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본문 3문단②…用變 不動本 ⇛ ‘無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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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본문 3문단②…用變 不動本 ⇛ ‘無匱’
  • 주우(宙宇)
  • 승인 2018.01.14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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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用變 不動本 ⇛ ‘無匱’

자신의 변화(變)로 활용한(用) 덕택에 제공된 외부현상(本)과 메시지(本)에서 움직여가지(動) 않게(不) 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존재됨됨이(一)가 완전한 십(十)이라는 단련된 경지로(鉅) 한 단계씩 닦여가는(積) 덕택에, 완벽한 삼극(三極)으로 승화되는(化) 이유인 ‘빈틈없이(無匱) 완수해냄’이라는 ‘무궤(無匱)’와 대응된다.

 

이 구절은 대전제인 1문단의 둘째 구절의 無匱(무궤)를 자세히 풀어서 설명한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축약해보면 ‘변화로 활용함으로써 담마에서 움직여가지 않는다’는 간단한 표현이 됩니다.

 

세간 상태에서는 갖가지 악화하는 외부현상들이 萬往萬來하는 변화가 일어나지만, 출세간 상태인 用變 不動本은 외부상황을 참고해서 자신의 변화로 활용하는 덕택에 不動本의 결과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즉, 외부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변화로 활용함으로써 本에서 움직여가지(動) 않는(不) 겁니다. 붓다의 담마(dhamma法)와 같은 의미인 本에는 제시된 외부현상과 그 현상이 주는 메시지(天命)라는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用變(용변)의 變과 化三(화삼)의 化는 관련 있는 단어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붙여 놓으면 ‘변화’(變化)가 됩니다. ‘變’은 외부의 태도적 변화인데, 마음가짐이 바뀌는 변신(變身)을 말합니다. 반면에 ‘化’는 내면의 본질적 변화인데, 존재상태가 바뀌어버리는 승화(昇化)를 말합니다.

用變은 변화(變)로 활용(用)한다는 의미입니다. 세간 문장인 一妙衍 萬往萬來는 외부의 변화이지만, 출세간 문장인 用變 不動本은 자신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외부상황을 자신의 변화로 활용해서 자기 마음을 바꿔나가는 중에 제시된 특정 외부현상과 그 현상이 주는 메시지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내면의 본질적 변화를 통해서 승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자세히 서술해본다면, 一妙衍 萬往萬來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상태가 특정 외부현상을 펼쳐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자신의 마음가짐을 ‘의식해서’ 바꾸면 이에 연동해서 외부현상도 바뀐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면 외부현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 외부현상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꿔야 한다는 진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외부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변화’로 활용하게 되며(用變), 자신에게 제시된 그 외부현상에서 메시지를 얻을 때까지 끈기로 움직이지 않고, 그리고 찾아낸 이 메시지를 자신의 천명(本)으로 받아들이고서 내면의 본질적 변화를 통해 존재상태가 바뀔 때까지 한눈팔지 않습니다(不動). 이것은 자신에게 제시된 현상과 그 현상이 주는 메시지가 자신이 상승하는 데 가장 적절하며 알맞고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用變(용변) 不動本(부동본)은 외부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고, 자신의 변화로 활용한 덕택에 지금 여기에 제공된 本 즉, 제시되는 현상과 그 현상이 주는 메시지에서 움직여가지 않고 존재상태가 바뀔 때까지 끝장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지금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즉 그림자 현상을 제공하는 상대가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을 때까지 벗어나지 않고, 그 맞상대를 통해 찾아낸 메시지에서 움직여가지 않고 끝장을 봄으로써 내 존재상태가 상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께서 말씀하신 정로(正路)입니다. 팔리어로 쌈마 빠띠빠다(sammāpaṭipadā)라고 합니다. 그리고 一妙衍 萬往萬來와 같이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현실에 급급하여 살아가는 것을 미짜 빠띠빠다(micchāpaṭipadā) 오로(誤路)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통 정도(正道)와 사도(邪道)로 그냥 번역하는데 정확하게 살펴보면, 막가(道 magga)는 추상적 way(방식)이고, 빠띠빠다(路 paṭipadā)는 실천적 road(행로)입니다. 추론을 통해 도(道)를 알아보고, 실제로 로(路)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빠띠빠다(paṭipadā)는 사람이 실제 걸어가야 하는 길이고, 막가(magga)는 팔성도처럼 사람이 궁리해야 할 길로 ‘아, 저 길이 맞아.’ 이렇게 생각하는 상상 속의 지도 같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정로(正路) 오로(誤路)가 적절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또 이것을 기존에는 환멸문(還滅門)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했으나 붓다의 원음인 니까야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이 연기(緣起)는 다른 말로 적중법(的中法)인데 팔리어로 맛지마 담마(majjhimā-dhamma)입니다. ‘양극단으로 가지 않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적중하는 담마(연기된 현상과 메시지)를 제공하는데, 그 담마에 따라 자신의 존재상태를 바꾸면 고온(苦蘊)이 환멸한다’는 적중하는 담마가 적중법(的中法)입니다.

그리고 보통 중도(中道)로 알려진 적중로(的中路)가 있는데 맛지마 빠띠빠다(majjhimāpaṭipadā)입니다. 안목과 앎을 낳아서 궁극적 고요(寂靜) 직관지 바른 깨달음(正覺) 열반(涅槃)으로 이끌며, 쾌락과 고행 양극단으로 가지 않고 적중하는 행로인 적중로는 정견(正見)에서 시작하는 팔성도(八聖道)입니다.

이 적중하는 행로가 바로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꿔가면 대상도 또한 연동해서 바뀐다’는 ‘用變’을 체득하게 되면 ‘자신에게 제시된 외부현상 그리고 그 현상에서 주어진 메시지가 언제나 자신에게 완벽하게 맞춰진 것임을 깨닫게 되므로 그곳에서 움직여 옮기지 않는다’는 ‘不動本’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대상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알아보는 반야를 얻은 정견(正見)의 상태에서는 또 다른 정답을 찾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중로와 팔성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붓다의 발견󰡕을 참고하시길 권합니다.)

 

用變(용변) 不動本(부동본)은 대전제인 1문단의 無匱(무궤)를 자세히 설명하는 구절이라고 했습니다.

‘새는 구멍이 없다’ ‘빈틈없이 완수해낸다’는 뜻인 ‘無匱’는 한 번 주어진 기회를 놓치거나 피하지 않고 빈틈없이 완벽하게 해내는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들어서 제공된 담마를 완수해낸다는 말입니다. 항상 유비무환의 깨어있는 상태가 됨으로써 상황이 와서 내면에 경종을 울리면 無匱, 즉 조금도 빈틈이 없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들어서 새로운 차원으로 상승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지불이(各知不移)의 불이(不移)처럼 ‘옮기지 않고서’ 그 어떤 담마로부터 움직여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면서 맞상대를 통해서 어쨌든 자신의 존재상태를 바꿔버리겠다고 결단하는 것, 그럼으로써 니체가 말하는 영겁회귀를 중단시키는 것이 바로 無匱이고 用變 不動本입니다.

이것은 외부상황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설사 잘못된 듯이 보여서)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피하고 싶을지라도 그 자리가 가장 완벽한 자리임을 신뢰하고, 상대방이 아무리 원수 같을지라도 내가 터득하는 데 가장 완벽한 맞상대가 나타났으리라고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꿔감으로써(用變) 맞상대를 바꿔버리지 않아도(不動本) 된다’인데, 이런 점이 바로 ‘빈틈없이 완수해낸다’는 無匱입니다.

그러므로 用變은 내가 바뀜으로써 외부상황이 바뀌게 하라는 것이고, 不動本은 끈기 있게 그 자리를 지키면서 아무리 어려워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말고 끝장을 보라는 것이며, 無匱는 대상에서 자신을 위한 완벽성을 알아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림자인 그분 덕택에(?) 굳세게 마음먹고 임하지만 그래도 잘하다 말다를 수시로 요동치며 오락가락합니다. 그 빈번함의 횟수가 이제는 좀 줄어들긴 했으나 요동치지 않는 부동(不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요.

그런데 아무리 어려워도 내 소명을 이루는 데 완벽한 맞상대인 그분을 통해 끝장을 보라. 이것이 빈틈없이 내 소명을 완수한다는 무괴(無匱)한 용변(用變) 부동본(不動本)이다는 설명 가슴 깊이 새겨들었습니다.

 

그리고 동학의 불연기연(不然其然)이란 ‘그때는 나한테 의미가 없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나한테 의미가 있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깨달았다’고 알아보는 것을 말하는데, 이 불연기연이 바로 자신에게 벌어지는 외부현상에 대해서 과거에는 우연이라고 여겨서 그냥 모르고 지나쳤으나 지금은 그것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알아보고 자신이 변화하는 데 활용한다는 用變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각지불이(各知不移)는 각기 各(각), 알 知(지), 아니 不(불), 옮길 移(이), 즉 각자가 옮기지 않아도 됨을 안다는 뜻이고 不動本도 제공된 현상과 메시지에서 움직여가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불이(不移)와 부동(不動)은 같은 말입니다. 제각각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완벽하니까, 다시 말해 비록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대상이라도 완벽한 맞상대이니까 옮기지 않아도 됨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학(東學)하고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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