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출항지 오화리산성②…주변의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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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출항지 오화리산성②…주변의 요새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2.19 14: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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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격전지 두타산성과 또다른 수군 거점인 삼척포진 등 방어시설들

 

삼척은 태백산맥의 동쪽 사면 해안에 위치해 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태백산맥은 절벽과 같은 험준한 산지를 형성하고, 해안지역은 급경사와 절벽, 암초가 많이 분포한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준한 지형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오십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동해안에서 가장 큰 포구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삼척지역은 해상 교통과 육상 교통의 거점으로 활용도가 높았다. (지금도 동해경비사령부, 해군 제1함대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다.)

오화리산성은 수군의 거점이었다. 하지만 삼척은 경상도에서 함경도에 이르는 동해안 육상로의 중간에 있다는 지리적 위치에다 오십천 하류 평지에 주거가 밀집해 있다는 점에서 역참을 중심으로 한 거점 성들이 많이 축조되었다. 성들의 흔적은 많이 사라졌지만, 사료에 그 면면이 드러난다.

 

① 삼척읍성(三陟邑城)

삼척 시내에 성내동(城內洞)이라는 지명이 있다. 성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곳이 옛날 읍성이 있었던 곳이다.

읍성은 삼척 시내 중심가를 둘러싼 구릉지를 자연지형을 하면서 곡선으로 쌓은 성이다. 오십천 가에 위치해 서쪽 절벽 위에는 관동8경의 제1경인 죽서루(竹西樓)가 있고, 남쪽은 평지, 북과 동쪽은 얕은 구릉지다.

읍성 축성에 대한 기록(읍지류)에 따르면 고려 정종 2년(947년)에 쌓았다고 하지만 구체적이지 못하고, 고려 우왕 12년(1386년)에 둘레 1,470척(445m), 높이 4척(1.2m) 규모로 토성이 축조되었으며 서쪽 절벽으로 431척(131m)였다고 한다.

조선 성종 20년(1489년)에 증축하고 중종 5년(1540년)에 석성으로 고쳐 쌓았는데 3면의 길이가 2,504척(622m)이고 서쪽 죽서루 절벽 지역의 431척(131m)은 자연을 이용했다고 한다. 중종 10년(1515년)에 개수했고, 명종 10년(1555년)에 민가 20여호를 철거시켜 우물을 팠고, 선조 25년(1592년)에 회(灰)를 첨가해 개축했다고 전한다.

 

▲ 삼척시 성내동 /네이버지도

 

②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

정라진(정상동) 육향산 일대의 수군 진영이다. 삼척포성, 삼척포진, 삼척포진성이라고 불리웠다.

육향산을 남쪽으로 해서 북쪽에 자리 잡았다. 이 성은 영동지역 9곳의 수군을 관장하던 곳인데, 원래는 오십천 남단의 오화리산성에 위치하던 것을 조선 중종 15년(1520년)에 옮겨왔다.

석출으로 둘레 900척(270m), 높이 8척(2.4m)으로 쌓았다.

동해안의 안임포, 고성포, 울진호, 월성포까지 장악하던 수군기지였다. 현재는 정라항이 개발되고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터만 알뿐이다.

 

▲ ‘조선지도’ 삼척지역

 

③ 갈야산(葛夜山) 고성

갈야산성은 삼척시내 주산인 성북동 갈야산에 위치한다. 증보문헌비고, 여지도서, 대동지지등의 옛문헌에 산성이 언급되는데, “삼척 북쪽 2리 갈야산에 고성이 있다. 성 안에는 실직국 시대에 임금이 마시던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다른 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부내면(府內面) 당저리 갈야산 동사면에 점한 토루로, 주위 약 300간이 붕괴되었다. 신라시대 실직왕이 쌓은 것이라 칭한다. 읍지에는 ‘성내에는 어정(御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실직국 실직씨의 터다’고 했다.”라고 쓰여 있다.

고려 고종 42년(1225년) 몽골이 침략해 왔을 때 산성이 견고하지 않다는 이유로 옮기고자 했지만 읍민들이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척주지에는 “언제 축조되었는지 알길이 없고 현재 실직군왕이 묘 동쪽에 한줄기 성의 흔적이 보일 뿐이다”고 했다.

1995년 3월, 삼척시가 갈야산 정상부 일대에 상수도 배수지 확장공사를 시행하다가 북동쪽 능선에 축조된 토성 줄기 3곳이 절단되면서 토성 단면과 하단부의 고분유구가 노출되었다. 또 그 주변에 기와와 토기 조각이 많이 드러나 긴급 수숩조사가 실시된 적이 있다. 또 토축부 아래에서 6~7세기경 신라고분이 조성된 사실, 그 주분에 명문 기와 조각이 출토되기도 했다. 근처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三陟郡戊子年貢□’이라는 글자가 나와 삼척지역이 행정개편으로 명주의 속군으로 편성된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지금까지 시대미상으로 알려져온 이 토성은 문헌 자료와 출토유물등을 통해 볼 때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성은 남동쪽과 북동쪽의 능선을 이용해 포곡형 토성으로, 전체 길이는 400m, 높이 120~200m, 상부폭 3,5m, 기저부폭 5m로 파악되고 있다.

 

▲ 두타산성 흔적 /김억연 제공

 

④ 두타산성(頭陀山城)

행정구역으로는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산성이다. 행정구역 변경 이전에 삼화동은 삼척군 북평읍에 속했던 만큼 삼척의 외곽 산성으로 보아야 한다.

현재 두타산 중턱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다. 신라 파사왕 23년(102년)에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구체적이지 못하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삼척부사 김맹윤이 높이 1.5m, 둘레 2.5km의 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왕의 뜻을 거스른 죄로 파직되어 이 곳에 은거하면서 스스로를 동안거사(動安居士)·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라 부르며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했다고 한다.

성은 부분적으로는 자연지세를 그대로 활용했고, 부분적으로는 석축하였기 때문에, 성을 한 바퀴 도는 데 약 며칠이 걸리는 비교적 큰 성이다. 석재는 산돌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약간 다듬어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벽이 그리 견고하지는 않으나 천연의 요새지이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함경도 안변에서 남쪽으로 후퇴하는 왜병의 주력부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3일간의 혈전을 치렀다.

왜군이 이곳에 쳐들어 오자 백성들은 이 산성으로 피난했다. 아군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남북 15리 절벽에 도열시켜 적에게 위세를 보이자, 왜군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백복령 방면으로 퇴각했다. 빨래 하던 노파가 이 산성의 사정을 이방의 계략대로 알려주었더니 왜군은 이기령을 넘어 우회 침공했다. 그러나 그 제보는 계략에 의한 것이고, 왜군들은 성내에서 전멸했다고 한다. 주변에는 ‘피수구비’·‘바굴다리’·‘대구리’ 등 동네 이름과 다리 이름에 격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⑤기타

 

<옥원성(沃原城)>

삼척시 원덕읍 옥원리에 위치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 따르면 “옥원성은 옥원역 부근에 있으며 토성으로 길이 507척(152m), 높이 8척(2.4m)이며, 군창(軍倉)이 있다”고 했다.

‘척주지’에는 조선 태조 2년(1393년)에 둘레 523척(158m)의 토성을 쌓았으며, 성밖에는 옥원역이 있고, 서쪽 5리에 금정암(金井庵)이 있었지만, 폐지되었다고 전한다.

이 정도면 상당히 구체적인데 지금은 성터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 있고,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되었다. 남쪽 가장자리 근처에 축대의 흔적이 남아있고, 주변에서 기와와 백자 조각이 흐트러져 있다.

 

<죽령현성(竹嶺顯城)>

삼척시 원덕읍 호산리 앞 죽현에 있었으며, 지금도 고성 흔적이 남아있다고 전한다.

 

<광태리(光泰里) 고성>

삼척시 근덕면 광태리 신평(新坪)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남고성이라고도 불린다. 축주지, 삼척군지, 진주지등에 의하면 삼척군의 남쪽 25리 교가역 서쪽 신평 마을에 고성이 있지만, 폐지되었다고 한다.

 

<맹방(孟芳) 고성>

삼척시 근덕면 하맹방리에 소재했다. 하맹방리 서쪽 지성산에 토성으로 쌓았으며, 둘레 18町(1,964m)에 달했다고 한다.

 

<월계촌(月桂村) 고성>

삼척시내 당저동 월계촌에 있었다.고 한다. 토성이며, 실직씨의 유지라고 하는데 확실치 않다. 1955년에 발간된 삼척향토지에 따르면 당시에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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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민 2017-12-19 17:08:56
많이도 걸으셨네. 정라항은 내가 모르는 곳도 많이 기록되었네요. 반가와요. 정운형님의 친형께서 역사지를 많이 연구해 두셨더군요. 당저 월계 성내 모두 오래된 말들이었는데 새록새록 새롭습니다. 고생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