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실패한 친미 쿠데타, 춘생문사건
상태바
구한말 실패한 친미 쿠데타, 춘생문사건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8.01.07 16: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반일 정동파 주도, 미국 영사·선교사 동조…내부 밀고로 실패

 

경복궁에 춘생문(春生門)이라고 있었다. ‘봄 춘’(春)은 동(東)을 의미하는데, 경복궁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문(小門)으로, 일제시대에 헐렸다. 경복궁 후원(지금의 청와대)으로 가려면 지금 남아있는 서쪽 신무문과 동쪽 춘생문을 통과해야 했다. 정확한 위치는 지금 청와대 춘추관 앞 어딘가였다.

구한말 숱한 사건중에서 잊혀진 사건이 있다. 바로 ‘춘생문 사건’이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 두달반 전인 1895년 11월 28일에 일어난 일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실패한 친미(親美) 쿠데타라고 할수 있다.

 

1995년 10월 8일 명성왕후가 일본 자객들에 의해 시해되는 이른바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남의 나라 왕궁에 침입해 왕비를 죽이는 사건은 전쟁 선포에 준하는 중대한 사건이다. 그러나 고종임금은 힘이 없었다. 백성들도 무기력했다. 청일전쟁 이후 김홍집, 박영효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왕비가 살해된 날 아침,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미국 대리공사 알렌은 경복궁으로 가 고종을 알현했다. 일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가 임금 곁을 지키고, 고종은 겁에 질려 있었다. 고종은 음식에 독이 들어 있지 않을까 두려워 궁중에서 만든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고종은 외국인들이 가져다준 캔 음식 이외에는 먹지 않았다. 왕후 살해 배후에 있던 대원군도 궁정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사건후 친일 내각이 취한 가장 사악한 조치는 임금의 이름으로 죽은 왕비를 서인으로 강등하는 조치를 내리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다. 임금은 떨기는 했지만, 죽은 배필을 모욕하는 일만큼은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내각이 그 문서에 임금의 서명을 위조해 넣고 자기들의 도장을 찍었다.

이때 고종을 도와준 사람들이 미국과 영국, 러시아 공관원과 선교사들이었다. 고종과 왕세자(후에 순종)의 일거수일투족은 친일파 관리와 군인들에 의해 감시받았고, 왕실은 사실상 연금상태에 있었다.

 

이 불쌍하고 고립된 임금을 구출하자는 음모가 시도되었다. 이른바 국왕탈취음모였다. 공모자들은 을미사변이 나자 외국공관과 외국인들의 집으로 피신한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을 정동파(貞洞派)라고 하는데, 당시 중구 정동에 외국공관들이 밀집해 있었다.

이재순(李載純) 임최수(林最洙) 김재풍(金在豐) 이도철(李道徹) 이민굉(李敏宏) 이충구(李忠求) 안경수(安駉壽) 등이 모의했고, 여기에 관료 이범진(李範瑨) 이윤용(李允用) 이완용(李完用) 윤웅렬(尹雄烈) 윤치호(尹致昊) 이하영(李夏榮) 민상호(閔商鎬) 현흥택(玄興澤) 등이 가세했다.

군부도 호응했다. 친위대 제1대대 소속 중대장 남만리(南萬里)와 제2대대 소속 중대장 이규홍(李奎泓) 이하 수십명의 장교가 가담했다.

언더우드(Underwood, H. G.), 에비슨(Avison, O. R.), 헐버트(Hulbert, H. B.), 다이(Dye, W. Mc) 등 미국인 선교사와 교사 및 교관, 그리고 미국 대리공사 알렌(Allen, H. N.), 러시아공사 베베르(Veber, K. I.)와 같은 구미외교관도 이 사건에 직·간접으로 호응했다.

거사일은 1895년 11월 28일 새벽으로 잡았다. 작전 내용은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고종임금을 궁궐 밖으로 모시고 나와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새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내부에 배신자가 생겼다.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李軫鎬)가 배신해 친일파 대신 어윤중(魚允中)에게 밀고했다.

 

이 사건은 임금의 내락을 받았다. 언더우드씨의 부인이 회고록으로 쓴 「조선견문록」에는 그날 일을 이렇게 정리했다.

“(남편 언더우드씨 등) 미국인들이 급히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곧장 임금에게로 갔다. 그리고는 임금에게 밤새 무슨 일이 있을까 해서 왔노라고 알리고 그의 뜻을 물었다. 임금은 그들에게 다이 장군의 방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방은 임금의 신변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무슨 일이 나면 맨먼저 경계를 취할수 있는 곳이었다.”

고종은 자신을 구출하러 오는 군인들을 기다리며 가장 가까운 곳에 미국인 무관을 지키게 한 것이다.

언더우드 부인의 회고록을 좀 더 인용해 보자.

“열두시 정각에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언더우드씨는 벌떡 일어나 임금의 숙소로 달려갔고, 다른 두사람이 그 뒤를 바싹 좇았다. […] 문 바로 저쪽에는 장교 몇 명이 칼을 뽑아들고 가로막고 있었다. 언더우드씨는 권총으로 그 칼들을 물리치고 뛰어 들어갔고, 그 뒤에 있던 두 사람도 곧 들어섰다. 그때 막 그들은 임금이 이렇게 소리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인들은 어디 있느냐. 외국인들을 불러라.”

“여기 있습니다. 전하. 저희들은 여기 있습니다.”

세사람(미국인)은 대답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임금은 그들의 손을 잡고 밤새도록 자기 곁에 머물게 했다.

임금의 벗들(친위 쿠데타세력)은 안타깝게도 무장이 안 되었기 때문에 미리 작정해 두었던 숲속까지는 잘 진격해 들어왔으나, 함정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벗어날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몇몇은 죽고 나머지는 뿔뿔이 도망쳤다.“

 

▲ 춘생문의 위치 /문화재청

 

중대장 남만리와 이규홍은 200명의 군인을 인솔해 안국동을 경유해 건춘문(建春門)에 이르러 입궐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들이 진격해올 것을 알고 있던 친일 정부는 그 곳에 군대를 미리 준비해 두었기에 공격자들의 시도가 실패한 것이다.

임금의 군대는 삼청동으로 올라가 춘생문에 이르러 담을 넘어 입궐하려 했다. 그런데 이 곳도 친일 반역의 무리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용 쿠데타군은 체포되거나 도주해야 했다. 친위쿠데타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임최수·이도철은 사형, 이민굉·이충구 등은 종신유배형, 이재순·안경수·김재풍·남만리 등은 곤장 100대에 징역 3년 등의 처벌을 각각 받았다. 일부 정동파 인사들은 재빨리 미국 및 러시아 공사관 또는 선교사 집으로 피신해 중국등지로 망명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이용했다. 일본은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중이던 을미사변 주모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전원 석방했다. 일본은 서양인들이 쿠데타를 내외에 선전했다.

 

춘생문 사건은 실패했지만, 그 취지와 시도는 이듬해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이어졌다. 고종에겐 친일세력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힘이 필요했다. 미국과 영국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였다. 고종은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를 선택한 것이다.

고종이 정동의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하던 바로 그날, 친일 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은 급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금을 찾아갔지만 임금을 만날 수 없었다.

고종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홍집은 광화문에 이르러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을 유야무야로 처리한 일, 단발령을 내리게 한 일, 고종 임금을 연금시킨 일들은 조선 백성들을 분노케 했다. 수행원들은 일본 군대가 있는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지만, 김홍집은 사양했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떳떳하다. 그것은 천명이다.”

그는 백성들에게 에워싸여 뭇매를 맞고, 타살되었다. 그때 나이 55세였다. 총리대신이 백성들에게 타살되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지만, 임금이 외국대사관으로 피신하는 더 큰 일로 인해 묻히고 말았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