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고도 족자카르타 역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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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고도 족자카르타 역사의 비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1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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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등 외세에 저항한 본거지…자바인의 정신적 고향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에 족자카르타(Yogyakarta)라는 고도(古都)가 있다. 불교사원과 힌두사원들이 많이 있어 한국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관광지다. 대표적인 사원으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불교사원 보르부드르 사원과 가장 아름다운 힌두사원이라는 프람바난 사원을 들 수 있다.

족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에서 특별행정구로 편성돼 술탄(sultan)이라는 칭호의 왕이 지배하는 자치주다. 면적 3,133㎢으로 서울시의 5배쯤 되지만, 인도네시아 주 중에는 두 번째로 작다. 인구는 350만명이다.

 

▲ 프람바난 사원 /위키피디아

 

족자카르타는 한국의 경주와 같은 고도이지만, 다른 점은 아직도 오랜 역사를 이어온 왕족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바치고 경주 지역을 통치한 것과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이 곳에 도시가 만들어진 것은 자바섬을 지배한 마라탐(Mataram) 왕조가 수도로 정한 732년부터였다. 929년에 다른 왕조가 들어서면서 다른 곳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으나, 화산 폭발, 권력 갈등적 요소가 원인이었다고 추정된다.

마하자힛 왕조((1293–1527)에서는 지방 도시로 전락했다가 1575년 마타람 왕조가 이슬람을 등에 업고 부흥하면서 다시 수도로 삼게 되었다. 마라탐 왕조 말기에 수도를 족자카르트 북쪽 수라카르타로 이전했다.

▲ 족자카르타 기 /위키피디아

17세기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자바섬을 야금야금 잠식해 오자, 마타람 왕국 내부에 분열이 생겼다. 네덜란드 식민자와 협조하자는 파와 저항하자는 파로 갈리었다. 네덜란드에 협조적인 파쿠부워노 2세(Pakubuwono II)가 술탄(왕)에 오르자 동생인 망쿠부미(Mangkubumi)가 반란을 일으켰다. 발단은 형인 술탄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 자바섬의 영토를 떼주려 하자 동생이 반발한 것. 동생은 네덜란드에 협조할 경우 백성들이 네덜란드의 노예가 된다고 주장했다. 동생의 군대는 형의 군대를 공격해 마라탐 왕국의 남부를 장악하고 족자카르타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개입했다. 3자가 회담 끝에, 남쪽 족자카르타는 동생에게, 북쪽 수라카르타(Surakarta)는 형에게 넘기기로 협정을 맺었다. 마라탐 왕국이 두 나라로 쪼개진 것이다. 1755년 2월 13일에 체결된 이 협정을 기얀티(Giyanti) 협정이라고 한다. 이후 족자카르타의 왕은 술탄(sultan)이라는 칭호를 이어갔고, 북쪽의 수라카르타는 수난(suna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두 왕국은 더 이상 전투를 치르지 않았지만,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과 1942~1945년 일본 점령기에 인도네시아 백성들에겐 상징적 존재로 자리잡았다. 외부 침략자들은 두 개의 소왕국을 남겨두고 인도네시아 대부분을 장악하는 것으로 타협한 것이다.

 

1811년 영국이 자바섬을 점령한 적이 있다. 스탬포드 래플스(Stamford Raffles)가 이끄는 1,200명의 영국군이 이듬해 족자카르타 술탄국을 점령해 도시를 파괴하고 왕궁을 약탈했다. 족자카르타가 점령되자 자바인들은 굴욕감을 느끼고 저항정신을 불태웠다.

1824년 영국은 자바섬을 네덜란드에 돌려 줬다. 네덜란드가 다시 인도네시아를 차지했지만, 자바인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자바인들의 자각은 후에 자바 전쟁(1825~!1830)으로 이어졌다.

발단은 네덜란드인에겐 사소하자만, 자바인들에겐 중요한 일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도로를 건설하면서 족자카르타의 선왕 능묘를 관통한 것이다. 왕족과 자바인들은 지하드(성전)를 선포하고 5년간이나 네덜란드와 싸웠다. 이 전쟁에서 자바인 20만명, 네덜란드인 8,000명이 사망했다. 엄청난 피를 흘린 후 네덜란드는 승리했지만, 그들은 현지의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네덜란드인들은 족자카르타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이 점을 일본도 알았다. 일본은 3년여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면서도 족자카르타와 수르카르타의 지배권만은 인정했다. 그것을 잘못 대처하면 자바인 전체와 싸우는게 된다는 네덜란드의 경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1830년대 족자카르타와 수라카르타 /위키피디아

 

2차 대전이 끝나 일본이 패주하자 1945년 8월 수카르노(Sukarno)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때 족자카르타의 술탄 하멩쿠부워노 9세(Hamengkubuwono IX)는 수카르노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인즉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할 터이니, 족자카라타의 자치권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북쪽에 있던 수르카르타의 지배자도 마찬가지로 청원을 했다.

수카르노는 허락했다. 족자카르트와 수라카르타 두 왕국을 연방 내 특별행정구로 편입하되, 독자적인 자치권을 형성한다는 조건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참가한 좌파들이 왕국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왔다. 이리하여 수라카르타는 좌파들의 반대로 자치를 얻지 못하고, 족자카르타만 특별행정구로 떨어져 나가 술탄의 지배하에 자치가 허용되었다.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옛지배자 네덜란드가 다시 침공해왔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군대를 보내 식민화를 다시 시도했다. 수카르노가 중심이 된 독립군은 1945년에서 1949년까지 4년 5개월에 걸쳐 네덜란드와 독립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80만명이 희생되었다.

네덜란드는 1947년 7월 21일과 1948년 12월 19일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이 군사 행동을 ‘경찰 행동’(Politionele acties)이라고 불렀다. 자국 내에서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용어였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재침공하는 네덜란드군과 싸워 이김으로써 1949년 독립을 달성한다.

이 전쟁 때 인도네시아 독립군은 족자카르타를 수도로 삼았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와 전쟁을 벌이면서도 족자카르타는 점령해서는 안 된다는 과거의 뼈아픈 교훈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으로 인도네시아 독립군은 자바인의 상징을 확보한 채 우월한 전쟁을 벌일수 있었다.

족자카르타의 술탄은 공식적으로 주지사와 동격이지만, 인도네시아인들에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이탈리아 내 교황령 정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족자카르타 관광은 자카르타에서 아침에 가서 오후 늦게 돌아오는 당일치기 관광이 가능하다. 메라피 화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기름진 평야에 위치하며, 해발고도는 115m.

전통적 자바 문화의 무용과 가믈란 음악이 보호되고, 해마다 몇 차례 거행되는 왕궁 축제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주요산업으로는 전통직물인 바틱(사라사)과 금·은세공 등의 공예품생산을 비롯하여 피혁·담배·유지비누·설탕 등의 제조업이 성하다.

국립 가자마다 대학·, 인도네시아 이슬람대학, 인도네시아 조형미술 전문학교 등 각종 학교가 있는 학술도시이며, 국립도서관·박물관 등이 있다.

주민의 97%가 자바인이며, 종교는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 다양하게 신봉한다. 언어는 자바어 이외에도 인도네시아의 공식 언어인 인도네시아어가 사용된다. 슬레만(Sleman) 시에 국제공항이 있다.

 

▲ 족자카르타 술탄궁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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