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당쟁②…대기근때 벌어진 예송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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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당쟁②…대기근때 벌어진 예송논쟁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2.0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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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은 굶어죽는데, 유림은 상복타령만…친구도, 사돈도 없고 오직 당파만 있다

 

조선 현종 재위기간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후에 기상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소빙하기(little ice age)가 지구에 덮쳤고,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짓던 조선백성 수십만명이 굶어 죽어갔다. 2년에 걸친 대기근을 역사적으로 경신(庚申) 대기근이라고 한다.

2년에 걸쳐 저온으로 우박과 서리, 때아닌 폭설이 내렸고, 가뭄과 홍수가 반복됐다. 조선 팔도에 전염병이 유행했고,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흉년이 들어 백성은 신음하는데, 사대부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한 것도 이 시기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아도 한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기아사태가 발생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피해 살아남은 노인네들은 ‘전쟁때도 이보다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피해는 엄청났다. 조선 전역에서 흉작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당시 조선 인구 1,200만~1,400만명 중 30만~40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백성들이 병들고 굶어 죽어가는 시기에 조선의 지도층, 즉 사대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들은 왕실의 상가에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지 하는, 백성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쓸데 없는 논쟁을 벌였다. 저 유명한 예송(禮訟)논쟁이다.

 

① 1차 예송논쟁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백호 윤휴(尹鑴). 나이는 10살 차이지만, 어릴적 가장 친한 친구였다. 학문에서도 벗이었고, 사돈 관계이기도 했다. 조선사에서 송시열과 윤휴의 관계를 보면 당쟁이 얼마나 인간관계를 파괴했는지를 알수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해주던 두 유학자는 당(黨)을 달리하고 유교적 해석을 쟁점화하면서 서로 죽이고 죽는 관계로 변해버렸다. 그것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도 아니고, 예(禮)와 격식에 관한 논쟁에 그들은 사활을 걸었다.

 

▲ 경기도 여주 강한사.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사당. /여주시청 홈페이지

 

1659년 효종이 재위 10년만에 죽었다. 효종은 송시열을 스승처럼 여기고 따랐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효종의 북벌정책은 서인인 송시열과 남인인 윤휴의 강력한 지지로 국론을 통일시킬수 있었다.

효종이 사망했을 때 어린 대비가 살아있었다. 효종의 부왕 선조는 정비 한씨가 죽자 14살의 조씨와 재혼했는데, 그녀가 자의대비(慈懿大妃)로, 효종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계모도 어머니다. 둘재 아들 효종이 죽었으니, 어머니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동안 입어야 하는지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생각지도 못할 문제가 성리학이 지배해던 조선시대엔 중요한 이슈였다.

효종은 선왕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다. 맏아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귀국한후 병사했고(인조가 독살시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둘째인 봉림대군이 선조가 죽은후 왕위를 이었으니, 효종이다. 즉 왕위는 이었지만 둘째 아들이었던 효종의 상에 어머니의 복상(服喪) 기간을 몇 년으로 하느냐의 이슈였다.

조정은 이조판서 송시열에게 중차대한 이 문제의 의견을 물었다. 송시열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 이론가였으며, 예학(禮學)의 대부였다.

송시열은 우참찬 송준길과 의논해 효종이 왕통(王統)으로는 적자(嫡子)이지만 가통(家統)으로는 차자(次子)인 점에서 대비가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의 당수가 내린 결론이므로, 조정은 대비의 상복기간은 1년으로 정하려 했다.

이때 송시열의 절친이지만 당파를 달리하는 윤휴가 이의를 제기했다. 유교 예법을 정리한 「의례(儀禮)」를 뒤져 “제일 장자가 죽으면 본부인 소생의 제이 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는 구절을 들고 나와 1년복이 아니라 3년복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인 송시열은 남인 윤휴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예학의 관점에서 달리 볼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송시열은 「의례」의 다른 구절에 “서자(庶子)는 장자가 될수 없으며, 본부인 소생의 둘째 아들 이하는 다같이 서자라 일컫는다”라는 구절을 끄집어내 1년설이라고 주장했다.

송시열은 한걸음 더 나갔다. 「의례」에 3년복을 입지 않는 경우 가운데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는 내용을 거론했다. 이 주석에 따르면 효종은 아버지를 계승했지만(體而) 가통을 이어받지 못했다(不正)는 것이고, 거꾸로 소현세자는 적장자로 가통을 이어받았지만(正而) 아버지를 계승하지 못한 경우(不體)가 된다.

논쟁이 확산되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태화(鄭太和)는 송시열의 체이부정론에 깜짝 놀랐다. 그는 송시열에게 “우암,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마시오. 훗날 큰 화를 입을수 있소. 간사한 인간들이 이 말을 가지고 화를 만들 수 있소.”라고 만류했다고 한다.

체이부정은 「의례」라는 예학 경전에 나오는 구절이지만, 그 단어의 정치적 심각성을 정태화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후손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둘째 아들인 효종이 가통을 잇지 못했다면, 그의 아들인 현종의 정통성에 문제가 생길수도 있다. 따라서 체이부정론은 잠재적 폭발성을 갖는 시한폭탄과 같은 논리였다.

1차 예송논쟁은 폭발성을 내재하면서 일단 송시열의 서인이 승리했다. 19세에 등극한 현종도 더 이상 대유학자의 견해를 반박하지 않았다.

 

② 2차 예송논쟁

 

잠복해 있던 이슈를 다시 끄집어 낸 사람은 남인학자 윤선도(尹善道)였다. 윤선도는 상소를 올렸다.

“송시열이 종통(宗統)은 임금(효종)에게 있다고 하고, 적통(嫡統)은 장자(소현세자)에게 있다 하는데, 종통과 적통이 어찌 두가지일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명령과 왕명을 받았어도 적통이라 하지 못한다면, 가짜 세자란 말입니까. 가짜 임금이란 말입니까.”

윤선도는 너무나 직설적이고 과격한 표현을 사용했다. 즉 송시열이 효종을 적통이라 하지 않았으니 그 아들인 현종의 적통성을 문제시 삼은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송시열과 서인들은 대경실색했다. 「어부사시사」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읊던 윤선도는 가식과 위장을 던져버리고 서인과의 정쟁에 정면으로 나선 것이다. 서인들은 윤선도를 국문하자, 죽이자고 했다.

예송논쟁은 이제 예법에 관한 해석이 아니라, 정쟁의 수단이 되었고, 죽고죽이는 정치이슈로 부상했다. 효종의 아들 현종은 설령 윤선도의 주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권력을 쥐고 있던 서인들에게 대응하지 못했고, 나이도 10대에 불과했다. 현종은 “윤선도가 심술(心術)이 바르지 못해 음험한 상소를 올려 상하를 헐뜯었다며 관직을 뺏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서인들은 이 조치가 약하다고 주장해 현종은 하는수 없이 윤선도를 함경도의 오지 삼수(三水)로 귀양보냈다.

 

▲ 조선 제17대 효종이 묻혀 있는 영릉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이트

 

1674년(현종15년), 이번엔 효종의 왕비이자 현종의 생모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었다. 그때까지도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살아있었다. 이번엔 며느리가 죽었으니, 시어머니가 몇 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문제가 대두되었다.

맏며느리가 죽으면 시어머니는 1년복을 입어야 하고, 둘째 며느리가 죽으면 9개월 기간의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했다. 예조판서 조연이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그러자 서인들은 임금(효종)과 왕비의 상에 같은 복을 입을수 없다며 9개월 복제를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자의대비의 복제는 1년에서 9개월로 변경되었다.

이번에도 남인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상소를 올려 9개월 복제로 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며 이슈화시켰다.

혼선이 빚어지자 현종이 나섰다. 이 때엔 송시열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있었고, 임금도 30대 중반으로 성숙해 있었다.

현종은 영상 김수홍을 불러 물었다. “처음에는 자의대비 복제를 1년으로 했다가 9개월로 고쳤소. ”

김수홍은 딱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리고 백관들을 모아놓고 의논하겠다고 하며 빠져나왔다. 서인들은 당황했다. 임금의 말에 뼈가 있었다. 같은 국상인데 왜 복제를 정하는 기준이 다른지를 해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첫 번째 단추(1차 예송)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다.

서인들은 이러저러한 예법을 들이대며 설명을 했지만, 현종을 설득하지 못했다. 현종이 단안을 내렸다.

“이전의 기해예론(1차 예송)은 참최복(3년복)으로 고치고, 이번 갑인예론(2차 예송)도 1년복으로 하라.”

현종은 효종을 서자로 규정한 체이부정(體而不正)의 논리를 강하게 질책함으로서 자신의 왕통을 정당화했다. 결국 임금의 서인이 진 것이다.

이리하여 서인정권은 붕괴된다. 영의정 김수홍은 귀양가고, 남인의 우두머리 허적이 영상이 되어 남인정권이 수립된다.

2차 예송논쟁이 정리되자 마자 현종은 재위 15년 8개월만에 숨을 거두고, 13세의 숙종이 조선 제19개 임금으로 즉위한다.

 

▲ 자료:위키피디아

 

③ 대기근에도 살육의 당쟁

 

숙종은 45년간 재위한다. 이 기간은 조선 당쟁사의 클라이맥스라 할수 있다. 숙종 재위기간에는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여러차례의 정권변동이 있었고, 장희빈의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당쟁에 휩쓸리며 전개된다.

예송논쟁의 주인공인 송시열과 윤휴, 허적 모두가 숙종 재위기에 사약을 받게 된다. 예송논쟁은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살육의 복수로 전개된 것이다.

당쟁으로 인한 대살육의 시대였던 숙종 재위기간에도 대기근이 찾아왔다. 숙종 21년(을해)과 22년(병자)의 을병(乙丙) 대기근이다. 피해는 경신 대기근에 못지 않았고, 청나라에서 식량 지원을 받았지만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숙종 21년 시작된 흉년은 수년간 지속되었고, 대기근에 전염병까지 겹치면서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사대부들의 당쟁이 극에 들했던 17세기에 조선은 두 번의 대기근을 겪으면서 안으로 무너져갔다. 농민은 농토를 떠나 유랑자가 되거나 산적이 됐고, 부족한 세수를 메우기 위해 삼정 문란이라는 가렴주구 현상이 심해졌다. 이 와중에도 숙종은 희빈 장씨의 치맛폭에 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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