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주의 세상보기] 삶의 길목...천안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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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주의 세상보기] 삶의 길목...천안역에서 
  • 나은주 글쓰기 선생님
  • 승인 2022.11.30 14:59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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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주 글쓰기 선생님
나은주 글쓰기 선생님

[나은주 글쓰기 선생님] 천안(天安)역. 서울행 기차 시간이 아직 멀었다. 오랜만에 플랫폼 벤치에 앉아 있었다. 볕이 따사로웠다. 11월 하순인데도 찬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기차와 전철이 쉼 없이 오고 간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멈췄다 떠나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스치듯 차창 안으로 사람들이 보였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앞을 보고 있거나 무심히 밖을 내다보거나 하는. 다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역사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천안아산역 주변의 번화한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오히려 소박해서 편안했다. 

“선생님, 시간이 흐르면 추억은 다 아름답게 느껴지나요?” 문득, 엊그제 수업하러 왔던 고등학생 아이의 말이 생각났다. 글쎄…… 

“추억이 다 아름답진 않겠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라는 데서 오는 아련함, 그리움,  그런 감정들이 한데 어우러져 자꾸 빛깔이 달라지는 것 아닐까?”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겠지. 아직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어찌 알겠니? 머리로는 알 수 없는 게 삶이지. 

천안역 플랫폼에서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며 바라 본 텅빈 철길. 사진=나은주
천안역 플랫폼에서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며 바라 본 텅빈 철길. 사진=나은주 

천안은 내가 고교 시절을 보낸 곳이다. 고향 마을 근처엔 고등학교가 없어 천상 외지로 나가야 했다. 하필 그해부터 대전은 추첨제로 바뀌었고 천안엔 선발고사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천안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려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잘해서 더 좋은 고등학교를 가려던 것은 아니었다. 촌동네 중학교에서 제법 공부 좀 한다던 친구들이 다들 천안으로 간다 하니 나도 따라가려던 것 뿐이었다.  

“우리 형편에 무슨 인문고냐, 여상이나 들어가서 빨리 취직해야지. 네 동생들이 셋이나 된다. 니가 맏이니 돈 벌어 동생들 가르쳐야지.” 

여고를 가겠다는 말에 아버진 단호하게 반대를 하셨다. 인문고를 가겠다는 건 대학을 가겠다는 말이니 아버지가 반대하시는 건 당연했다. 손바닥만 한 땅뙈기 일구며 허리 펼 날 없이 살아도 엄마는 늘 비어가는 쌀독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아버지가 여덟 살 때, 외지로 떠돌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위로 누나가 둘이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둘이나 되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셨던 아버지. 등잔불 아래에서 해진 옷을 깁던 홀어머니를 바라보며 어린 아버지는 일찍부터 절망과 한숨을 알았을 것이다.

하루 세 끼 밥을 먹기 위해 철이 든 누나들은 나물 바구니를 채우러 다니고 어린 장남은 남의 허드렛일을 돕거나 고구마 이삭, 벼 이삭을 주우러 다녔을 것이다. 어찌어찌해서 국민학교는 졸업을 했지만 중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시골 촌동네라 해도 아버지 친구들 중에는 중학교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중학교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불가침의 공간이었다. 중학생이 되어 새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아버진 얼마나 부러웠을까. 그리고 발목을 붙잡고 있는 곤궁한 삶이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을까.

파릇이 새싹 올라오는 봄 들판에 서서 아버진 시린 가슴으로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그렇게 아프게 자란 아버지는 마디 굵은 손으로 품을 팔며 기어코 두 동생을 중학교에 보내셨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너는 맏이니 여상 졸업해서 돈 벌어 동생들을 가르치란다.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죽여 울었다. 서러워서. 가슴 아파서… 난 왜 친구들처럼 인문고에 가고 대학에도 가면 안 되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왜 우린 이렇게 가난해야 하냐고.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일찍 철이 든 나는, 맏이였다. 그건 마음과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며  노력을 해도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리고 약한 마음이 더 아팠다. 며칠을 그랬다. 학교에 다녀오면 시든 풀잎처럼 나는 방구석 한켠에 웅크리고 있었다. 엄마 아버지가 들에 나가 계신 시간에만. 울다 지쳐 잠이 들었던가. 문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나, 내가 상고나 농고 졸업해서 돈 벌 테니까 누나가 나중에 대학 가라.” 

바로 아래 남동생이었다. 눈을 뜨고 바라본 남동생이 어른처럼 커 보였다. 아니지, 그건 아니지. 

“무슨 말이니? 니가 장남이니 니가 잘돼야지.” 

나는 동생한테 미안해서 또 눈물이 났고 동생은 그런 나를 보고 훌쩍거렸다. 아, 나는 누나였고 언니였구나. 정신이 번쩍 났다. 그동안 나만 마음 아팠던 게 아니었다.

동생들도 엄마 아버지도 함께 울고 있었던 거였다. 그래, 그러자.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차라리 홀가분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모두 갈 길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다른 거니까. 나는 찬물에 세수를 하고 저녁밥을 안쳤다. 그리고 국을 끓였다. 편찮으신 할머니와 지쳐서 들어오실 엄마 아버지, 동생들을 위해. 어둑어둑해지자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은주야, 천안여고 가라. 혹시 아니? 우리가 부자가 될지.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거니까.” 

낡은 두레반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엄마가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엄마의 시선에도 가타부타 아무 말씀 안 하셨다.

들녘에서 엄마가 아버지를 설득하신 게 분명했다. 무언의 허락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철없이, 마음이 환해졌다. 친구들과 함께 인문고에 가고 대학에도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신이 나기까지 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건만. 

그렇게 나의 천안살이가 시작되었다. 말이 천안이지, 여고가 있는 삼용동은 논두렁길을 지나 학교에 가야 하는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다. 연탄 아궁이에 물 데워 머리 감고 석유곤로에 밥해 먹으면서 고등학교 3년을 보냈다.

여전히 집은 어려워 학원 같은 건 생각도 못 했다. 직업반을 가야 할지 진학반을 가야 할지, 교대를 가야 할지 일반대 국문과를 가야 할지 끙끙대며 고민도 숱하게 했다. 그런데 대학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 나가 입상을 하면서 내 인생의 발걸음이 이리로 향하고 말았다. 운명처럼. 

천안(天安), 하늘 아래 편안한 동네. 삶의 환승역 같은 이곳에서 어쩌면 나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길목에서, 시골 촌년에서 도시인으로 변해가는 길목에서, 나는 번개탄으로 식은 아궁이를 덥히는 걱정이 아니라 삶과 시대를 고민하는 작가가 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몇십 년이 지났지만  천안역 풍경처럼 나 또한 크게 변한 게 없다. 본질적인 면에서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만 가슴 뛰는 열정이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

나이 든 몸은 뜨거운 열정을 감당할 수 없어 안온을 원할 수밖에 없나 보다. 지금 나는 어디에서 어디로 향해 가는 걸까?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제대로 된 지향점을 정해 놓고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서 있다. 

서울행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리고 기차에 오를 준비를 한다. 

나은주 글쓰기 선생님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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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민연 2022-11-30 20:59:07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큰 행복이고 아름다운 시간이 아닐까 싶네요
다시한번 나이 든 몸에 열정이라는 놈이 살아날 수 있도록 당신을 응원합니다.

쑤용 2022-11-30 15:35:10
가고자 하여 발걸음을 뗀 길이 생각과 다르기도, 우연히 들어온 길이 가려고 했던 길과 이어지기도 하는 게 인생인가 싶습니다. 또 다른 걸음을 떼야 할 선생님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나도 2022-11-30 17:06:44
좋은 글 감사~~~
과거는 아름답기도 아프기도 하네요.
그래도 그 시기의 우리들은 열심히 살아왔으니
덜 부끄러워해도 되지않을까요?

꿈그리기 2022-12-01 12:43:18
참 좋은 글, 아름다은 글, 빈틈없는 글 잘 읽었습니다.

푸른숲 2022-12-02 07:03:59
글읽는 내내 마음 찡하고 눈물이나서 힘들었네요.
어찌 글을 이리 잘 쓰는지...
늘 느끼는 거지만 은주선생님 글솜씨는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