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떠난 포철⑭…측근들의 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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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떠난 포철⑭…측근들의 처신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3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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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엔 친구 몇명 남아 있지만 한국엔 한명도 없다”는 박태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한다. 갈대와 같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하는 힘으로 위대한 인류문화를 건설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상황논리에 빨리 적응하고 자신의 지조와 의리를 저버리기 쉬운 존재라는 그 반대의 논리도 성립한다.

권력의 변화에 따라 수많은 변절과 이합집산은 연약한 인간의 존재의 탓이리라. 상황의 논리에 지신의 인간관계를 변화시킬 때는 늘상 「살기 위해서」라는 생존논리를 내세운다.

세상이 변하고 만물이 변하는데 인간의 마음인들 변하지 않겠는가. 권력의 변화에 따라 자신들의 생존논리를 찾아나가는 것은 박태준사단, 즉 박태준의 옛측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동경의 박태준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격분시킨 것은 김영삼 정부쪽보다는 그의 사퇴 이후 등장한 포철의 신경영진의 처신이었다.

포철 신경영진은 포철내 박태준 인맥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을 상당수 내쫓다시피 사표를 받아냈고 포철 내에 남겨진 박 전회장의 흔적을 지우려고 들었다. 국제화란 미명아래 포철이란 이름을 바꾸려들었다.

박태준이 일본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할 때 불과 몇달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포철의 신임 경영진들은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신포스코운동」을 추진하면서 박태준 지우기 작업에 나섰다.

김영삼 정권 탄생과 함께 포철의 신경영진으로 등장한 권력실세는 조말수 사장, 조관행 김진주 이동춘 전무, 장중웅 상무등 5명이었다.

조말수 사장은 박태준의 비서생활을 10년 이상 했고, 민자당 대권경쟁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까지 󰡔박 회장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철저한 박태준 사람이었다. 그는 사장이 된후 포철에서 새겨진 박태준의 이미지를 지우고, 신한국 건설에 앞장서는 신포스코의 창조를 리드해 나갔다.

장 상무는 92년 대선정국에서 「박태준후보 옹립작전」의 핵심역할을 하려고 부단히도 움직였다. 그는 박태준의 사위가 만든 비밀사조직에 참여해 열성을 다하기도 했으나 박태준의 정치보좌라인이 최재욱 비서실장-조용경 보좌관의 라인으로 굳어지자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던 그도 조말수 사장의 측근이 되어 신포스코운동을 기획해 내고 신포스코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고, 실무를 맡아 박태준지우기 작업에 나섰던 것이다.

이른바 5인방중 세전무는 모두 포철 자회사에 근무하다가 조 사장에게 발탁돼 신한국 포철건설에 앞장섰다. 이들 모두 박태준에 의해 키워졌으나 70년대말 포철을 떠나 태완선씨가 주도한 제2제철로 한때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복귀, 자회사에 밀려나 있었다.

장중웅 상무와 세 전무 사이에는 개혁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포철의 현직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물러난 임원들도 박태준에게 일절 연락을 끊고, 그들의 삶을 살기에 급급했다. 그들이 연락을 끊은 이유는 새 정부에 더이상 밉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박태준이 싫어져서일수도 있다.

박태준과 함께 사퇴한 박득표 전사장, 이대공 전부사장등 이른바 박태준 사단의 로열패밀리 멤버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야 어떻든 그들이 표면적으로 박태준과 연락을 단절하고 있는 것은 신포스코의 경영진과 다를바 없는 일이었다.

박득표씨는 94년초 다시 포철사장이 될 수 없는지, 알아보려고 권력핵심에 타진하기고 했다. 이대공씨는 신경영진의 포철에서 강판을 구입해서 캔류 등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는 사업체를 세우려고 구상하기도 했다.

박씨와 이씨의 그러한 움직임은 보는 사람에 따라 새정부와 포철 신경영진과 손잡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해석이야 어떻든 그들은 박태준과 연락을 두절하고 여러가지 자기의 갈 길을 걸어가려고 한 것이다.

국내에 있는 포철의 전현직 임원들 가운데 동경을 찾아가 그를 접견한 사람은 2명 정도. 그와 함께 포철을 떠난 여상환 전부사장과 그의 정치담당 비서였던 조용경씨. 측근이라고 일컫던 포철맨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시대의 흐름에 합류하거나 그를 외면함으로써 시대에 거스르지 않으려 하고 있다.

박태준은 국내의 정치인, 경제인들과의 일체 접촉을 피한채 동경생활을 했는데, 민자당의 전현직의원 7~8명이 만나보겠다고 제의했으나 완곡히 거절했다. 어려운 처지에 처해 있는 자신을 만나 위로를 해주는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만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예의라며 그는 면담을 뿌리치곤 했다.

박태준은 자신의 외로움을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들(자신을 따르던 사람)이 제 앞에서 했던 말들이 기회주의적인 말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본에는 친구가 몇명 남아 있지만 한국에는 친구가 한명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죠. 내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얼굴을 내비치기는커녕 편지나 전화 한 통 없습니다.”

 

박태준이 물러나고 그의 사단이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때는 94년 3월 26일 토요일하오6시, 장소는 서울세종문화회관세종홀.

그무렵 포철에서 부사장을 지내다가 박태준과 함께 물러난 여상환씨가 「신바람, 이제 실천할 때입니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 책의 출판기념회는 자연스럽게 박태준사단의 모임이 됐다.

황경로 전회장이 초대장을 만들어 포철과 자회사의 전현직 임원들에게 돌리면서 참석을 권유했다.

이날 행사에는 3백여명이 모였다. 전직 임원으로 황경로 전회장, 박득표 전사장, 여상환 전부사장, 이대공 전부사장등이 참석했고 조용경씨가 미국에서의 공부를 앞당겨 이틀전에 귀국, 참석했다. 이한빈 박사가 게스트로 참석했다. 현직 임원들로는 조관행 부사장(당시는 부사장으로 승진했음), 김진주 전무등이 참석했다.

여상환씨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포철의 힘의 근원이었습니까. 여러가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좌절됨이 없이 어떻게 오늘날 세계 2~3위의 대제철소로서 포철의 성장이 가능했을까요.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지도자에 대한 깊은 신뢰, 「제철보국」이라는 일에 대한 보람, 사상초유의 성취욕이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지속적이며 효과적으로 관리한 장엄한 휴먼드라마였습니다.”

이날 출판기념회행사는 포철맨, 특히 박태준사단의 단합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새정부 들어 퇴색해진 포철정신의 다짐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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