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본문⑥…運三極 四成 環五十 ⇛ ‘一積十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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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본문⑥…運三極 四成 環五十 ⇛ ‘一積十鉅’
  • 주우(宙宇)
  • 승인 2017.12.3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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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자신의 존재됨됨이에 따라 펼쳐진 전3극(前三極)이라는 현상을 제대로 운용한다면(運) 사(四)를 완성해가는(成) 덕분에 오(五)와 십(十)이란 고리(環)를 형성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존재됨됨이(一)가 완전한 십(十)이라는 단련된 경지로(鉅) 한 단계씩 닦여간다(積)’는 ‘일적십거(一積十鉅)’와 대응된다.

 

이 구절은 대전제인 1문단의 둘째 구절의 一積十鉅(일적십거)를 자세히 풀어서 설명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앞에 ‘一積’을 넣어서 一積(일적) 運三極(운삼극) 四成(사성) 環五十(환오십)이라고 보면 도움됩니다. 그러면 ‘一’, 즉 나의 존재됨됨이가 한 단계씩 닦여간다면(積) 運三極하여 四成한 덕에 五十의 고리(環)가 형성된다는 것이 됩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運三極은, 같은 출세간 문장인 3문단 둘째 구절 중 用變(용변)에서 얻은 힌트를 통해 三極을 잘 활용하고 운용한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三極을 ‘자신의 변화’에 운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三極이라는 외부현상이 벌어질 때마다 그 현상을 자신의 존재상태와 연결해보고, 그 현상이 벌어지는 취지를 알아본 다음에 ‘타인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변화’ 기회로 적극 적용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외부에 제시된 상황을 ‘자신의 변화’에 운용하는 運三極을 통해서 四成, 즉 ‘四’를 완성해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四에 관련해서 탐구하기 전에 먼저 ‘四成(사성)’과 ‘成四(성사)’의 차이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도(道)의 경지를 이룬다’는 성도(成道)와 ‘도(道)가 완성된다’는 도성(道成)이 다르듯이 ‘四를 성취한다’는 성사(成四)와 ‘四가 완성된다’는 사성(四成)은 다릅니다. 완성되어 있던 四에 도달한다는 성사(成四)가 아니라, ‘四成’이란 ‘四가 완성된다’ = ‘四가 완성을 향해서 간다.’ = ‘四가 완성되어 진다’, 즉 ‘四를 완성해간다’는 뉘앙스입니다. 이를테면 ‘법관이 되려고 법을 공부하는’ 방식이 아니라 ‘법을 공부하다 보니 법관이 된다’는 방식입니다. 즉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는 방식입니다.

얼마 전 천부경을 궁구하면서 ‘成四(성사)’가 아니라 ‘四成(사성)’이라고 한 이유가 엄청나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천부경의 전체 맥락을 파악하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運三極을 통해서 자신에게 제시된 인생 과제를 알게 된 후에 ‘四’를 완성해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五’와 ‘十’이라는 고리를 형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에 대한 절대 신앙이나 절대 경지를 부추기는 수행은 한방에 삶의 숙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기대와 교만을 줌으로써 일종의 미끼처럼 작동하기도 합니다. 대다수 수행자는 (문자적 의미에만 매달려서) 번뇌를 해결함으로써 다른 과정을 건너뛰어 열반으로 직행하는 사실상 한방주의에 매달린 형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수행의 계기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한방주의처럼 여겨져 온 붓다는 실제로 29세(평균수명으로 본다면 요즘 나이로는 50세)에 출가할 때까지 세속적인 훈련을 통해 온갖 학문·기예·교양을 겸비하여 문무(文武)에 출중한 실력을 갖추는 과정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출가 이후에도 6년간 수행에 관련해 상당 수준의 체험에 도달한 연후에야 새로운 ‘안으로(ajjhattaṃ) 사마타’ 그리고 붓다만의 ‘탁월한 반야의 메시지(adhipaññādhamma)라는 위파사나’를 창안한 것입니다.

니까야에는 붓다께서 브라만에게 신분 때문에 브라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위가 브라만다우므로 브라만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들도 모르는 브라만의 유래와 역사에 관해 구체적으로 심도 있게 일깨워주는 내용이 곧잘 등장합니다. 그래서 붓다는 상당 수준에 이르러야 터득하는 고집환로(苦集還路)보다 기본소양인 ‘지집환로’(知集還路)를 강조했습니다.

이렇듯 ‘四’를 완성해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해가는 점은 ‘선업(善業)을 계발하며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붓다의 정정진(正精進), ‘목적이 선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이를테면 성공했든 실패했든 오로지 선(善)해지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려는 활동 그 자체로 선하다’는 칸트의 선의지(善意志), ‘정성을 다하려고 노력한다’는 중용(中庸)의 성지(誠之)에서 추구하는 끈기와 같습니다.

 

저도 한방주의가 있다고 고백해야겠네요. 창조주인 신에게 상을 받으려면 신의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경지가 되려면 욕심이 없어야 하는데도 욕심도 많고 질투도 많고 게으른 저는 그 경지에 도달하려니 자신도 없고 너무 힘들다 여겼습니다.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아깝고 한 걸음 한걸음 완성해가려면 감질나고 힘드니깐 한 방에 획득하는 비법을 찾기 시작한 저는 그런 존재상태가 된 듯이 위장하기로 했어요.

다행히 이 전략이 주변에 먹혀들었고 긴 세월을 지속했는데, 그 결과 내가 그런 경지에 이른 줄 상상하고 착각하는 환상 속에 살아왔네요. 겉으로는 엄청나게 잘난 척 위장한 모습을 내 모습이라고 알았지만,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숨겨진 진면목은 나를 무척 힘들게 했군요. 그동안 주변을 속이고 나도 속고 있었다는 믿고 싶지 않은, 믿지 않을 수 없는 사실만 남았네요. 실질적인 실력을 갖추는 노력 없이 한 방에 공짜로 거저먹으려다 세월만 죽이고 껍데기만 남았군요.

 

이제 단군신화의 비밀과 관련된 중대한 ‘四’에 관련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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