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굴욕만큼이나 수난 겪은 삼전도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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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태조의 명으로 인조가 항복한 수항단에 세워…버려졌다 세워졌다 반복

 

2009년 여름,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뭔가 감명을 받아 인조 임금이 항복하러 내려간 길을 걷고 싶었다. 인조가 내려간 길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남한산성 서문으로 내려가 삼전도비까지 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두 지점을 일직선상으로 가볼 작정이었다. 하산한 지점에 공수특전부대가 있었고, 순환고속도로를 지나 잠실들까지 터벅터벅 걸어서 갔다. 370년이 지나 임금이 항복하는 길을 후손이 걷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느냐 하는 주변의 사람도 있었지만, 치욕의 역사 현장을 한번 밟아보자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삼전도비가 잠실 롯데월드 석촌호수에 서 있지만, 그 무렵엔 석촌동 주택가에 있었다. 당시 주소는 송파구 석촌동 289~3으로 그때도 그곳에 어린이 공원이 있었다. 어린이공원 한쪽 구석에 문화재로 보호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그후 2010년 4월에 역사적 고증을 거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 석촌동 어린이공원에 있을 때의 삼전도비 /사진=김인영

 

비문은 만주어와 몽골어, 한자로 쓰여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사라진 만주어를 보았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리석은 조선 왕은, 위대한 청국 황제에게 대항했다. 청국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타이르고, 자신의 대죄를 납득시켰다. 양심에 눈을 뜬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맹성하고, 위대한 청국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맹세했다. 우리조선은 이 청국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 청국에 반항한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서, 이 비석을 세우기로 한다.”

비석은 대리석 계통의 돌로 만들어졌다.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받침(龜趺, 귀부)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을 세우고 위에는 이수(螭首, 지붕돌)로 장식했다.

이 비는 병자호란 때 청 태종(홍타이지)의 요구로 세워진 것으로, 정식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라고 지었다. 국가의 자존심상 원명을 쓰지 못하고 지명을 땄을 것이다.

삼전도(三田渡)는 도성에서 송파에 이르는 한강나루로,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1970년대 이후 한강 개발로 인해 사라진 포구로 현재 롯데월드 석촌호수 근처다.

 

▲ 삼전도 굴욕을 새겨넣은 현판 /사진=김인영

 

인조 임금의 삼전도 항복 자체가 역사의 굴욕이지만, 이 비석도 굴절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637년 1월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인조의 항복을 받고 돌아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항복을 받은 ‘수항단’(受降壇)에 세우라고 요구했다.

신하들은 아무도 서로 항복비에 넣을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인조는 장유·조희일에게 글을 짓게 해, 이들이 마지못해 글을 지어 청나라에 보냈는데, 청은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번번이 거부했다.

누군가는 청나라 비위에 맞는 글을 써야 했다. 인조는 당시 이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있던 이경석(李景奭)에게 글을 쓰도록 했다. 이경석은 악역을 떠맡았다. 그는 홍타이지의 마음에 들도록 글월을 지어 바쳤고, 청 조정은 흡족해 했다. 그 글을 받아 당대 명필 오준(吳竣)이 쓰고, 전액(篆額) 글씨는 예조참판이었던 여이징(呂爾徵)이 써 비문이 새겨진 것이다. 이 비는 삼전도 항복 이듬해인 1639년(인조 17)에 세워졌다.

청나라에겐 전승비이지만, 조선에겐 항복비였다. 소중화사상에 빠져 있던 조선 사대부에겐 이 비석이 치욕의 상징처럼 보였다. 후에 송시열은 이경석이 삼전도비를 쓴 것을 문제삼아 그를 공격하기도 했다. 어쨌든 청나라의 속국에 편입되어 있는 한 삼전도비는 인조가 항복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청일전쟁)에서 패하고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사라진 1895년(고종 32)에 일본의 압력에 의해 비석은 강 속으로 쓰러졌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세웠다가, 해방후인 1959년 이승만 정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여 다시 매몰했다.

어느해 장마로 한강이 침식되면서 몸돌이 드러났다. 1963년 비석은 사적 101호로 지정되어 석촌동 어린이공원근처에 세워졌다가 2010년 원래의 위치인 석촌호수로 이전했다.

 

▲ 삼전도 비 이전(2010년) /네이버 지도

 

2007년 2월에는 30대 남성이 삼전도비에 붉은 페인트를 사용해 '철거 370'이라고 적어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370은 비석이 세워진지 370년이라는 의미였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정치인들이 나라를 잘못 이끌면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점을 경고하기 위해서 삼전도비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비석에 새겨진 글은 앞면 오른쪽은 몽골 문자,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 뒷면에는 한문으로 씌어 있어 17세기 만주어 및 몽골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는 가치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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