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균의 역사여행⑩…신상필벌 사례-상앙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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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봉균의 역사여행⑩…신상필벌 사례-상앙의 개혁
  • 손봉균
  • 승인 2017.12.1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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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신상필벌 제도를 만들고 이를 철저히 시행함으로써 진나라를 단기간에 중국 전국시대의 7웅 중에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던 상앙의 개혁에 관하여 설명하겠다>

 

▲ 손봉균씨

 

중국 전국시대, 기원전 360년 경, 진 효공(秦孝公, 기원전 361〜338년), 위 혜왕 시대.

전국시대의 이 시기까지는 진(秦)나라는 국력이 약하여, 중원의 제후들로부터 서북 벽지에 있는 오랑캐의 나라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 때 개명군주로 나타난 것이 진 효공이었다.

진효공은 춘추시대에 진(秦)나라를 강국으로 만든 진 목공(秦穆公)의 업적을 목표로 삼고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먼저 훌륭한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기묘한 계략으로 진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자에게 높은 관직과 영지를 준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진효공이 인재를 구한다는 소문을 들은 위앙(후에 상앙(商鞅)이 됨, 지금부터 상앙으로 호칭을 통일하겠음)은 참신한 기풍을 잃어버린 위나라에서 진나라로 갔다. 진나라로 간 상앙은 진효공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경감을 찾아가서 효공을 만나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첫 번째 효공을 알현한 상앙은 요‧순과 같은 제왕의 길을 설파했지만 진 효공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애기도 길었기 가끔 졸면서 애기를 들었다. 그리고 끝나고 나서 추천한 경감을 불러 꾸짖었다.

두 번째 효공을 알현한 상앙은 이번에는 하나라 우왕, 은나라 탕왕, 주나라 무왕 등의 통치를 설명하며, 왕으로서의 길을 설파했지만 효공의 동감을 얻지는 못하였다. 효공은 경감을 꾸짖었고 경감은 상앙을 책했다. 효공은 "제왕의 길과 왕으로서의 길은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다. 당대에서 이름을 천하에 떨쳐야만 명군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 번째 효공을 알현한 상앙은 패자의 길을 설명하였다. 효공은 이번에는 상앙의 얘기가 마음에 들어서 열심히 듣는 데 상앙이 이야기를 중단하고 ‘3일 뒤에 다시 와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겠다’고 하였다. 진효공이 ‘이야기를 다 듣고자 바라는 데 어째서 갑자기 물러가려 하느냐?’고 물으니, 상앙은 ‘바라건대 상감께서는 3일 동안 깊이 생각하시고 패자의 길을 갈 것인지를 가부간에 결정을 내리십시오. 그런 연후에 신이 모든 것을 아뢰겠습니다.’ 하고는 물러났다. 이야기를 빨리 듣고 싶은 효공이 다음날 사람을 보내어 들어오라고 하나 상앙은 거절하고 3일 후에 들어가겠다고 하였다. 경감이 ‘상감께서 친히 부르시는 데 그러지 말고 그대는 궁에 들어가 보라’고 권했다. 상앙이 말한다. ’내가 상감과 처음으로 약속을 했는데 스스로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다음 날에 상감이 뭣으로써 나를 믿겠소?‘ 하면서 들어가지 않았다.

네 번째 상앙을 만난 효공은 상앙에게 간절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상앙은 진나라 국정을 개혁하고 쇄신해야 할 일을 자세히 아룄다. 이리하여 서로의 문답은 3일3야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진효공은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 상앙(商鞅) 상 /위키피디아(중국판)

 

마침내 진효공은 상앙을 좌서장으로 삼고, 모든 신하에게 분부한다. “앞으로 우리나라 모든 정사는 좌서장의 명령대로 시행한다. 만약 법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무조건 역적으로 취급하겠다”

좌서장이 된 상앙은 진나라 개혁을 위하여 필요한 법령을 새로이 만들고, 개혁정책을 입안하여 진효공의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상앙은 즉시 그 법령을 선포하기 않았다. 만일 백성들이 믿어 주지 않으면 암만 새로운 법령을 선포한댔자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새로운 법령은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못하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불편하게 느끼고,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할 만한 내용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앙은 등용되기 전부터 주장하였다.

“정치도 단호한 개혁을 해야만 새로운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우선 당장 편안할 도리만 바랄 뿐이지 백년 후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패업을 성취하려면 백성들에게 개혁의 내용을 미리 물어보고 할 수가 없습니다. 개혁의 성과를 아는 사람이 이를 정하고, 백성들이 따르도록 엄격히 다루어야 합니다. 백성들은 그 효과만 나중에 누릴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상앙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상앙은 도읍의 남문에다 3장 길이의 나무를 세우고, 그 나무 곁에 백성들에게 알리는 게시문을 붙였다. ‘누구든지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세우는 자가 있으면 10금의 상을 주겠다’

이 게시문을 본 사람들은 많았으나, 간단한 일에 너무 많은 돈을 준다고 하니 의심을 하여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에는 진나라가 이전에는 백성들에게 상을 준다고 하고는 주지 않은 일이 많아서, 백성들이 나라의 약속을 믿지 않은 점도 많이 작용했다.

상앙이 다시 분부하였다. “그 나무를 옮기는 백성이 없으니 상금이 너무 적은가 보다. 50금의 상금을 주겠다고 다시 써 붙여라‘

그러나 백성들은 더욱 의심을 품었다. 그러다가 백성들 중에 한 사람이 나서며 말한다. “우리 진나라는 자고로 많은 상금을 주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현상금을 내걸었으니 반드시 무슨 내막이 있는 모양이다. 비록 50금이야 안 줄지라도 그렇다고 전혀 안 주지는 않겠지!”하고는 나무를 뽑아 어깨에 메고는 북문에 가서 세웠다.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었다.

관리가 그 백성을 데리고 상앙에게 가서 이 사실을 보고했다.

상앙이 그 백성을 크게 칭찬한다. “너는 참으로 훌륭한 백성이다. 이 50금을 받아라. 나는 앞으로도 백성들에게 신용을 지킬 것이다”

그 백성이 50금을 받았다는 소문은 그날로 도읍 안에 퍼졌다. 백성들이 서로 말한다. “좌서장은 명령만 내리면 꼭 실행하는 어른이구나”

 

▲ 상앙이 나무막대기를 옮기는 사람에게 상금을 준다고 하자 진나라 백성들이 머뭇거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그 이튿날 상앙은 마침내 새 법령을 선포했다. 공포된 주요한 법령은 다음과 같다.

- 도읍을 새로 정하는 건(옹주성에서 함양으로 옮기는 건)

- 토지개간의 건

- 경제개발과 산업진흥의 건

- 전쟁에 관한 건

- 부정에 관한 건

- 법령엄수에 관한 건

 

상앙이 선포한 법령에는 각개의 건마다 상과 벌을 주는 기준을 엄격히 정하였다

토지개발은 오로지 국민들이 맡아서 한다. 밭이 이루어지면 세법에 의하여 토지의 면적에 따라 곡식을 징수한다. 만일 땅의 면적을 속이거나 세금을 속이는 자가 있으면 국가가 그 토지를 몰수한다.

경제개발과 산업진흥의 건에서는 백성은 오로지 생산증가에 힘써야 한다. 열심히 일해서 많은 곡식을 소출하고 많은 베를 짠 백성만이 훌륭한 백성이다. 그런 훌륭한 집은 국가의 부역을 면할 수 있다. 그 대신 게으르고 가난한 자는 관가의 종놈과 종년으로 삼는다.

 

전쟁에 관한 건에서는 국가의 모든 벼슬은 전쟁에서 세운 그 공로에 따라서 준다. 적의 목을 하나씩 참할 때마다 1계급씩 승진한다. 공로가 많은 자는 자연히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다. 공로가 많은 자는 그 벼슬에 따라 수레와 복장을 사치하게 차려도 금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로가 없을 경우에는 그 자가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법에 의해서 삼베옷을 입어야 하고 소를 타야 한다. 또 임금과 친척간이라도 임금과 촌수로서 따지지 않는다. 만일 싸움에 나가서 공로가 없을 경우엔 모든 칭호를 박탈하고 백성으로 몰아낸다. 무릇 개인적인 감정으로 싸우는 자가 있으면 그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둘 다 참형에 처한다.

 

부정에 관한 건에서는 열 집씩 서로 감시하도록 하고 만일 한 집이라도 부정이 있을 경우에는 즉각 관가에 그 부정을 고발해야 한다. 만일 고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열 집이 다 부정법에 걸린다. 부정법에 걸리면 그 자의 허리를 참한다. 이웃집의 부정을 맨 먼저 고발한 자에겐 적군의 목을 하나 참한 것과 같이 1계급씩 벼슬을 올려준다.

이 법령이 공포되는 날부터 남녀노소, 상하귀천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다 법령을 준수해야 한다. 만일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리라.

 

상앙은 이 법령시행 후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백성뿐만 아니라, 이를 어긴 왕족, 대부 등 높은 사람에 대해서도 예외를 두지 않고 엄격히 처벌하여 필벌(必罰)을 명확히 한다.

법령이 공포되자 백성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다. 상앙은 법령에 대해서 비판하는 자를 모두 잡아들여 변경지대의 군졸로 보냈다. 그 후 대부벼슬에 있는 감룡과 두지가 새 법령에 대해서 비판하다가 발각되었다. 그들은 그날로 벼슬을 빼앗기고 백성으로 몰려나갔다.

도읍을 함양으로 옮기는 것에 대하여 태자가 따르지 않고 함양으로 가지 않겠다고 불평을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상앙이 대로한다. “태자가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법을 시행할 수 있으리요. 비록 태자는 임금 자리를 계승할 분이지만 그냥 둘 수 없다. 즉 태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고 하면서 진 효공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태자의 이번 죄는 그 스승들이 태자를 잘 못 지도했기 때문이다. 태자의 스승인 공자 건(진효공의 형)을 잡아서 그 코를 베어버리고, 태자의 교관인 공손 가의 얼굴을 먹으로 떠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태자를 대신하여 공자 건은 코를 잃었고, 공손 가는 얼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먹물 자문을 당했다.

태자의 불평에 대한 처벌은 그 효과가 컸다. 그 후로 아무도 법령을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앙은 추호라도 법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모두 위수로 압송하여 처벌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법령을 잘 지키는 백성에 대한 보상도 확실히 했다.

전쟁에 나가서 적군의 목을 하나 참하면 일 계급 씩 반드시 승진을 시켰다. 백성들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을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진나라에서는 전쟁이 있다고 하면 서로 자원해서 전쟁에 나갈 려고 하였고, 전쟁에 나가서는 열심히 싸웠다. 그 결과 진나라는 천하제일의 강한 군대를 갖게 되었다.

상앙이 개혁을 하기 전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은 전쟁에 서로 나가지 않을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적을 많이 죽이고 공을 세워도 그 보상은 높은 사람한테만 돌아가고 백성들에게는 보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와 같이 각 개혁법령에서 공포한 대로 법을 잘 지키는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주어졌다.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법을 잘 지키면 상을 받고, 법을 어길 경우에는 엄한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모두가 법을 잘 지키게 되었다. 이와 같이 상앙은 법률에 상벌을 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이를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철저히 시행함으로서, 신상필벌을 제도화한 것이 상앙의 큰 공이다.

 

이러한 신상필벌을 한 개혁의 결과는 10년이 지나자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진나라에서는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진나라에 도둑이 없어졌다. 창고마다 곡식과 재물이 가득 쌓였다. 모두가 다 전쟁을 위해선 용감했다. 감히 개인 간에 싸우는 자가 없어 졌다.

진나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초나라와 위나라를 쳐서 국토를 넓혔다

우선 초나라를 쳐서 상(商)땅을 뺐았다. 그리고 무관땅 밖으로 6백리여리의 땅을 쳐서 뺏았다.

다음에는 위나라와 전쟁을 하여 승리하고 과거에 위나라에 빼앗겼던 서하 땅을 다시 회복하였다. 위나라는 진나라에 서하 땅을 빼았기고 나서, 도읍을 안읍에서 대량으로 옮겼다. 왜냐하면, 안읍은 진나라 국경에서 너무나 가까워 졌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이 있기 전까지 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전국시대 패권국가로서의 지위를 누렸던 위나라는 이 전쟁에 패함으로서 많이 약화되었으며, 이후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진효공은 상앙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위나라를 쳐서 빼앗은 상어 등 열다섯 고을 7백리를 상앙에게 식읍으로 주고, 상군(商君)이란 칭호를 내렸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위앙을 상앙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신상필벌의 시행으로 상앙은 주변의 오랑캐 취급을 받던 진나라를 자신이 죽기 전에 중국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이후 7대를 거치며 부강한 국력과 군사력으로 중국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루게 된다(기원전 221년).

 

마침내 진효공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나서, 상앙에 불만을 가진 대신들의 모함으로 상앙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상앙이 처형된 후에도 진나라가 강대국의 지위을 계속 유지하고 천하통일을 하게 된 것은, 상앙이 만든 법과 제도는 그대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진효공이 죽은 후 즉위한 진혜문왕은 상앙의 처리를 고민하는데 상앙을 죽여 보복을 하기로 한다. 상앙은 형장으로 끌려가 오우분시의 형으로 처형되었다.

(오우분시의 형은 다섯 마리 소에 사람의 사지와 머리를 매어 놓고 다섯 마리의 소가 제각기 방향으로 움직이면 사람의 사지와 머리가 각기 찢겨져 나가서 죽는 형이다)

혜문왕은 상앙을 제거하지만 상앙의 법은 진나라를 20년이라는 단기간에 중국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고, 아울러 군주가 귀족들의 반발을 강력히 응징하는 데 아주 요긴한 것이었다. 그래서 상앙이 만든 법과 제도는 그대로 시행하게 된다.

 

손봉균씨는
국토교통부에서 30년간 재직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행정고시 19회에 합격. 전 국토지리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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