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주의 세상보기] 너의 따뜻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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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주의 세상보기] 너의 따뜻한 손 
  • 나은주 글쓰기 선생님
  • 승인 2022.12.20 15:5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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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주 글쓰기 선생님.
나은주 글쓰기 선생님.

[나은주 글쓰기 선생님]  '나는 크리스마스가 싫다. 집집마다 밝은 불이 켜지면 내 마음은 더 어두워진다. 다른 집의 웃음소리가 커지면 내 마음엔 눈물이 고인다. 세상에 무슨 무슨 날들이 없어지면 안 되나…….’ 

아이의 글을 나는 더 읽을 수 없었다.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4학년 수빈이. 그 아이의 엄마는 작년 겨울에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 없는 겨울이 수빈이에겐 그토록 춥고 쓸쓸하게 느껴졌구나. 다른 집의 불이 켜질 때마다 마음이 어두워지고 웃음소리 커질 때마다 눈물이 고일 만큼. 

수빈이는 단 한 번도 수업 시간에 늦은 적이 없는 성실한 아이였다. 무엇보다 책 읽고 토론하고 글 쓰는 것을 즐거워했다. 자기 마음을 글로 표현하고 그것을 다시 읽는 것도 재밌다고 했다. 그런 수빈이와 수업을 하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의 엄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이런 부탁 죄송한데요, 우리 수빈이 사회를 좀 지도해 주시면 안 될까요? 수빈이가 사회를 어려워하는데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봐줄 수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선생님을 잘 따르니 선생님께서 일주일에 한 번씩만이라도 가르쳐 주시면 열심히 할 것 같아서요.” 

처음에는 기분이 안 좋았다. 논술 선생님에게 사회를 지도해 달라니, 사교육 선생님이라고 가볍게 봐서 그러는 거 아냐?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하게도 아이의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오죽했으면 병원에서 전화를 하셨을까. 게다가 목소리에 너무 힘이 없었다. 잘 드시고 푹 쉬시면 금방 나으실 거라고, 고민해 보겠다고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늘 마음이 약해서 크고 작은 걱정을 달고 사는 내가 싫다 하면서도 또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수빈이가 어려워하는 개념 설명해 주고 과제 내준 다음 점검해 주는 정도로만 하자.

잠깐 짬 내서 봐주는 정도로만 하면 별로 시간을 빼앗기진 않겠지. 그리고도 어려워하면 과외 선생님 구하라고 하지 뭐. 이렇게 대답할 내용을 정리하고 며칠 뒤 수빈이 엄마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낮게 가라앉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빈이 아빱니다. 수빈이 엄마가 어제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수빈이는 장례식 때문에 이번주 수업 빠져야겠습니다.” 

돌아가시다니, 엊그제 전화 통화를 했는데……. 어떻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차라리 그러겠다고 얼른 대답을 해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 겨우 마흔밖에 안 된 젊은 엄마가 아이를 두고 눈을 감을 때 얼마나 애절했을까 하는 안타까움, 열 살의 여리디여린 아이가 엄마를 잃고 맞닥뜨렸을 생경함과 서러움, 절망감이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들이 뒤엉켜 내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이가 오는 날, 나는 수빈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몹시 고민스러웠다. 아이는 어떤 표정으로 들어올까? 울면서 오진 않을까? 뭐라고 위로하지? 나는 아이가 올 때까지 가만히 있질 못하고 계속 서성였다.  

“선생님.” 

작은 아이가 가방을 메고 들어왔다.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 얼굴로.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아이를 나는 가만히 안아 주었다. 그리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힘들었지, 수빈아? 고생 많았다.” 

꼬옥 안아 주며 나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이가 안쓰러워 눈물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아이는 품에 안긴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곧 다른 아이들이 들어왔고, 독서교실 안은 재잘거리는 아이들 목소리로 가득 찼다.

다른 아이들은 수빈이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모르므로 여전히 장난을 치고 까르르거렸다. 아니,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엄마의 죽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이이기 때문에 ‘그래? 어쩌냐?’하고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동화책 속의 어떤 장면 정도로 생각하겠지. 다행히 수업 시간 동안 수빈이는 묻는 말에 대답도 하고 다른 아이들 말에 웃기도 했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간혹 낯빛이 어두워지긴 했지만 글쓰기까지 잘 마무리했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 나갔다. 가방을 챙기고 맨 뒤로 나가는 수빈이를 따라가며 나는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수빈아, 밥 꼬박꼬박 잘 먹어라. 잠도 잘 자고.” 

아이는 “네에.” 대답하고 꾸벅 인사하며 집으로 갔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어느새 일 년이 지났다. 수빈이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조금 더 차분하고 생각이 깊어 보일 뿐 크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그 사이 수빈이의 아빠는 따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수빈이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산다고 했다. 아마도 젊은 사위의 앞날을 생각해서 장인 · 장모님이 사위의 등을 떠민 것 같았다. 하지만 아빠와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수빈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린이날이나 여름 방학 같은 때 아빠를 만나러 간다고 좋아하던 수빈이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그것도 일 년에 몇 번뿐이지 않은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나눌 때 아이들은 아주 신이나 있었다. 가족끼리 제주도로 여행을 갈 거예요, 제가 원하는 선물을 사주신다고 했어요, 친척들이 온다고 해서 엄마가 파티를 열 거라고 했어요……. 아이들 목소리가 커질수록 수빈이의 표정은 어두워져 갔다. 그리고 그런 글을 남기고 갔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야 아버지의 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나의 삶에 얼마나 깊이 스며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보고 싶어도 더 이상 볼 수 없는 그리움이 어떤 건지를 아프게 알아가고 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다고 해서 나의 삶이 무너지거나 휘어지거나 할 일은 없다. 내가 세상에 발 딛고 튼튼히 설 때까지 등 받치고 계셔 주셨으니까.  

그런데 이제 겨우 열한 살 된 수빈이에게 엄마가 없는 세상, 아빠와 떨어져 사는 세상, 두 분의 운신이 걱정되는 늙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세상은 얼마나 겁이 날까. 그리고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울까. 

깜깜한 밤이 돼서야 독서교실 문을 나섰다. 잔설이 얼어붙어 길은 미끄럽고 얼굴이 따가웠다. 울컥 보고 싶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모두 잘 있는지, 이 겨울에 힘든 일은 없는지……. 그래도 보고 싶으면 만날 수 있는 이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싶었다. 

본문 중 '아이들 장갑이 예쁘고 따뜻해 보였다'. 사진=나은주 글쓰기 선생님
본문 중 '아이들 장갑이 예쁘고 따뜻해 보였다'. 사진=나은주 글쓰기 선생님

조금 걸어가는데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이는 잡화점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보통 땐 저녁 8시면 문을 닫는데 오늘은 물건 들여와 진열하느라 늦었다며 주인아주머니가 웃으신다. 가게 물건을 휘이 둘러보았다. 아이들 장갑이 예쁘고 따뜻해 보였다. 

“오늘 가져온 거예요. 그 장갑 받는 사람은 행복하겠네.” 

아주머니가 도톰한 분홍색 장갑을 담아 주셨다. 다시 가게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아까처럼 춥게 느껴지진 않았다.  

누구에게나 한겨울 추위처럼 힘든 시절이 있다. 세상에 나 혼자만 서 있는 것 같은 막막한 외로움으로 견디기 힘들 때도 많다. 그럴 때 누군가 말 걸어주고 손 내밀어 주는 것은 봄 햇살만큼이나 따사로운 일 아닌가. 세상은 누군가가 있어 행복하고 누군가가 없어 불행할 수 있으니…….  내가 있어서 누군가 조금이라도 행복하다면 내가 살아갈 충분한 의미가 되리라.  

장갑을 낀 수빈이 손을 떠올리니 내 손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수빈이 마음에도 밝은 불이 켜지면 좋겠다. 

나은주 글쓰기 선생님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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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뻐스 2022-12-20 19:15:13
작가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는 아이들은 선생님의 따뜻한 심성을 전수받아 세월이 오래 지난 후에도 선생님을 추억할듯하네요~

호호 2022-12-20 18:30:34
웃음도, 울음도 나오지 않는 먹먹한글이네요..
아이와 선생님께 따뜻한 겨울이되시길..

연혜 2022-12-20 17:08:25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마음이 많이 움츠려드는 날.
아이의 아픈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아리네요.
그래도 아픔을 딛고
남겨진 가족들과
친구들과
친절한 샘덕분에
씩씩하게 살아가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