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본문⑩…五와 十 의통(醫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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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본문⑩…五와 十 의통(醫統)
  • 주우(宙宇)
  • 승인 2018.01.0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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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와 十 의통(醫統)

그다음에 五와 十을 증산 상제께서 말씀하셨던 의통(醫統)과 연관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의통(醫統)은 ‘고칠 醫(의)’와 ‘통합할 統(통)’입니다. 보통 의술에 도통한다는 의미에서 ‘통할 通(통)’으로 잘못 알거나, 아니면 자신이 타인들을 고쳐서 거느린다는 의미에서 ‘거느릴 統(통)’으로 오해합니다. 일단 ‘고칠 醫(의)’도 타인을 고쳐준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고쳐가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1과 4, 2와 3 이렇게 음과 양이 합치면 5가 됩니다. 그다음에 이 五의 상태에서 덕(德)을 펴는 상태로 상승하는 것이 바로 十입니다. 단군신화에서 사람이 되는 것이 四이고, 결혼하는 것이 五이며, 그다음 홍익(弘益)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바로 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점을 똑같이 적용해보면 五는 내가 사방위(四方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의 중심을 잡고 조율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거울인 맞상대(四)가 나타나는 즉시 알아보고 마음의 중심을 잡고 그림자 통합을 해나가는 상태입니다. 이를 중수(中數)의 상태라고 하며, 자신을 닦아가는 수기(修己)입니다.

그다음에 十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춘하추동의 기운을 골고루 갖춘 음양화평지인(陰陽和平之人)을 말합니다. 매사 적중하는 중용(中庸)의 상태이므로 치인(治人), 즉 타인을 잘되게 하는 홍익(弘益)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五는 외부의 태도적 變(변)으로 상황에 맞게 적응해서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고, 내면의 본질적 化(화)는 내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완전히 업그레이드해서 상승하는 것이므로 바로 十에 해당합니다.

수리에서 5는 1+4 또는 2+3이고, 10은 1+2+3+4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十이 된다는 것은 1+2+3+4처럼 봄·여름·가을·겨울의 기운을 골고루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상태가 되라는 의미에서 十입니다. 五는 자신을 닦는 것이고 十은 남에게 홍익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통(醫統)이라는 단어에서 五는 자신을 고쳐가고 닦아가는 면에서 ‘고칠 醫(의)’에 해당하며, 十은 춘하추동의 기운을 자유로이 활용함으로써 어떤 상황이든지 적중하는 중용의 상태로 ‘통합할 統(통)’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그림자를 통합해가는 면에서 五는 ‘통합할 統(통)’에 해당하며, 사람들을 고쳐줌으로써 홍익(弘益)하는 인간이 되는 면에서 十은 ‘고칠 醫(의)’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五가 되면 사람을 고칠 수 있는 능력(대부분 육체적 치료능력)이 실제로 생기기도 하므로 타인들을 고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주·점성·타로·역술·명리·점·기치료 등을 도구로 타인을 고쳐주는 데 집중하기 시작하면 중이 제 머리를 깎기가 어려워지듯이 자신의 앞날도 곤궁해지며 자신의 수행도 등한시하게 됩니다. 비록 아무리 타인의 변화를 이끌어내더라도 단기적이고 기법적 변화에 치중하게 되므로 앞에서 말한 대로 十으로 상승하지 못하고 결국 一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五에서도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고쳐나가야 하므로 不動本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가짐을 고쳐나가는 수기(修己)가 우선입니다. 즉, 타인을 치료하면서 자신도 치료돼야 합니다. 이는 자신이 치유될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치고 통합한다’는 의통(醫統)은 나를 고치는 의(醫)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림자 현상을 제공하는 나와 상반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신이 본질에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는 자신이 열리고(開) 열려서(闢) 개벽(開闢)해야겠다는, 즉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겠다고 결단하게 됩니다. 이렇게 결단하면 저절로 ‘나 아닌 것’ ‘나의 맞상대’ ‘나와 상반된 사람’인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나의 우상’인 밝은 그림자와 통합하는 통(統), 즉 이원성(二元性)을 극복해서 통합함으로써 양면성을 꿰뚫어보는 ‘五’의 존재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관점에서는 엄청나게 싫어하는) 금수(禽獸) 같은 그림자를 만나 통합해가는 소위 금수대도술(禽獸大道術)입니다.

이렇게 자기 치유와 양면성 통합 과정을 밟음으로써 ‘五’의 존재상태가 되고 나면 세상사를 움직이는 춘하추동의 기운을 알아보는 앎과 지혜가 체득됩니다. 그러면서 이 기운을 자유자재로 운용해서 통합하는 통(統), 즉 현상 이면에서 작동하는 법칙을 꿰뚫어보는 ‘十’의 존재상태가 됨으로써 매사에서 적중하는 중용(中庸)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런 연후에야 남을 잘되도록 홍익(弘益)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의(醫)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을 헤아림으로써 타인의 마음을 치유해서 성장하도록 돕는 소위 지심대도술(知心大道術)입니다.

고친다는 의(醫)라는 측면에서 나를 고치는 것은 五이고 타인을 고치는 것은 十이므로 확실히 구분됩니다. 그리고 통합한다는 통(統)의 측면에서도 五는 양면성 통합이고, 十은 자신이 완성되어 완전해지는 통합입니다.

 

이처럼 醫와 統이 서로 순환하는 방식은 環五十 즉, 五와 十이 고리가 되는 방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四인 그림자를 통해 사람으로서 완성해가다 보면 자신을 고치고 양면성을 통합해서 중심을 잡음으로써 五의 존재상태가 되고, 춘하추동의 기운을 통합해서 그 법칙을 꿰뚫어보고 현상의 이면을 통찰해서 타인을 고쳐줌으로써 十의 존재상태가 됩니다.

이런 의통(醫統)의 관점에서 인간이 이 세상에 와서 다른 어떤 임무보다 우선시해서 맡아야 하는 직분(職分)은 먼저 자신을 고친 이후에야 타인을 고쳐주는 의(醫)이며,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시해서 해내야 하는 업무(業務)는 타자를 통합해낸 이후에야 자신을 통합해가는 통(統)입니다.

이처럼 의통(醫統)은 양면성이 있는 단어입니다. 많은 사람이 의통을 특별한 능력으로 알고 있듯이, 실제 어떤 면에서 특별하긴 합니다. 의통이 단순히 믿음만으로 하루아침에 주어지지 않고 각자가 특별한 결단을 통해 수행해가야만 체득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길이라는 말입니다.

단군신화로 전해져온 이야기, 그리고 천부경에 따르면 一積이라는 수행의 길에서 그림자를 통합함으로써 짐승에서 사람이 되고, 그다음에 영혼과 하나 되는 결혼을 하며, 그 결과로 홍익하는 특별한 인간이 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五는 사대문 중앙에서 사방위를 제어하는 믿음의 상징인 보신각(普信閣)과 같은 것이고, 오장(五臟)에서 중앙에 해당하는 비장인 지라이기도 합니다. 지라는 삶에 중요한 기혈(氣血), 현대어로 면역체계를 튼튼히 하고 실제로 생체공장이기도 한 인체의 하수구(림프) 청소를 해서 노폐물을 원활히 잘 배출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합니다.

十은 말 그대로 상황마다 적중하는 중용(中庸)입니다. 현실 프로그램인 낙서(洛書)에는 9까지만 있고, 배후에서 작동되고 있는 운영체계인 하도(河圖)에 10이 있는데 여기에 접근하여 신의 사인(sign)을 알아보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낙서의 세상은 선악이 불분명하고 불공정한 듯이 보여서 착한 사람도 벌 받고 악한 사람도 상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단기적 안목으로는 틀림없이 그렇게 보이나 장기적 안목에서 칸트가 이야기한 은총의 상태가 되었을 때에야 선악이 바르게 되고 이 우주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네가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하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나의 완전성’과 ‘타인의 행복’을 목적으로 제시합니다. 즉 자신의 행복은 목적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도덕이 본래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라는 것입니다.”라고 했지요.

다시 말해 칸트는 자신이 행복해지려고 하지 말고 타인을 행복해지게끔 하려고 하고, 그다음 타인이 완벽해지게 하기보다는 자신이 완벽해지려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복해지려고 하지 말고 행복해질 자격을 갖추라고 말합니다. 그러려면 홍익(弘益)하라는 것입니다.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바로 홍익이거든요. 홍익은 칸트가 말한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면 행복해집니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봐야죠. 그렇게 될 수 없는 겁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없고, 오히려 타인을 행복하게 해줄 때, 그러니까 홍익(弘益)할 때 나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 익리(益利)

정신·물질적으로 이롭고 보탬이 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이익(利益)은 손해(損害)를 보지 않는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익은 살아남는다는 의미인 생존(生存)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利와 益으로 따로 분석해보겠습니다.

이기적인 利(리)는 자신의 것이 부족해서 외부의 것을 자신에게 끌어온다는 뜻으로 자신의 이득에 중심을 둠으로 공리(公利)보다 사리(私利)라는 아전인수(我田引水)적인 태도가 들어있습니다.

이타적인 益(익)은 자신의 것이 넘쳐서 도움된다고 한다면 타인에게 더해준다는 뜻으로 타인의 행복에 중심을 둠으로 사익(私益)보다는 공익(公益)이라는 상부상조(相扶相助)의 태도가 들어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홀로 살아가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려고 한다면 利(리)보다는 益(익)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利를 완전히 도외시하자는 말이 아니라 益을 우선시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利益의 순서를 거꾸로 해서 ‘益利’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무의식을 바꾸는 데 도움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사리(私利)를 버리고 공익(公益)을 우선시하는 마음가짐을 지니려고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됨됨이가 타인을 잘되게 해주는 풍요의 존재상태로 바뀌도록 하는 셈입니다. 남을 잘되게 더해줌으로써 자신에게도 이익이 돌아온다는, ‘더할 益(익)’을 우선시하는 익리(益利)! 어떠신가요?

 

제안하신 익리(益利)를 처음 접합니다. 타인을 잘되게 함으로써 결국 자신에게 도움되는 익리이네요. 이익을 거꾸로 해서 발상을 전환한 것인데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익리(益利)는 상대에게 더해주는 넉넉함이니 저절로 풍요로운 상태가 되겠군요.

그런데 저는 물건을 거래하며 싸게 사면 이익 봤다고 좋아했는데 상대 것을 더 가져온 심보이니 각박한 상태로군요. 이익의 기분을 즐기며 인색한 상태를 지속한 내가 보입니다. 왜 이익 대세로 각박한 세상을 살았나 싶네요. 물론 이익 중심의 제 선택이었고요.

저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고 싶은데 저부터 이익계산으로 각박한 세상을 창조했으니, 이제라도 익리 중심으로 되돌리겠습니다. 세상에 제대로 된 이치가 펼쳐지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익리(益利) 감사하게 활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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