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본문⑤…탐진치(貪瞋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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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본문⑤…탐진치(貪瞋痴)
  • 주우(宙宇)
  • 승인 2017.12.25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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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진치(貪瞋痴)

인간의 뇌에서 본능을 담당하는 파충류 뇌는 호흡 ‧ 혈압 ‧ 심장박동 등 생명체의 기본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뇌간 ‧ 간뇌로 구성된 인간의 파충류 뇌는 생존에 집중해서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정보를 취합해 반응하는 역할을 합니다.

붓다는 생존에 기초한 뇌의 작동방식을 탐진치라고 했습니다. 대상이 자신에게 나타난 이유를 모르는 무명(無明 avijjā)에다 대상을 자신의 존재상태와 연결하지 못하는 식(識 viññāṇa)의 상태에서 자신의 먹이가 나타난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다 싶어서 욕망으로 달려드는 행동이 탐(貪 rāga)이고, 대상과 영역이 겹치는 적이거나 자신이 굶주리면 어쩔 수 없이 싸우는 행동이 진(瞋 dosa)이며, 대상이 자신보다 강해서 도망가거나 만일 싸우더라도 손실이 크다고 여겨 회피하는 행동을 치(痴 moha)라고 합니다.

이런 좋거나 싫거나 무시하는 감정(受 vedanā)에 기초한 행동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에 적응하고 생존하도록 돕는 에고의 기능이기도 하지만, 생존에 급급해하는 투쟁 ‧ 도주반응(fight-or-flight reaction)은 마주하는 대상과 상황에 따라서 오히려 유익한 기회를 놓치게 함으로써 삶을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맛지마니까야(M44)에 “즐거운 감정에 탐착의 성향이, 괴로운 감정에 부정(否定 paṭigh)의 성향이, 무시하는 감정에 무명의 성향이 잠재한다. 치(痴 moha)에 무명(無明)이 대응하고, 무명에 명지(明知)가 대응하며, 명지에 해탈(解脫 vimutti)이 대응하고, 해탈에 열반(涅槃 nibbāna)이 대응한다.”고 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A3:66)에는 ‘탐(貪)은 욕심의 뿌리이고, 진(瞋)은 악의의 뿌리이며, 치(痴)는 무명의 뿌리다.’고 합니다.

대상에 대한 좋은 감정으로 ‘내가 갖겠다’고 하는 탐(貪), 싫은 감정으로 ‘내가 옳다’고 하는 진(瞋), 무시하는 감정으로 ‘내가 잘났다’고 하는 치(痴)라는 자기중심적 태도가 무의식에 있으므로 붓다는 이 ‘파충류 뇌’가 일으키는 탐진치를 극복하지 않고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A3:68)에 ‘탐착은 허물이 작으나 더디게 벗어납니다. 성냄은 허물이 크나 빠르게 벗어납니다. 외면은 허물도 크고 더디게 벗어난다.’고 합니다.

 

⊖ 탐(貪)

탐(貪)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리라고 여기는 대상을 획득하려는 속셈으로 어찌해서든 대상을 끌어당김으로써 자주 함정에 빠져버리는 저팔계(猪八戒)처럼 욕심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런 감정은 탐욕 ‧ 집착 ‧ 욕심 ‧ 맹목성 ‧ 들뜸 ‧ 망상 ‧ 현혹으로 드러납니다.

좋아하는 상(相)에 그르게 마음을 일으키는 욕락의 태도가 탐(貪)입니다. 도파민이나 엔도르핀이 관련되어 발생하는 탐(貪)은 일정 거리를 두고서 관찰해보는 평정(捨 upekhā)을 갖춤으로써 없어진다고 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A6:63)에 “인간의 욕락(慾樂 kāma)은 지향하는 탐착(貪 rāga)이지 세상의 아름다운 대상이 아니다. 현명한 자는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욕(欲 chanda)을 길들인다.”고 합니다.

 

⊖ 진(瞋)

진(瞋)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리라고 여기는 대상을 내치려는 속셈으로 어찌해서든 대상을 배척함으로써 많은 적을 만들어버리는 손오공(孫悟空)처럼 적대시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런 감정은 분노 ‧ 혐오 ‧ 질투 ‧ 후회 ‧ 인색으로 드러납니다.

부정(否定 paṭigh)하고 싶은 상(相)에 그르게 마음을 일으키는 욕락의 태도가 진입니다. 노르아드레날린이 관련되어 발생하는 진(瞋)은 대상에 대한 사랑인 자애와 연민을 갖춤으로써 없어집니다.

쌍윳따니까야(S1:71)에 ‘꼭지에는 (달콤한) 꿀이 있지만, 뿌리에는 (고통을 주는) 독(毒)이 있듯이 타인을 학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마조히즘은 결국 자신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독을 준다.’고 합니다.

 

⊖ 치(痴)

치(痴)는 대상에 관여하면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으리라고 여겨서 대상을 무시하려는 속셈으로 어찌해서든 대상을 외면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주어진 기회를 놓쳐버리거나 오히려 위험에 처하는 사오정(沙悟淨)처럼 무분별한 태도를 말합니다. 이런 감정은 외면 ‧ 무지 ‧ 미혹으로 드러납니다. 무명(無明)에 고루(痼漏 āsava)가 더해져서 치(痴)라고 합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은 듯하나 귀찮은 상(相)에 그르게 마음을 일으키는 냉혹한 태도가 치(痴)입니다. 세로토닌이 관련되어 발생하는 치(痴)는 현상의 인과, 즉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알아보는 반야를 갖춤으로써 없어집니다.

사실상 치(痴) 때문에 생기는 결과인 탐진(貪瞋)의 상태를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으나 치(痴)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된 것을 접하기 어렵습니다. 치(痴)가 대상에 대해 몰두하거나 분노해야 한다는 진실을 알고도 회피하게 하므로 탐진(貪瞋)보다는 더 근원적인 고루(痼漏)입니다. 물에 빠진 이를 보면 우리는 대부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만일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을 것 같으면 달라져서 상황을 외면 ‧ 도피하기 쉬운데, 이런 행동이 바로 치(痴)입니다. 엉터리 중도(中道)를 핑계로 시류에 영합해서 몸조심하는 기회주의적 행태도 치(痴)입니다.

치(痴)는 괜히 참견했다가는 골치 아픈 일들이 벌어지리라고 예상되므로 몸조심하려고 상황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평소에는 정의로워져야 한다고 명분을 내세우거나 가끔 한 번 선행한 것으로 진짜 자신이 정의롭다고 착오합니다. 9번이나 상황에서 도피해놓고도 1번 참여를 대단한 것으로 부풀립니다.

수행인이 부모나 타자들의 언행 불일치를 보고도 (자신의 생존에 지장을 초래하므로) 눈감는다면 치(痴)입니다. 말로는 정의로워지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이런저런 명분으로 특정 행동을 취하지 않는 스승을 보고도 (사제지간에 지장을 초래할까 봐) 따지지 않는다면 치(痴)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는 예수의 말을 무시하는 목사를 (신의 일을 하는 목자에게 따지면 신이 불이익을 줄까 봐) 따른다면 치(痴)입니다. 겉으로는 신도들에게 세속에서 벗어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세속적인 것을 즐기면서도 활용할 뿐이라는 스님에게 (그래도 수행에 애쓰므로) 지적하지 않는다면 치(痴)입니다. 말로는 국민을 위해서 정치한다고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국민을 무시하는 정치인을 (힘있는 이를 건드리면 보복받을까 봐) 문제 삼지 않는다면 치(痴)입니다.

이 탐진치(貪瞋痴)에 대한 자각은 수행인에게 해당하는 덕목이지 일반인이 지키거나 실천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쁘다거나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일반인일지라도 (죽음을 각오한) 용기를 내서 자신에게서 (수행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치(痴)를 멸해버린다면 틀림없이 조만간 깨달음에 이르는 계기가 있을 것입니다. 무명의 뿌리인 치(痴)가 해결되면 명지(明知)에 돌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도 (그때는 몰랐으나) 이런 식으로 치(痴)를 해결한 덕에 다양한 명지를 얻을 기회를 맞이했다고 확신합니다. ‘오직 모를 뿐이다’는 숭산의 방법보다 용기로써 치(痴)를 해결하는 방법이 더 빠릅니다. 진실에 서서 진실을 말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 방식입니다.

바른 작심(乍心 manasikara)이 바로 정견이며, 그른 작심이 치(痴)이므로 치(痴)를 해결하면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이 펼쳐지고 지속해나가면 무명이 타파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탐진치를 제거하지 않으면 깨달음은 아득하다고 합니다. 특히나 치(痴)를 무시하면 탐진(貪瞋)의 제거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속해서 치를 해결할 기회를 놓쳐버리면 치(痴)가 들어간 치매(癡呆) 현상, 즉 살아있어도 사실상 죽어있는 치매증상이 펼쳐집니다. 알다시피 상대의 불의한 행위를 눈감으면 자신도 언젠가 그런 행위를 저지르고 맙니다.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가나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눈먼 짐승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점에서 치매에 걸린 이들은 아마도 말 못할 진실을 가슴에 품고 있거나 반복해서 진실을 외면해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신이 말이나 행동으로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회피해왔고,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즉 죽어서 무덤에 묻혀서라도 가슴속에 비밀을 간직해야 한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숫타니파타(Snp730)에서 무명이 커다란 치(痴)여서 오랫동안 윤회한다고, 즉 한마디로 치(痴)로 말미암아 무명이 쌓인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괴로운 윤회과정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용기를 내서 맞닥뜨리지 못하고 자신이 행동해야 할 진실(뭘 해야 할지는 진실에 관심을 두면 알아질 기회가 절로 온다)을 외면하고 회피한다면, 이 상태는 반복(윤회)한다고 해서 니체는 영겁회귀(永劫回歸)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110여 년 전에 벌어진 일본의 강도질이 반복되려고 하고, 한 세대 전에 판치던 독재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국가적 치매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땅의 사회적 풍토는 자기 정체성을 먼저 명확하게 드러내면 확실히 불이익을 받기 쉬운 듯 보이지만, 오히려 이런 환경이 진실을 드러내는 용기 있는 존재가 됨으로써 진일보할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고 봅니다.

만일 세상의 불의(不義)를 타파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서) 사회운동에 뛰어든다면 무명을 타파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낳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수행에서 ‘자신이 옳게 행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듯이 운동에서도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진실입니다. (수행이 그렇듯이) 단순히 자신이 할 일이라서, 세상을 위해서, 후세들을 위해서 기대 없이 자신을 던지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에서 남을 따라 하면 무명 타파가 어렵듯이 운동에서도 남을 따라 하면 불의 타파가 어려우므로 자기만의 소신으로 해야 합니다. 수행에서 팔성도를 실천할 때라야 실아(實我 atta)를 알아보듯이 운동에서도 (배후조종이나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실행할 때라야 자기 진면목을 알아보게 됩니다. (오히려 뒤에서 조종하는 이들이 실제 삶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햄릿처럼 계산하지 않아서 치(痴)를 해결한 안중근 의사 같은 분들은 상당 부분 명지 상태가 되었고(1909년 그 당시에도 자기 삶의 소명을 알았다고 함) 적어도 불환자(不還者 anāgāmī)가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붓다가 자주 언급한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으며 (태어나서) 할 일(목적)을 다 했으므로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대로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할 일인 삶의 목적은 이 세상에 들어올 때 각자 계획한 고유의 목적(이데아, ?쪽 참고)을 말합니다. 확실한 것은 정견(正見)의 경우처럼 그 목적을 실천하기로 결단했을 때에야 (길이 보이므로) 알게 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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