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도입부와 종결부①…일(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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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도입부와 종결부①…일(一)
  • 주우(宙宇)
  • 승인 2017.12.03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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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81자 중 처음 一始無始(일시무시)는 도입부에, 마지막 ‘一終無終(일종무종)’과 ‘一’은 종결부에 해당합니다.

대구인 一始無始와 一終無終은 떨어져 있으나 서로 연관해서 풀이해야 합니다.

여기서 無(무)는 절대무(絶對無)가 아니라 단순히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一始無始는 ‘一’, 즉 나의 존재상태가 시작하나 시작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一終無終도 나의 존재상태인 ‘一’이 끝나나 끝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천부경 마지막이 ‘一終無終一’이므로 一始無始 다음에도 ‘一’을 붙여서 ‘一始無始一’이라는 대구(對句)로 풀이할 수가 있으나 그렇게 풀면 ‘一이 시작하나 시작이 없는 一이다.’고 중언부언이 됩니다. 앞에 ‘一’이 주어로 있는데 두 번 쓸 필요가 없지요.

그리고 一析三極(일석삼극)과 一積十鉅(일적십거)가 명백히 대구이므로 一始無始 다음의 ‘一’은 一始無始의 뒤가 아니라 析三極의 앞에 더해져서 一析三極이 되어야 합니다.

또 ‘一終無終 一’에서 뒤의 ‘一’은 앞의 ‘一’과는 다릅니다. 잠시 후 설명하겠습니다.

 

1. 일(一)

 

천부경이 一始無始로 시작하니 먼저 ‘一’에 관해 명확히 알고 싶어요. 설명을 부탁합니다.

 

천부경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一’에 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부경이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다고 여겨지다 보니 지금까지 사람들이 대다수 ‘一’을 태극이나 도(道), 하느님으로 생각해왔으나 이렇게 풀면 답이 없습니다.

이렇게 접근하는 분들은 우주의 작동 원리나 하느님의 뜻을 알아내서 잘 터득한다면 자신도 그런 권능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지리라고 기대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대다수 이런 식으로 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부경의 ‘一’은 도(道)를 상징하는 ‘一’이 아닙니다.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수 있겠지만, ‘一’은 하느님이나 우주의 원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즉 여러분 각자의 실제 모습인 내적 존재상태, 즉 자신의 존재됨됨이를 지칭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라는 자기 정체성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 방식에는 생각·말·행동이라는 활동이 있고, 외적인 모습인 외양과 신분도 있으며, 내적인 모습인 존재상태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일관되기보다 때마다 장소마다 상대마다 대응해서 바뀌고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의식해서 선택하는 정체성인 의식이 있고, 의식하지 못하고 선택하는 정체성인 무의식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을 규정하기가 복잡할 뿐만 아니라 자신조차 자기를 제대로 알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자신이 누구인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과정에 머물다가, ‘자신이 누구인지’ 의식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자신이 실제 누구인지’ 깨닫는 과정에 진입합니다.

이 자기 정체성인 ‘자신이 누구인지’는 영어로 ‘Who I am’이며, 줄이면 ‘I am’이고 ‘I’인 것입니다. 소위 ‘나’인 ‘I’가 있는데 각자가 다 ‘I’이지요. 이것이 수학에서 말하는 변수(變數) ‘x’가 됩니다. 상수(常數)는 고정된 수이나 무엇이든 대입할 수 있는 변수에는 어떤 정체성이든 대체할 수 있습니다. ‘나는 x이다(I am ‘x’)’는 명제가 사실상 언제나 성립합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에게나 자기 정체성을 자유로이 정할 선택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적 정체성을 붓다는 각자가 ‘나’라고 생각해서 규정하는 아함(ahaṁ)이라고 했습니다. 한편 의식해서 선택하다 보면 의식적으로는 자신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은 무의식적인 자기 정체성도 있게 됩니다. 이러한 내적 존재를 붓다는 ‘아따(atta)’(󰡔붓다의 발견󰡕에서는 실아라고 함)라고 했으며 이 ‘아따’의 속성이 바로 아라마나(ārammaṇa)입니다.

전자는 의식적인 ‘자기 선택’이고, 후자는 무의식적인 ‘존재상태’인데, 이 양면성이 분리해서 작동하지 않고 상호 연동하는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이렇게 상호 연동하는 두 정체성을 천부경은 ‘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자각하도록 애쓰는 우주는, 이미 알려진 외적인 신분보다 각자가 부정하기 쉬운 내적 존재상태를 자각하게 하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의식적인 ‘자기 선택’과 무의식적인 ‘존재상태’는 복잡하게 작동해서 ‘선택에 따른 존재상태’(이하 ‘존재상태’)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一’입니다.

‘一’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아함(ahaṁ)에 따른 아라마나(ārammaṇa) 즉 각자의 선택에 따른 존재상태인 존재됨됨이(Beingness)입니다.

 

아! ‘一’이 각 개인의 존재됨됨이, 즉 각자의 선택에 따른 존재상태를 지칭한다는 이런 해석을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저로선 하느님이나 도(道)라는 기존의 해석을 단칼에 깨트려버린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해석으로 보이네요.

 

사실 천부경에는 도(道)를 대신할 단어가 따로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단어가 이 의미를 대행합니다. 이것은 잠시 후 이야기하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는 누구인지?’ 궁금해합니다. 자기 정체성은 사실 다양한 요인을 고려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는 복잡계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선천성과 후천성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선천적 영향이 없는 것도 아니며 지금 현재가 전부인 것도 아닙니다. 즉, ‘오늘(현생)은 어제(전생)와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나라고 생각해서 정한 정체성에 따른 존재상태’가 ‘一’입니다.

 

저도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호했는데, 후천적인 의식적 ‘자기 선택’과 선천적인 무의식 ‘존재상태’가 복잡하게 작동해서 ‘선택에 따른 존재상태’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나다!’는 것으로 납득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一’에는 자신이 의식해서 정한 정체성인 아함(ahaṁ), 즉 ‘I’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좌우합니다. 바로 지금 자유로이 선택한 정체성인 ‘내가 누구인지(Who I am)’가 전생의 어떤 인연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지금 의식해서 결정한 ‘내가 누구인지(Who I am)’가, 얼마 후 자기 정체성을 결정할 기회로 펼쳐진 삼극(三極)을 활용함으로써 존재상태를 바꿀 수 있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군가 여러분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간단히 대답해야 합니다. ‘지금 나라고 생각하고 정하는 내가 나이다’고 선언함으로써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별도의 내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用變을 통해서, 즉 외부가 아니라 자신을 바꿈으로써 수행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미리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하기 시작하면 먼저 자신의 마음가짐이 어떤 식으로 외부에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비록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사실상 마음에서 정했던 자기 정체성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즉, 자신의 감정·느낌·생각·정신 등 자기 내면에 어떤 마음을 정하는지에 따라 바뀌는 외부현상을 자각하는 과정인 셈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책임을 회피하려고 자신의 행동 근거를 외부에서 가져와 따져보지도 않고 마음을 정한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상태이므로 우주는 三極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도록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나면,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언행 불일치를 자각하게 하는 과정에 돌입합니다. 그다음 내면의 마음과 외부의 활동이 달라서 벌어지는 사태를 통해서 심언행을 일치시키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알게 된 다음에야 자기 영혼의 진정한 뜻, 즉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본질에서 바뀌게 되고, 결국 천지의 뜻인 소명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만일 ‘나는 실제로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면 먼저 ‘나는 누구인지’를 의식해서 제대로 체득하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붓다의 발견󰡕을 참고해주세요.)

결국, 천부경은 하느님의 법칙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의식적인 선택 그리고 이에 의한 존재상태에 따라서 어떤 식으로 현상이 펼쳐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을 자각한다면 각자가 어떤 식으로 수행을 쌓아가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一’이 나 자신 특히 나의 존재 상태를 지칭한다는 충격에서 아직도 멍합니다만, 이 와중에 인류의 긴 역사에 존재들의 오랜 숙원인 ‘나는 누구인가?’란 근원의 물음을 아함(의식적 ‘자기 선택’)과 아라마나(무의식적 ‘존재상태’)로 답해주시며 쓱 한 방에 해치웠네요. 이래도 되는 건가요? 그 엄청난 존재에 대한 물음을 휘청거리는 이 틈새에 넌지시 끼워 넣어도 되는 거냐고요?

게다가 나는 누구인가냐면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정하는 것이 나다!’라고요.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습니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허무하네요.

그런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새도 없이 나에 관한 규정이 이렇듯 단순하나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엄습해옵니다. 아차차 걸려들었구나! 이제는 빠져나갈 샛길이 없구나! 드디어 막다른 골목에 신들이 쳐놓은 듯한 그물에 걸려서 내가 생각하는 나를, 지금 이 순간 나를 내가 정해야 하는 책임에 맞대면할 수밖에 없다는 앓는 소리가 올라옵니다. 하-항복!

주우님 초반부터 엄청난 숙원인 ‘나는 누구인가’를 가볍게 몰아붙여 기선 제압에 성공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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