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개조할수 있나…시민이 된 황제 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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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개조할수 있나…시민이 된 황제 푸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0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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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共, 푸이를 살려두고 공산주의식 인간개조 대상으로 시범 삼아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 황제였던 푸이(溥儀)는 1959년 12월 9일 무려 14년에 걸친 수감생활을 마치고 만주 푸순(撫順)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때 나이 53세. 그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닌, 평범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으로 돌아갔다.

얼마후 중국공산당 2인자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그를 초대했다. 저우언라이는 푸이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어린 시절 일로 당신을 비난할 수는 없다. 세 살에 황제가 되고, 1917년에 황위 회복의 쿠데타를 일으킨 문제에 당신의 책임은 없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비판받아야 한다. 영사관구로 뛰어들었을 때, 일본인의 보호를 받아 텐진(天津)으로 갔을 때, 그리고 만주국 원수가 되는데 동의했을 때,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푸이는 고개를 숙이고 신중하게 “어린 시절이라 하더라도 좀더 분별력이 있어야 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푸이에 대한 석방은 저우언라이의 배려 덕분이었다. 상류층 출신으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저우언라이는 공산주의자 가운데서도 합리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 저우는 푸이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그는 푸이와 그의 일족을 매년 비공식적으로 초대해 식사를 함께 했다.

저우언라이의 목적은 한때 황제였던 인간을 사샹적으로 전향시키는데 있었다. 외국의 역사를 보면 혁명이 일어나거나 전쟁으로 구정권이 붕괴되었을 때 앙시앙레짐의 수괴 또는 협력자는 사형에 처하는 것이 일반사였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러시아 혁명에서 그러했고, 2차 대전후 나치에 부역한 인물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만일 푸이가 유럽에서 재판을 받았으면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푸이를 살려두었다. 전 황제를 살려놓은 것은 중국 공산당의 프로퍼갠더(선전)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인민이 평등하고, 이 원칙은 한때 황제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그래픽=김인영

 

▲ 에드워드 베어 저 ‘마지막황제’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베어(Edward Behr, 1926~2007)가 쓴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감독의 동명 영화에 감동받아 자료를 보완하고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해서 1987년에 출간한 다큐멘터리성 서적이다. 타임, 비즈니스위크, 로이터등 다양한 언론사에 근무한 그는 기자적 감각으로 취재에 나서 청나라 마지막황제 푸이를 그려냈다. 이 책은 역사서는 아니지만, 푸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역사 순간에 함몰되는 인간상을 그려냈다.

 

저우언라이가 규정했듯이, 어렸을 때 푸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황제로 선택된 것은 당대 권력을 쥔 서태후가 죽음에 임박해 자신의 옛 애인이었던 영록(榮祿) 장군의 딸이 낳은 황족 푸이를 광서제의 후임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이 세 살. 황궁의 관리들이 푸이를 황실로 데려가려 하자 그는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푸이가 황제로 낙점된 직후 서태후와 광서제는 하루 사이를 두고 세상을 떴고, 푸이는 아버지 품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식에서 푸이는 울음을 터트렸고, 아버지 순친왕은 “울지 마세요. 곧 끝납니다. 곧 끝나요.”라고 달랬고, 대신들은 황제의 울음을 불길한 징조로 보았다. 황제 푸이는 어머니 곁을 떠나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912년 2월 12일 중화민국의 실권을 장악한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해 6살 푸이는 퇴위하게 된다. 위안스카이는 푸이로 하여금 자금성에 남아 황제로서의 대우를 받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푸이는 자신이 튀위한 사실도 몰랐다.

 

▲ 황제 즉위 직전 세 살때의 푸이가 아버지 순친왕 옆에 서있다. 앉아 있는 아버지 품에는 동생 동생 푸기여(溥傑). /위키피디아

 

푸이는 퇴위했지만, 자금성에서 여전히 황제놀음을 했다. 푸이가 11살이던 1917년 7월 1일 장쉰(張勳)이 병력을 이끌고 황제 복위(복벽)를 선언했다. 하지만 쑨원(孫文)의 국민당은 이를 반역이라고 규정, 토벌 명령을 내려 복벽운동은 12일에 그쳤다. 16세가 되던 1922년 만주족 출신 완룽(婉容)을 황후로 맞아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평안하지 않았다.

1924년 베이징을 장악한 군벌은 푸이와 황족에게 자금성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푸이와 그 일가는 아버지 순친왕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푸이는 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을 참지 못하고 그해 11월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으로 도망쳐 갔다. 일본은 이를 기회로 활용했다. 일본 군부는 이듬해 초 푸이를 텐진으로 데리고 가 일본 조계에 장원(張園)을 내주고 살도록 했다.

드디어 일본이 마각을 드러냈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푸이를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1931년 11월 13일 푸이는 만주 잉커우(營口)에 도착했고, 이듬해 만주국 집정으로 취임했다. 1934년 3월 1일 푸이는 만주국 황제에 즉위해 강덕제(康德帝)로 불리웠지만, 일본 관동군의 꼭두각시였다.

만주국 황제 재위기간은 11년, 청나라 황제 재위 3년보다 훨씬 길다. 하지만 그는 궁궐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통제된 상태에서 사실상 실권 없는 황제 노릇을 했을 뿐이다.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후 만주에 소련군이 밀려오고 푸이는 만주국 황제에서 퇴위한다. 직후 푸이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러시아 극동의 하바로프스크 감옥에 구금됐다.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한 직후 푸이는 1950년 10월 중국으로 이송되어, 만주 푸순 감옥에 수감된다. 이제 푸이는 중국 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졌다.

 

▲ 1922년 퇴위후 자금성 시절의 푸이 /위키피디아

푸순 감옥생활 9년은 푸이에겐 인간개조의 시기였다. 푸순 형무소에서 푸이는 공산당의 사상교육을 받고 완전한 공산주의자로 인간 개조가 되어 일반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저우언라이 수상의 권고로 자서전 「나의 반생」(我的前半生)을 쓰게 된다. 이 책에서 그는 비굴할 정도로 마오쩌둥(毛澤東)과 중국 인민을 숭배하고 형무소 생활을 미화했다. 그리고 어린 황제 시절에 맹목적으로 가졌던 일본에 대한 호감을 냉정한 자세로 비판했다.

1959년 12월 그는 류샤오치(劉少奇) 주석의 특사령 덕분에 모범수로 사면되었다.

석방된 후 푸이는 베이징에 있는 여동생 집에 머물렀다. 여동생의 조그마한 아파트에 머물면서 그는 가능한한 가사를 도우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손재주가 없었다. 걸핏하면 그릇을 깨거나 물건을 흘리곤 했다. 진짜 황제든, 괴뢰 황제든 손에 물을 묻히고 살지 않았던 그는 시민으로서의 생활이 서툴렀다.

한번은 아파트 앞길을 청소하다가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는 길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나는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입니다. 친척집에 머물고 있는데, 길을 잃었습니다.”고 하소연해 겨우 여동생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는 “인민에게 봉사하라”는 마오쩌둥의 말을 정확하게 실행하려고 했다고 주변의 사람들은 전했다. 버스를 올라탈 때 맨 뒷사람이 탈때까지 배려하다가 버스를 놓치기도 했다. 호텔에 들어가면 방의 출입문을 닫을줄 모르고, 손을 씻은 뒤에 수도꼭지를 잠글줄 몰랐으며, 변기에 물을 내릴줄도 몰랐다. 일생의 대부분 시기에 남의 봉사를 받으면서 지내온 습관이 15년 가까운 옥중생활로 고쳐진 듯 싶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석방후에 그는 자금성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24년 자금성에서 쫓겨난후 30여년만에 다시 찾았을 때 깨끗이 복구된 상태로 변해 있는 옛궁궐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석방된 이듬해인 1960년 푸이는 마침내 자신의 일을 부여받았다. 중국과학원 식물연구소에 부속된 식물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조수가 되었다. 식물원에서 그에게 배당된 일은 장미 재배였다. 그는 손재주가 있는 정원사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청소일이 주어졌지만 거의 한직이었다. 대충 청소를 해놓고 자서전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곧이어 그는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연구위원회 전문위원이 되었고, 1964년 저우언라이에 의해서 만주족을 대표해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1962년 푸이는 다섯 번째 결혼을 했다. 리수셴(李淑賢)이라는 40대 간호사였다. 그녀는 황족이나 귀족도 아니었고, 여염집 여인네처럼 잔소리하고 구박하는 스타일이었다. 악처였다고 한다. 평민 푸이에게 걸맞는 부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 인민으로서의 푸이의 말년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도 많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가식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은 거의 감옥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세 살이 황실로 들어가 자금성에 갇혀 있다가 일본 영사관으로 도피했고, 거기서도 연금상태나 다름없었다. 만주에 가서도 일본 관동군에 포위되었고, 그후 러시아와 중국공산당에 의해 감옥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일본에게는 천황을 찬양하고, 러시아에선 공산주의를 미화하고, 중공에게는 마오쩌둥을 숭배했다는 것이다.

푸이의 시종 노릇을 하다가 등을 돌린 이 중 한사람은 “푸이는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며 살아남는 명인이고, 말년에 몇 년간 보인 표면적인 겸손은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진실로 개조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가식적으로 개조된 것처럼 생활했다는 것이다.

 

▲ 텐진 시절 푸이와 황후 완릉 /위키피디아

 

1966년 중국에 문화대혁명의 붉은 바람이 불 무렵, 푸이는 암에 걸린다. 홍위병들은 청조 마지막 황제인 그를 공격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는 진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1967년 10월 17일 새벽 2시 30분, 베이징에서 신장암과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푸이의 유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법에 따라 화장되어 베이징 교외 바바오산 혁명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1995년 허베이성 청조 역대 황제 능묘 근처에 있는 민간 묘지 화룡황원(華龍皇園)의 경영자가 마지막 부인 리수셴에게 푸이의 묘를 조성하는 것을 제안했고, 리수셴이 동의해 푸이의 유골을 그곳으로 이장했다.

 

▲ 만주국 황제 푸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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