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 말기 역사가 펼쳐지는 펄 벅의 「연인 서태후」
상태바
청조 말기 역사가 펼쳐지는 펄 벅의 「연인 서태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2.27 18: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손엔 꽃을 쥐고, 다른 손엔 칼을 휘두른 여인…3대에 걸친 실권자

 

헌책방에서 펄 벅이 쓴 「연인 서태후」를 사서 단숨에 읽었다. 소설의 형식을 취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전개한 서태후의 전기를 읽은 느낌이었다. 펄 벅은 팩트를 정확하게 찾아내 서태후에게 감정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여제의 모습을 그려냈다.

▲ ‘연인 서태후’ 책표지 /출판사 사이트

원제는 「Imperial Woman」(1956년 刊), 즉 ‘제국의 여인’이다. 이종길라는 분이 번역하면서 서태후와 그녀의 연인인 영록(榮祿) 장군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제목으로 단 것 같다.

펄 벅(Pearl S. Buck, 1892~1973)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에서 태어나 생후 수개월만에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에 건너가 살았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후 다시 중국에 들어가 결혼해 살았다. 「대지」(The Good Earth)로 1938년 미국 여성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펄 벅의 중국명은 새진주(賽珍珠)다.

‘연인 서태후’에서 작가는 동양 사람인 것처럼 중국 문화를 퍽이나 잘 이해했다. 표현 방법이라든지, 등장인물들의 숨소리, 사고 등을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살려 냈다. 이 책은 사실(fact)과 소설(novel)을 잘 믹스한 팩션(faction)이라 하겠다.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면서도 역사서술에서 부족한 서태후의 사랑 등 인간적 삽화를 파고들어 공인과 개인을 오가며 서태후의 면모를 드러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 펄 벅 /위키피디아

서태후의 연인 영록(1836~1903)년은 서태후가 자금성으로 들어오기 전 정혼자였다. 태후는 권력을 쥔 후 영록을 황실경비대장을 진급시켜 그의 옆에 두었으며, 영록은 권력 투쟁시에 언제나 태후의 편에 섰다. 영록은 서태후가 죽기 5년전에 사망함으로써 거의 전 인생을 서태후에 봉사했고, 그의 딸 유란(幼蘭)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생모가 된다. 서태후가 죽기 며칠전에 자신의 연인에게서 나온 핏줄에서 황제를 옹립했지만, 청나라는 곧이어 신해혁명으로 수명을 다하고 만다.

서태후(1835.11.29.~1908.11.15.)는 청나라 말기에 중국을 통치한 여제(女帝)였다. 한편에선 그녀를 악녀의 화신으로 저주하기도 하지만, 또다른 반대편에선 시대의 등불로 비춰졌다. 그녀는 한손엔 꽃을 쥐고, 다른 손엔 칼을 휘둘렀다.

펄 벅의 책은 서태후가 인생의 시기에 따라 불리던 예흐나라, 자희황후, 서태후, 여왕, 늙은 부처의 연대기 순으로 전개된다. 이 책은 서태후를 중심으로 함풍제에서 동치제, 광서제에 이르는 청나라 역사를 서술하며 흥미진진하게 스토리를 펼친다.

 

① 예흐나라(葉赫那拉)

서태후는 1835년 안휘성의 몰락한 만주족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매우 가난해 청소도 하고 어머니 일을 도우면서 살았다. 그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인 영록을 버리면서 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 했다.

 

② 자희황후(慈禧皇后)

16살 되던 1851년 함풍제의 궁녀가 된다. 함께 자금성에 들어간 사촌 여동생 사코타는 황후가 되지만, 예흐나라는 황제의 부인들 중 서열 5위였다.

예흐나라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그는 궁녀에 머물지 않고 황제의 아들을 낳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 환관에게 뇌물을 주어 황제와의 잠자리를 만들었다. 그녀는 미모에다 사람을 끄는 말솜씨가 있었기에 황제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았다. 황제는 기뻐했고, 그를 사촌여동생 사코타와 동일한 위치의 황후 자리로 승진했다.

그녀에겐 야심이 있었다. 도서관에 가서 유교 경전을 읽고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을 불러 정국과 국제동향을 배워나갔다.

그녀는 황후이자 황태자의 어머니로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에 관여했다. 함풍제가 병이 들자 그녀는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황제의 이름으로 칙령을 발표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베이징을 침범하자 황실은 열하에 있는 별궁으로 피신하고, 그 과정에서 함풍제는 31세에 요절했다. (1861년)

 

▲ 서태후 초상화 /위키피디아

 

③ 서태후(西太后)

함풍제가 죽기 직전에 서태후는 실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함풍제가 죽자 그녀는 재빨리 옥새를 차지하고 한때 애인이었던 영록과 공친왕, 환관 안덕해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수렴청정을 반대한 숙순(肅順)등 황족을 숙청했다. 그녀는 여섯 살에 불과한 아들을 황제로 즉위케 했으니, 그가 동치제다.

황태후가 된 그녀는 사촌여동생인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그녀의 거처는 자금성의 서쪽에 있다 해서 서태후(西太后), 자안황태후는 동쪽에 거주하고 있다고 해서 동태후(東太后)라고 불렀다. 형식적으로는 두 태후의 섭정체제였지만, 동태후는 얌전하고 나서길 싫어하기 때문에 황제의 친모인 서태후가 사살상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서태후는 황족인 공친왕과 함께 자강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제도와 인사 개혁을 통해 한족들에게도 기회를 주었고 태평천국의 난도 완전히 진압하는 등 늙은 황제국은 기사회생하는 듯 보였다. 역사가들은 이를 동치중흥이라고 한다.

아들 동치제가 나이가 들면서 친정에 나서자 서태후는 뒷방에 머물렀다. 게다가 동치제는 생모인 서태후보다 동태후를 더 따랐다. 이 것이 서태후로 하여금 아들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그러던 중에 동치제는 몹쓸 병에 걸렸다. 서태후는 이를 기화로 다시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눈에 가시였던 동치제의 황후를 자살하도록 한다. (1874년)

 

④ 여왕

아들이 죽자 그녀는 그의 후계자로 함풍제의 동생(순친왕)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네 살 짜라 아이를 황제로 올리니, 그가 광서제다. 어린 황제를 또 올린 것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계속하기 위한 야망 때문이었다.

광서제는 비정한 서태후에게 주눅 들어 기도 펴지 못했다. 황후도 서태후 가문에서 맞아야 했다.

1889년 서태후는 광서제를 결혼시키면서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고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겉으론 권력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 난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서태후는 옥새를 쥐고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1898년 광서제가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와 함께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등 개혁을 시도하자(무술변법),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광서제를 궁궐의 한 섬에 유폐시키고 개혁조치를 무산시켰다. 100일만에 무술변볍을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한 사건을 무술정변이라 한다.

 

⑤ 늙은 부처

무술정변 때 등장하는 인물이 위안스카이(袁世凱)다. 광서제에겐 서태후를 제거하기 위해 당시 군부내 실력자였던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배신했다. 그는 광서제의 음모를 서태후의 애인 영록에게 알려줬고, 음모를 알게 된 서태후는 변볍운동에 나선 모든 지식인을 잡아들였다. 캉유웨이는는 해외로 망명해 목숨은 건졌지만, 다른 개혁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 쿠데타로 서태후는 수렴(발)을 걷고 직접 통치하게 된다.

다시 실권을 쥔 서태후는 반외세를 부르짓는 비밀결사운동인 의화단(義和團)을 끌어들인다. 이 집단은 종교적 비밀결사로 부청멸양(扶淸滅洋)의 반제국주의를 주창했다. 의화단은 1899년 산동 서부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외국인 특히 기독교도를 박해했다. 서태후는 이들의 배후에 있었다.

하지만 영국··독일·프랑스 등 8개국 연합군에게 베이징을 진격해오자 서태후는 시안(西安)으로 피신했다. 의화단의 난이 진압되고 1901년 9월 청 조정은 엄청난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굴욕적 조항이 포함된 신축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에 돌아온 서태후의 그후 모습은 딴판이었다. 서양식 개혁에 반대해온 그녀는 입헌 준비, 실업(實業), 교육의 진흥 등 개혁정치를 실시하는등 서양 열강과 타협적 자세를 취했다.

청나라 최고의 권력자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이었다. 의화단의 난 직후 서태후는 70줄에 들어섰고, 노쇠해졌다. 극심한 사치와 향락을 즐기던 서태후는 너무 많은 음식을 먹어 이질에 걸렸다.

1908년 11월 14일 10년간 유폐되어있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다음날인 1908년 11월 15일 서태후는 73세의 나아로 사망했다. 서태후는 죽기 이틀전에 옛 애인 영록의 딸과 광서제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세 살짜리 부의를 차기 황제로 지목했으니, 그가 청황실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다.

청 황실은 서태후가 죽은지 3년후인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으로 인해 마감한다. 서태후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