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제의 포철④…돌아온 T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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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제의 포철④…돌아온 TJ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2.0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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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상 치르기 위해 귀국…상가엔 박태준 사단, 정치인들 몰려와

 

1994년 10월 9일 하오 3시 부산김해공항 국제선청사. 일본 후쿠오카에서 출발한 대한항공735편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신호에 불이 들어왔다. 10분후 박태준씨 부부가 입국장으로 들어왔다. 검은색 싱글에 중절모를 쓴 박태준은 얼굴에 수척하고 초췌한 모습이 역력했다. 부인 장옥자 여사는 검은색 투피스를 입고 남편 뒤를 빠져나왔다. 93년 3월 포철 주총 직전 명예회장직 사표를 던지고 언제올지 모를 기나긴 외유를 떠났던 그는 88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모친 김소순(金小順) 여사의 상을 치르기 위해 1년 7개월만에 장기외유에서 돌아온 것이다.

박씨는 25년간 포철회장과 집권민자당 최고의원을 역임한 거물답지 않게 VIP실을 이용하지 않고 일반인들과 함께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공항에는 박태준에 이어 포철회장을 역임, 포철의 파란과 함께 험로를 겪었던 황경로씨와 그의 정치담당 비서였던 조용경씨가 마중나왔다. 그를 기다리던 기자 30여명이 몰려와 귀국소감을 물었으나 그는 일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에워싼 기자들의 포위망을 뚫고 그는 대기한 승용차를 타고 본가가 있는 경남양산으로 향했다. 승용차는 포철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박씨는 차안에서 눈을 감은채 말이 없었고 가끔 한숨만 내쉬었다. 옆자리에 타고 있던 조용경씨가 박씨에게 물었다.

“상가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한 말씀 하셔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죄가 많은 사람이다. 돌아기시는 순간까지 어머님께 걱정만 끼쳐드리고 임종도 못한 불효자식인데 무슨 말을 했다고 하겠느냐.”

경남 양산군 장안읍 임랑리 137. 바닷가의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하오 4시10분께 박씨 부부는 본가에 도착했다. 그는 대문 안에서 기다리던 태화, 태선씨등 동생들과 함께 모친의 시신이 안치된 안방으로 향했다.

안채는 이내 울음바다로 변했다. 박태준은 모친의 시신 앞에서 섰다. 고인에게 술을 한잔 올리고 절을 올린후 빈소 앞에 꿇어 앉았다. 장여사가 슬피 울는데 박태준은 망연히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픔이 지나치면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동경에 머물고 있는 맏아들 박태준을 보고 싶어하던 모친 김소순 여사가 눈을 감은 시각은 10월 7일 하오1시. 그 시각 박태준은 홍콩에 살고 있는 막내딸 경아씨 부부를 만나기 위해 홍콩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미국에 사는 사돈도 돌잔치에 참석하니 경아씨의 간청에 못이겨 박태준은 외손주의 돌잔치에 가던 참이었다.

홍콩공항에 마중나간 경아씨는 아버지를 만나 그 자리에서는 차마 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늦게 소식을 들은 박태준은 잠을 못이루고 꼬박 밤을 새웠다. 다음날 비행기편을 이리저리 찾다가 일본 후쿠오카를 거쳐 하오 3시 김해공항으로 귀국, 돌아가신 모친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미 입관은 했지만 맏상주가 나타나지 않아 관두껑을 덮지 못하고 있던 차에 박태준은 모친의 마지막 얼굴을 바라보고 절을 했다. 모친시신에 절을 한지 한 1분쯤 흘렀을까. 박태준은 󰡔불효자가 왔습니다󰡕며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철의 인간이란 뜻으로 「아이언 朴」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강인한 그였지만 모친의 임종을 못한 불효자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가족 한사람이 그에게 눈물을 닦으라고 손수건을 건넸다. 그는 1973년 6월 포철의 첫고로에서 붉은 쇳물이 흘러나왔을 때 눈물을 흘렸고, 광양제철소 준공후 회장 사표를 내기 직전인 92년 10월 3일 故박정희대통령의 묘소 앞에서도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불모지에서 맨손으로 포철 건설에 착수, 흘러나오는 쇳물을 바라볼 때 그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었고, 포철건설을 마치고 박정희 대통령묘소 앞에서 흘린 눈물은 포철 대역사 준공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자 포철을 떠나야 하는 슬픔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모친 시신 앞에서 흘린 그의 눈물은 회한의 눈물이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모친의 임종도 못보고 이역만리에서 1년 7개월이나 유배생활이나 다름없는 외유를 강요했던가. 세계2위의 철강회사를 일으킨 한국경제발전의 산증인이 정치의 길을 잘못들어서 모친의 시신을 바라보며 울어야 할 만큼 우리의 정치는 비정하다는 말인가.

 

20분쯤 지난후 박태준은 마당으로 나와 상주석으로 돌아가 문상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황경로씨를 보고서는 한동안 끌어안고 재회의 정을 나눈 뒤 대기하고 있던 포철 OB들과도 악수를 나누었다.

황경로씨를 비롯, 박득표 전사장, 이대공, 유상부 전부사장등 과거 박태준 휘하에서 포철을 이끌던 이른바 박태준사단의 핵심인물들이 대부분 자리를 같이했다. 이들은 박태준이 포철을 떠난후 박태준사단이라는 이유로 포철을 떠나야 했고 황경로, 유상부씨는 실형을 살고 나오기도 했던 인물이다. 현직으로 포철사장을 맡고 있는 김종진 사장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틀동안 발길이 뜸했던 정치인들이 박태준이 귀국, 본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문전에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첫조문객은 박철언 전의원. 9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박태준과 함께 반김영삼노선을 걸었다가 정주영씨의 국민당에 입당했고, 새정부가 들어선 후 1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던 인물이다. 같은 노선은 걷지 않았지만 서로의 마음은 잘알고 있는 처지라고나 할까. 두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서로를 위로 했다.

“마음 고생이 얼마나 많으십니까.”

“박 의원, 고생이 많았지.”

이어 김영삼 대통령의 오른팔이자 권력실세인 최형우 내무부 장관이 상가에 들어왔다. 상가를 취재하고 있던 기자들과 조문객들의 눈길이 박태준과 최 장관의 대화에 맞춰졌다.

박태준이 최 장관의 손을 맞잡고 말문을 열었다.

“우리 어머니가 최 장관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죄송합니다.”

최 장관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포철 사장으로 있다가 박태준과 함께 포철을 물러난 박득표씨의 부탁으로 YS에게 박태준의 구명을 건의했지만 결국 성사시키지 못했다. 고향선배인 박태준의 상가에 도리 상 찾아왔지만 그 역시 박태준이 이렇게 되기까지 마음속에 미안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정치인들의 문상이 줄을 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현직 포철회장을 맡고 있는 김만제씨가 도착했다. 박태준은 다른 어떤 정치인들의 문상보다도 김 회장의 방문을 반기는 눈치였다.

“우리는 정치 얘기는 않할 것이니 여기서 앉읍시다.”

박씨는 김 회장을 상가마당에 배열된 철제의자로 안내, 마주 앉았다. 김 회장은 선배 철강인이자 선임 포철회장에 대해 깍듯한 예의를 차렸다. 박태준이 말문을 열었다.

“고생이 많지요.”

“고생은 포철을 건설하신 박 회장님이 많이 하셨지요.”

“아니지, 건설 후에도 어려움은 계속되는 것이지. 고생이 많을 거야. 나야 포철을 키우기만 했지. 포철은 지키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김 회장은 박태준이 포철을 떠나 있을 동안 있었던 일을 조목조목 보고했다.

“93년 하반기에는 철강경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경기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투자계획도 세워놓고 있습니다.”

“경기는 앞으로 더 좋아질 거요. 투자도 해야지요.”

“이번에 IISI(세계철강협회) 부회장에 선임됐습니다.”

“축하합니다. 보도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 신일본제철에서 나온 잡지를 통해서 철강업계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에 가서 호건 박사와 피터 마커스씨(세계적인 철강전문가)를 만났습니다.”

“나도 지난번 뉴욕에서 호건 박사를 만났어요.”

“이번에 뉴욕증시에 회사주식을 상장할 계획입니다.”

“얘기 들었습니다. 사위 하나가 (미국의) 골드만삭스社에 근무하는데 요즘 포철의 뉴욕증시상장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올 정도로 바쁘다는 얘기를 해서 알고 있죠.”

“그렇습니까.”

박태준과 김만제 회장씨는 회사이야기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김 회장 뒷편에는 김종진 사장이 부동자세로 전현직 회장들의 이야기를 보충했다. 중국과 베트남 투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때는 전부터 그일을 맡던 전직임원들이 나서서 얘기를 거들었다.

김 회장이 포철의 증설문제로 화제를 바꿔나갔다.

“회사의 증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참, 어느회사(현대그룹을 지칭함)인가가 제철소를 하겠다고 하던데 어찌 됐습니까. (그 회사는) 중국에 가서 하면 좋을 텐데. 중국은 땅도 넓고 수요도 많은데.”

“베트남에 파이프공장을 준공했습니다.”

“하이퐁에 있는 것 말이지요. 그건 내가 자리를 잡았지. 하노이는 입지 조건이 않좋아.”

철강분야에 관한한 박태준이 김만제회장보다 한수 위였다.

두사람의 대화는 30분 정도 이어졌다. 그때 문상온 정치인들이 두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사람이 김회장을 보고 “김 부총리도 오셨군요”라고 말하자 박태준이 정색을 하고 농을 걸었다.

“부총리보다 포철회장이 높은 것이야. 官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군.”

문상객이 줄을 이으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됐다.

포철을 25년동안 이끌었던 박태준사단은 무너졌지만 상가에 모인 그들의 결속력은 끈끈했다. 수십명의 포철 OB들이 밤을 지키며 돌아온 「회장님」 옆을 지켰다. 그들의 부인들은 흰색 소복을 입고 부엌으로 들어가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서울과 포항, 광양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일손을 놓고 상가를 찾아와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왔다. 그들의 회장은 역시 박태준이었고, 상가 여기저기에서 박회장시절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샜다.

 

다음날도 박씨 상가에는 문상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 노태우 전대통령이 찾아와 박씨를 만났다.

“옛날에 이룩했던 큰 일들에 대한 보람을 찾아야 합니다.”

“어머니 수명을 내가 한 2년간 당긴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세월이 만들어놓은 운명의 장난을 덮어놓은 채 선문답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광양4기를 건설하던 중에 노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민정당 대표를 맡아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박태준이었다. 그리고 박태준은 3당 통합 과정에서,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대통령선거직전 댕을 떠날때 박태준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늘 따돌림을 받았다. 노 대통령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제대로 읽지 못한 박씨의 책임도 있을 것이다. 오늘의 몰락의 遠因이 어쩌면 노태우 대통령에게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일까. 그러나 박씨는 모시던 대통령에 대한 깍듯한 예의를 보였다. 상중인데도 불구하고 문밖으로 나가 차까지 배웅했다. 노 대통령에 향해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최고위원 시절의 자세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한동 민자당총무, 이춘구 국회부의장, 박준규 전국회의장등 정치인들의 조문이 잇달았다.

박태준이 포철에서 물러난후 포철의 사장을 맡은 조말수씨와 상무로 조씨를 뒷바침하며 실세로 일했던 장중웅씨가 문상을 왔다. 두사람이 조문을 하자 박씨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박태준의 오랜 비서생활을 했던 그들은 박씨가 정치적인 이유로 포철을 떠난후 경영권을 잡고 행사하면서 포철 내에서 「박태준지우기 작업」을 했던 인물로 박씨는 그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갖고 있다.

조씨와 장씨는 황경로 전회장, 박득표 전사장과 덤덤히 인사를 나눴다. 그 자리가 불편했던지 서둘러 상가를 떠났다. 포철을 떠난 다른 전직임원들과 현직의 임원들이 며칠동안 밤을 지내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랴. 누군들 그자리에 있었으면 개혁의 총대를 메지 않았을까.

박태준은 11일 모친장례를 치르고 상경했다. 그리고 20일 검찰조사에 응했다.

미국의 카네기가 20세기초 철강왕이라면 박태준은 20세기 후반의 철강왕이다. 카네기가 당대에 연산조강능력 800만톤의 철강회사를 일으킨데 비해 박태준은 2,100만톤의 회사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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