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본문④…大三極 合六 生七八九 ⇛ ‘一析三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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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본문④…大三極 合六 生七八九 ⇛ ‘一析三極’
  • 주우(宙宇)
  • 승인 2017.12.24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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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一析(일석) 大三極(대삼극) 合六(합륙) 生七八九(생칠팔구)의 과정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천부경은 붓다의 연기(緣起)와 상당 부분 공통분모가 있는데, 붓다의 연기가 천부경을 훨씬 더 상세하게 풀어놓았다고 볼 수 있지만, 현실 적용 부분에서는 간략한 천부경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연기를 제대로 알려고 하면 󰡔붓다의 발견󰡕을 탐구하시는 길밖에는 없을 겁니다. 그와 같은 설명을 다른 데에선 본 적이 없으니까요.

연기(paṭicca-samuppāda緣起)는 무명에서부터 생·노사까지 과정이 있는데,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맨 먼저 무명(avijjā無明)부터 식(viññāṇa識)까지의 단계가 있는데, 이는 무의식 과정입니다. 그다음 명색(nāma-rūpa名色)부터 유(bhava有)까지의 단계가, 그다음 생(jāti生)·노사(jarāmaraṇa老死)의 단계가 있는데 이 두 과정은 의식적 과정입니다.

3막으로 구성된 연극처럼 현실의 삶도 3막인 인(因, 원인)·연(緣, 과정)·과(果, 결과)로 연결되어 작동합니다. 그래서 이 3단계를 인연과로 보면 무명에서부터 식까지가 인(因)이고 1막이 됩니다. 그리고 명색부터 유까지가 연(緣)이고 2막이, 그다음에 생·노사가 과(果)이고 3막이 됩니다.

이것을 천부경과 연결지어 설명해보면 무의식 과정인 무명에서 식까지는 천부경의 一析에 해당합니다. 그다음에 의식적 과정인 명색부터 육처·촉·수·애·취·유까지는 천부경의 前三極(전삼극)인 大三極 合六에 해당하고, 그리고 생·노사는 천부경의 後三極(후삼극)인 生七八九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天1極·地2極·人3極이라는 前三極의 과정은 각자한테 은유적 상징(symbol)으로써 해법을 제시해주지만, 天7極·地8極·人9極이라는 後三極은 명백한 신호(signal)로 경고합니다. 기회 제공이라는 관점에서 상징은 야구 감독이 선수한테 주는 사인(sign)처럼 좀 느슨한 권유이지만, 신호는 교통 신호등처럼 꼭 지켜야 하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각자에게 前三極은 은유적 상징이나 사인이라는 권유로, 後三極은 명백한 신호라는 강력한 경고로 해법을 제시한다!

 

이 둘의 차이를 살펴보자면, 예를 들면 일(一), 곧 나의 존재상태에 분노가 잠재되어 있을 때, 나로 하여금 이 상태를 깨닫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前三極(天1極·地2極·人3極)의 현상, 즉 나로 하여금 열 받게 해서 성질나게 하는 일련의 현상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고, 그런데 이런 상황을 통해서 자신한테 분노가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성질을 내서 분노를 폭발할 수밖에 없는 일련의 상황, 즉 後三極(天7極·地8極·人9極)이라는 사태가 벌어지는 경우가 있듯이 다릅니다.

여기서 전자는 단순히 화나게 하는 상황이지만, 후자는 나로 하여금 성질나 있는 것을 터트려주는 사태, 즉 소위 풍선 터트리기입니다. 그래서 앞의 前三極은 나로 하여금 자각하도록 돕는 상황(象)을 제시해주고, 後三極은 거부할 수 없는 사태(事)가 벌어지게끔 하는 겁니다.

실제로 연기에서 前三極에 해당하는 ‘대상과 자신을 분리한 존재상태’인 명색(名色)부터 ‘완고해서 어떤 조언도 통하지 않는 옹고집의 상태’인 유(有)까지는 어찌해서든 되돌려서 환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後三極에 해당하는 ‘한 번 벌어지고 나면, 괴롭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태’인 생(生)의 사태가 현실에 탄생할 때는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는 환원이 불가능한 귀결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다음에 ‘合六’은 前三極인 天1極·地2極·人3極의 숫자를 合(합)쳐서(1+2+3=6) ‘六’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大三極함으로써 ‘三極’의 의도를 살리지 못한 주인공 때문에, 이 前三極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天1極·地2極·人3極의 소속 팀원들이 대다수 그대로 6極이 되어서, 주인공이 완강하게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실패한 전 프로젝트를 거울로 삼아 새로운 프로젝트인 後三極을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중대시하는 ‘외부(타자)의 변화’를 도모하다 보니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고 외부에만 중심을 둠으로써 어떤 현상이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자기 합리화’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의도대로 세상사가 흘러가는 듯이 보이기도 함으로써) 자기를 과신하게 되어버린 상태가 바로 六입니다. 前三極을 자신이 변화해서 성장할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므로 六으로 더해져(심해져) 버린 것입니다. 사실상 심각해진 이 ‘六’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붓다의 연기를 이해하는 게 도움됩니다.

 

# 合, 즉 ‘더하다’의 사전적 의미

‘더 늘리거나 많게 또 크게 하다.’ ‘본디보다 심해지다.’라는 뜻으로 이것을 조합하면 ‘더 많아져서 심해진다’가 됩니다. 合은 더하다 이외에 ‘만나다’는 뜻이 있으므로 合六은 1·2·3이 만나 합(더)해지고 심(더)해져서 6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六은 연기에서 유(bhava有)의 완고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은유적 상징으로 해법을 제시해주는 前三極의 현상을 통해서 외부에서 아무리 조언해도 자신만의 방식이 옳다고 확신하는 고집불통의 상태를 말합니다.

‘六’이 천부경 81자 중 정중앙에 놓여 있고, 글자의 생김이 사람의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일부 사람들이 이 ‘六’이 천부경의 중심 단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천부경에서 ‘六’은 사실상 수행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옹고집 상태임을 일러주는 단어입니다. ‘六’은 수행의 길로 가지 못하게 가로막고서 계속 반복되는 현상을 만드는 근원인 셈입니다. ‘六’은 우리가 이런 점을 깨달아서 마음에 잘 담아두라는 부정적인 의미이지 절대로 긍정적인 의미가 아님을 알아두었으면 합니다.

다음 四成(사성)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으나 이 ‘六’은 四를 완성해나간 곰과는 달리 백수의 왕이라는 짐승으로 사는 호랑이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666’을 짐승의 표라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 ‘六’은 짐승처럼 생존하려고 돈을 목적으로 삼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져버린 이들을 지칭하고, 반면에 ‘四’는 사람(四覽)이 되어 사(四)랑 함께합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六으로 구성된 것들을 찾아보면 육각수라고 해서 물이 있고, 벌집도 육각형으로 지어지고, 탄소 구조도 육각형으로 되어 있듯이 ‘六’의 모습은 안정된 상태, 고정된 상태, 고착된 상태이고 자기만의 견해를 고수하는 상태입니다. 이처럼 더는 외부의 피드백이 들어가지 않으므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독선적 상태이기 때문에 ‘六’ 다음에는 七八九라는 새로운 後三極의 무대로 넘어가서 돌이킬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사태가 현실에 벌어지고 맙니다.

 

오! 六의 환상도 무너지는군요. 저도 한때 물은 답을 알고 있다며 육각수에 휘둘렸던 기억이 나네요. 육각형 결정체인 눈, 6일간의 천지창조 등 6의 신화가 여전하네요. 이처럼 긍정적인 면으로 가장하는 6의 정체는 안정을 부추기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다음 ‘生七八九’는 ‘六’을 넘어서 벌어지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生(생)했음을 말합니다. 前三極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天1極·地2極·人3極의 팀원들에 새로운 ‘七八九’의 팀원이 보강되어 後三極을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연기에서 자티(生 jāti)라고 하는 ‘生’은 어쩌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六’에서 ‘七’이 生하면 어쩌지 못하는 우연한 사건(accident)이 벌어지게 되고, 七八九라는 後三極에서도 깨닫지 못하면 다음에 또 다른 前三極이 발생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이번에는 수리(數理)로 설명해보겠습니다. 그러면 현실 삶이 작동되는 전체적인 구조에 접근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먼저 누구든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의식하든 무의식에서든 자신의 정체성을 정하게 됩니다. 자신이 특정 정체성을 적극 정하지 않더라도, 즉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미선택’도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의식해서 선택하는 때도 이를테면 ‘나는 돈이 필요해’라고 자신의 정체성인 ‘I’(ahaṁ)를 정한다고 해도 자신의 실제 존재상태인 실상은 ‘돈이 필요하다’=‘나는 돈이 없다’이므로 ‘쓸 돈이 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점차 돈이 부족해지는 현실을 만들어내고 맙니다.

‘나는 돈이 필요하다’고 정한 ‘나’(ahaṁ)와는 달리 ‘나는 돈이 없다’고 정해버린 존재됨됨이(beingness)가 실제로 현실에서 작동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타인과 풍요를 나누지 못했고 수단이 되어야 할 돈이 목적이 되어버리고만 이런 실상이, 즉 자신의 존재상태인 一이 ‘三極’인 天1極·地2極·人3極이라는 일련의 현실을 만들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一’이라는 각자의 존재됨됨이가 먼저 ‘天1’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에 대응해서 (이를테면 낮과 밤, 남성과 여성이 대응되듯이) 상대적 ‘地2’가 생기고, 그다음에는 이 둘의 활동에 의한 부산물인 ‘人3’, 즉 인간계의 현상으로 드러납니다.

쉽게 설명해보면,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서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자녀를 낳아 가정을 구성하듯이 나의 존재상태와 관련된 어떤 프로젝트가 천계(天界)에서 먼저 벌어지고, 그다음 지계(地界)에서 벌어지며, 그 후에 인계(人界)에서 특정 현상으로 펼쳐진다는 겁니다. 1과 2 상태에서는 감지되기 어렵고 3으로 드러났을 때에야 알아보기 쉽습니다. 이처럼 인계에 드러나는 특정 현상을 人3極이라고 하며, 타자(他者)라고 합니다.

이 三極이 펼쳐졌을 때 運用(운용)하면 즉, 運三極하면 四成이 되는데, 만일 大三極하면 삶이 다른 차원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天1極 地2極 人3極이 합쳐진 六極이 되어버립니다. 이 六極은 집을 지을 때 쓰는 빈 거푸집과 같은 현실 구조입니다. 순리대로 알곡인 ‘四’로 가지 못하고, 前三極에 대한 탐진치(貪탐하기, 瞋싫어하기, 痴외면하기)라는 손쉬운 길을 선택함으로써 1·2·3에서 4를 건너뛰어 ‘六’으로 가게 되고, 여기서도 정신 차리지 못하면 외부에 七八九라는 특정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六’은 중심이 없어서 공허하므로 天7極이 진행되는 동안 현실에서는 그 자리에 외부를 중시하는 자아 형성이 중요해집니다. 이를테면 될 수 있으면 힘 있고 화려하며 영향력이 있는 정체성을 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외부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고 외부에 영향을 끼치고 외부보다 우월해지려고 실상 경쟁하려는 ‘七’의 욕심이 시작됩니다. 그다음 그 욕심을 ‘八’에서 외부로 발산하기 시작하지만, 주인공의 꼬락서니를 자각하게 하려는 地8極의 의도에 들어맞지 않으므로 결국 ‘九’에서는 그 귀결로서 뭔가 뜻대로 되지 않는 특정 사건이 우연을 가장해서 벌어지게 함으로써 人9極의 의도가 성취됩니다. 그래도 인생에 다른 길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 다시 天1極으로 계속 반복됩니다.

이처럼 ‘九’에서도 깨닫지 못하면 다시 ‘一’로 넘어가긴 하는데 조금 변형된 ‘一′’로 넘어갈 뿐입니다. 남보다 우월해지려고 경쟁하는 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실패하는 귀결을 맞이함에도 깨닫지 못하고 다시 반복하게 되지요. 三極이라는 현상이 ‘자기 책임’임을 깨달아 반야를 터득할 때까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과 윤회가 지속한다고 하는데, 이를 니체는 영겁회귀(永劫回歸)라고 했습니다.

그 변형된 一′가 또 天1을, 地2를, 人3을 만들게 되겠지요. 여기서 전처럼 외부현상에 좌우되어 大三極하면 合(합)해져서 ‘六’이 되고, 그다음 七八九가 生(생)겨나는데, 이 ‘九’에서도 깨닫지 못해서 다시 시작하는 그런 존재상태를 또다시 변형된 ‘一′′’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계속 반복되는(無盡) 인생의 교훈(本)을 바로 無盡本(무진본)이라고 합니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본다면,

 

 

정리해 본다면 ‘一’, 즉 자신의 존재됨됨이에 따라 펼쳐진 天1極·地2極·人3極이라는 前三極이 자신의 책임임을 자각하지 않아서, 그 三極을 중대시(大)함으로써 더해져서(合) 완고해지고(六) 결국 어찌하지 못하는 우연한 사건(七八九)이 발생(生)하는데, 이런 것이 바로 一析三極(일석삼극)입니다.

이런 식으로 악화한 결과를 체험하는 데도 깨닫기를 거부하면 또 다른 一′로 회귀하면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각자에게 담마를 제공하는데, 이런 것이 바로 無盡本(무진본)입니다.

 

다음은 大三極의 주요 원인인 탐진치(貪탐하기, 瞋싫어하기, 痴외면하기)에 관련해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탐하지 않기, 싫어하지 않기처럼 행위를 그만두는 것은 손쉬운 듯하나 치(痴)의 외면하지 않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특정 행동을 해야 함을 일러주는 내면의 양심을 외면하지 않기란 냉혹한 정직이 요구되므로 상당한 도전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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