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기억을 생생히 떠올리게 한 영화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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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 기억을 생생히 떠올리게 한 영화 「1987」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2.31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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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사건에서 6·29선언까지 용기있는 행등돌의 실제 이야기

 

1987년. 2017년을 하루 앞둔 시점에 30년전이 역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영화 「1987」은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가슴 아픈 영화다. 또한 그 시절을 산 사람에게는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기억을 되살린 영화였다.

박종철 고문살인 사건, 이한열 사망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군부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을 잡아 넣고 고문하던 30년전의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피해자들과 동일한 역사의 시간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선 상영 시간 내내 뭉클한 감정, 울컥 하는 감정이 동시에 치올랐다.

우리에겐 그런 시대가 분명히 있었다. 간첩을 잡아야 할 대공분실에 학생들을 잡아넣고, 고문하고 죽이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시절, 그 시대가 불과 30년전이었다.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은 민주화 투쟁을 낳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6·29 선언을 낳았다. 집권을 연장하려던 전두환 정권은 더 이상 국민의 요구를 뭉갤수 없었다.

 

▲ 영화 「1987」 포스터 /네이버 영화

 

영화는 1987년 6월, 흰 와이셔츠를 입은 셀러리맨에서 택시기사, 식당 아줌마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한 목소리로 불의에 맞섰던 뜨거웠던 시대의 흐름을 엮어 냈다. 그 힘의 원천은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경찰과 권력 수뇌부, 이에 맞서 각자의 자리에서 신념을 건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마침내 시청앞 광장의 거대한 함성을 만들어 냈다.

전두환의 장기집권 음모가 시작되던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스물두 살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다. 권력은 의문사로 덮으려 했다. 그런데, 무고한 한 젊은이의 죽음을 접한 인물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있었다. 언론은 독재 정권에 저항했고, 시민들은 반발했다. 이들의 행동이 사슬처럼 맞물리면서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 냈다. 그 드라마와 같은 흐름을 영화로 만들어 낸 것이 「1987」이다.

 

▲ 영화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컸다. 영화 배경으로 나오는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자는 실명으로 등장한다.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와 작고한 동아일보의 윤상삼 기자다.

한국기자협회보엔 당시 취재 상황을 전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중앙일보 1월15일자 1.5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2단 기사로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가 박종철 사건의 단초를 파악한 것은 이날 오전 9시50분쯤이었다.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서울형사지방법원을 거쳐 대검찰청으로 취재를 돌던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대검찰청 이홍규 공안4과장 사무실에 들어섰다. 이홍규 과장은 신 기자에게 자리를 권하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경찰, 큰일났어.”

6년째 법조를 출입하고 있던 신 기자는 이홍규 과장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이 대목은 영화에 그대로 그려진다. 신 기자는 곧바로 추가 취재에 들어갔다. 이진강 대검 중앙수사부 1과장, 최명부 서울지검 1차장검사를 거쳐 김재기 서울지검 공안부 학원담당 검사실에 들러 이름이 '박종ㅇ'이고,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그의 취재에 서울대 출입하는 기자가 ‘박종ㅇ’의 이름은 ‘박종철’이며, 그의 집 주소가 부산시 청학동341의 31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박종철 사망 사건의 기사는 낮 12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중앙일보 1.5판(1판을 인쇄하다가 새 기사를 추가해 돌판으로 제작한 신문)사회면에 2단 기사로 실렸다. 당시 중앙일보는 석간이었다.

 

▲ 1987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 7면 기사 /기자협회보

 

당시 중앙일보 2단 기사는 다음과 같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서울대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박 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 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학교 측은 박 군이 3~4일전 학과 연구실에 잠시 들렀다가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고 밝혔다.

한편 부산시 청학동 341의 31 박 군 집에는 박 군의 사망소식을 14일 부산시경으로부터 통고받은 아버지 박정기 씨(57·청학양수장 고용원) 등 가족들이 모두 상경하고 비어 있었다. 박 군의 누나 박은숙 씨(24)는 지난해 여름방학 때부터 박 군이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최근 무슨 사건으로 언제 경찰에 연행됐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박 군은 토성국교·영남중·혜광고교를 거쳤으며 아버지의 월수입은 20만 원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편이다. (중앙일보 1987년 1월15일 7면.)

 

 

이 2단 기사가 세상의 흐름을 바꾼 시초였다.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의 활동도 영화에 그대로 나온다. 배우 이희준이 연기한 고 윤상삼 기자는 중앙대부속 용산병원 진료실에서 내과전문의 오연상씨를 인터뷰해 물고문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영화 후반부에 이한열 연세대생이 최루탄에 맞아 동료가 끌고 가는 모습도 취재현자의 기자들이 찍은 사진이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정문에서 연세대생들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학교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중에 이한열 열사가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당시 머리를 다쳐 피를 흘리는 이한열 열사를 연세대생 이종창씨가 부축하고 있던 사진은 중앙일보와 뉴욕타임스 1면에 실렸다.

 

30년이 지난 지금, 학생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던 치안당국의 책임자 자리에 197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김부겸 장관이 맡고 있다. 김 장관도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경찰청장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그는 영화를 본 소감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아무리 침착하려 애써도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났습니다. 1987년 6월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으로 막내 실무자였습니다. 부끄럽게 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선배들을 따라 운동을 했습니다. 어느새 30년이 지나 이제 기성세대가 되었고, 공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어제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경찰청장과 함께 영화 <1987>를 관람하는 동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같습니다. 어렵게 쟁취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늘 그대로 일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늘 소중히 보듬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군부 독재권력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이 많습니다. 경제, 사회적인 또 다른 강자의 횡포는 없는지 끊임없이 지키고 싸워야 합니다. (김부겸 장관 페이스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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