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무대 창덕궁 관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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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무대 창덕궁 관물헌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2.2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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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 직후 고종 대피하고, 청군 진격으로 ‘3일 천하’로 끝나

 

창덕궁에 관물헌(觀物軒)이라는 전각이 있다.

관물(觀物)은 중국 송나라 소옹(邵雍)이라는 사상가의 만물편에서 인용한 것으로 “만물을 보고 그 이치를 궁구(깊이 연구함)한다”는 뜻이다. 이 건물은 1826년 경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전후시기에 제작된 동궐도에 ‘넉넉하고 맑은 마루’라는 뜻의 “유여청헌”이라고 쓰여 있어 1830년 이전 정조임금 때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관물헌 편액 ‘집희’(緝熙) /정환선 제공

현재 편액 좌측 세로글씨는 갑자년(1864년) 원년, 그리고 오른쪽 상단의 어제(御製)라는 글씨는 임금의 글씨라는 의미다. 가운데 “집희(緝熙)”라는 말은 『시경』 「대아(大雅)편의 구절에서 온 말로 ‘인격이 계속하여 밝게 빛난다’는 뜻이다. 고종의 어릴 때 글씨로 선대왕들의 업적을 계승하여 넓히겠다는 뜻으로 받아 들여진다. 이곳은 세자가 공부하는 동궁 영역으로 효명세자의 서연(세자의 공부)장소였지만 정조임금 때는 집무실인 편전과 과거에 합격한 초계문신들의 시험을 치르기도 한 장소이자 순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관물헌은 1884년 개혁과 정변의 소용돌이 역사의 현장인 갑신정변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고종실록 21년 10월 17일(음력) 기록은 ”민영익이 우정국 낙성식에서 피습되고 김옥균 등이 일본 공사에게 원조를 청하다“라고 적고 있다.

담장 밖 불길을 신호로 시작된 갑신정변은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이 금호문을 통과해 침전에 이르러 고종 임금에게 급히 변고에 대하여 아뢰고 시급히 옮기어 변고를 피하도록 말씀드렸다.

이에 고종이 요금문을 통해 지금의 현대 계동 사옥 뒤편 순조의 생모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사당 경우궁(景祐宮)으로 거처를 급히 옮겼다. 10월18일에는 종친 이재원의 집 계동궁으로 이어(移御)했다가 청나라와 내통이 된 명성황후가 경우궁이 비좁고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창덕궁으로 이어할 것을 지속적으로 독촉하자 어쩔 수 없이 5시경 관물헌으로 들어갔다.

개화당이 창덕궁 중에서도 가장 협소한 관물헌을 이용해 소수의 병력으로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청군(淸軍) 공격을 저지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임금을 모시고 창덕궁을 작전본부로 삼았다.

이날 저녁 김옥균 주도하에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안방에 승정원을 설치하고 14개 조항의 혁신정강을 제정하고 공포한 후 서울 시내 곳곳에 게시했다.

하지만 다음날인 10월 19일 오후 4시경에 1,500여명의 청나라 병사들이 창경궁 쪽 선인문과 돈화문으로 밀고 들어왔다. 관물헌의 개화당 및 일본군 200여명의 연합군사는 전투를 치렀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오후 6시경에 고종은 후원 연경당으로 다시 옥류천 뒤 북쪽 궁장문인 건무문을 거쳐 군인들의 호위를 받아 성균관이 있는 관우의 사당인 북묘(北廟)로 향했다.

1차 방어선은 쉽게 허물어졌다. 2차방어선을 구축했던 일본군은 싸움 한번 변변히 하지 않은 채 도망치기 바빴고, 남은 것은 개화당의 50명의 병사와 몇 안되는 사관생도로 구성된 내위뿐이었다.

 

▲ 창덕궁 관물헌 /정환선 제공

 

싸울 의지를 잃은 일본군과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모두 함께 건무문 쪽으로 해서 궁을 떠났으나 홍영식등 생도 7인만이 뒤따라 북묘로 가 고종의 어의(御衣)를 끌어당기면서 가지 말라고 청했다.

하지만 고종은 홍영식을 뿌리치고 사인교에 타고 떠나버렸다. 그 자리에 남아있던 홍영식과 박영교 등 생도 7인이 청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김옥균, 서재필등 몇몇은 겨우 몸을 빼내 도주하면서 급진개혁파들이 시도했던 근대국가 건립의 희망은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많다. 첫째 군주를 위협했고, 둘째 일본군을 지나치게 믿고 의지했으며, 셋째 민심이 따르지 않았고, 넷째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 평가했다.

갑신정변은 결국 청나라의 조선 지배를 강화시켜주었을 뿐이다. 어처구니 없는 일은 조선이라는 왕국의 궁궐에서 외세인 청나라와 일본군이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10년후 청일전쟁의 시초가 된다.

격랑의 19세기 조선의 국력이 미약했을 때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던 이웃나라들의 야욕을 속수무책으로 창덕궁 궁장의 문과 관물헌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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