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 “오보와 과장의 허상을 만드는 언론”
상태바
권순활 “오보와 과장의 허상을 만드는 언론”
  • 오피니언
  • 승인 2017.12.01 15: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해 11월 19일 개인 페이스북에 아래의 글을 썼다. JTBC가 그해 10월 24일 이른바 태블릿 PC 보도를 통해 박근혜 정부의 전반적인 국정(國政)을 마치 최서원(본명 최순실)이 쥐락펴락한다는 식의 선동적 보도를 한 뒤 거의 전 언론이 이런 프레임에 갇혀 매일 마녀사냥식 광기(狂氣)와 반(反)정부 촛불집회 숫자 부풀리기에 빠져있던 시점이었다. 대통령이나 정부의 공과(功過)를 팩트에 입각해 따져서 비판할 것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널리즘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마저 무너진 뒤틀린 한국 언론 현실에 대해 ‘그건 아니오’라는 저항의 기록을 페북에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해 11월 10일에 이어 9일 만에 다시 페북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글의 마지막을 “명분이 옳으면 수단의 정당성은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발상은 공멸을 부를 전체주의로 이끌 위험성이 높다”고 썼다. 1년여가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떻게 흘러왔을까.

 

전남대 경제학과 김재호 교수가 어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읽었다. 김 교수는 “이제는 평균적인 지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신문과 방송이 제공하는 데이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정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데이터를 조작하고 가공하고 선별해서 공급하고 있지 않은가”라며 “이제는 다른 쪽 이야기를 들어야 할 차례가 됐다”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학계에서 온건한 자유주의 성향 경제학자로 꼽힌다. 열성적인 박근혜 대통령 지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런 그가 이렇게 직설적 화법으로 강도 높게 비판할 정도로 한국 언론의 정확성과 신뢰성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커지고 있는 것은 심상찮은 징후다.

 

이달 10일 나는 이 페북에 오보(誤報)와 과장에 무서울 정도로 엄격한 일본 언론과 ‘아니면 말고’식 보도가 판을 치는 우리 언론의 대조적인 모습을 비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신문에 쓰는 정식 칼럼은 아니었지만 페친들을 포함해 적지 않은 페이스북 이용자들이 관심을 보여주셨다. 특히 댓글 중에 목적이 옳다고 생각하면 기사의 정확성을 경시하는 한국 언론의 현실에 대한 질타가 많아 가슴이 무거웠다. 어느 기업인은 장문의 메일을 보내 우리 언론의 앞날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심각한 오보와 과장 행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제만 해도 어느 매체가 ‘단독’ 표시를 붙여 세월호 침몰 사고 당일 국군 수도병원 간호장교가 청와대로 출장 간 사실이 검찰 조사에서 드러난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지만 국방부는 “그날 어떤 간호장교도 청와대에 들어간 적이 없다”라고 반박했다.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오보와 취재윤리 위반 리스트’는 매일 늘어나고 있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은 얼마 전 ‘언론의 종언’이란 표현까지 썼다.

 

아무리 ‘최순실 사태’가 심각하고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해도 이런 오보 홍수라면 반작용을 부를 위험성이 높다. 팩트에 바탕을 둔 비판이 더 힘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부메랑으로 칼이 돌아갈 것이다. 지금 상당수 한국 언론은 길게 봐서 자신들이 죽을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명백한 오보와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숫자의 과장과 왜곡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1월 12일 서울 도심에서 민중총궐기 투쟁본부 주최로 열린 집회 및 대규모 집회 참석자 수에 대해 경찰은 27만 명이라고 추산한 반면 주최 측은 10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날 일본 언론은 한국 경찰 추정치를 인용해 대부분 ‘26만 명’이라고 보도했다. 반면 상당수 한국 언론은 주최 측이 주장하는 수치인 ‘100만 명’을 기정사실화했다. 신문의 얼굴인 1면 기사와 사설등 논평 제목에 ‘100만 명’이란 숫자가 주최 측의 주장이라는 사실도 아예 뺀 곳도 적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도 입만 열면 ‘백만 촛불’을 운운한다.

한번 냉정히 생각해보자. 일산신도시 전체를 포함한 경기도 고양시 인구가 103만 명, 충청북도 도청 소재지인 청주시의 전체 인구가 84만 명이다.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에도 과거 교황 방한 때의 인파 등 각종 실증적 근거를 들어 ‘100만 명’ 주장을 반박하는 글들이 잇달아 올라왔다. 내공이 만만찮은 박성현 뉴데일리 주필 같은 인사는 나름대로의 실증적 분석을 통해 27만 명이라는 경찰 추정치조차 요즘 분위기 때문에 실제보다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누구도 그날 정확한 참석자 수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포함한 고양시와 청주시의 전체 인구와 비슷하거나 더 많은 사람이 그날 서울 광화문 일대에 다 몰려온다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지닐지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경험상 대부분의 대형 집회에서 주최측은 참석자 수를 부풀리는 경향이 있었다. 대체로 언론도 ‘뻥튀기’ 가능성이 높은 주최측 주장보다는 경찰측 추산을 중시했다. 제3자인 일본 언론이 경찰 추산치를 쓴 것도 아마 주최측 추산보다는 더 실제에 가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상당한 민심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최순실 사태와 관련된 모든 의혹도 명백히 밝혀져야 한다. 대통령의 잘못을 감쌀 생각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경찰 추산과 주최측 추산을 병기한다면 몰라도 나는 적어도 ‘100만 촛불’이라고 일방적으로 쓰지는 못하겠다. 이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취재 태도만 익혀도 다 아는 상식이다. 지금은 언론계의 그런 기초상식조차 무너졌다.

거리로 나온 분노의 민심은 나름대로 분명히 하나의 중요한 민심이다. 하지만 적어도 책임 있는 언론이라면 검증도 않고 과장됐을 가능성이 농후한 ‘100만 촛불’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반적인 분위기 때문이라며 책임을 회피한다면 비겁하다. 지난번 페북 글에서 소개한대로 일본 언론이라면 절대로 이런 식의 무리한 보도를 할 엄두를 못 낸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모든 집회 때마다 주최 측이 뻥튀기해서 주장하는 숫자를 언론이 앵무새처럼 그대로 따라할 것인가. 명분이 옳으면 수단의 정당성은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발상은 공멸을 부를 전체주의로 이끌 위험성이 높다.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