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징용자들의 한 서려있는 홋카이도 오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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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징용자들의 한 서려있는 홋카이도 오타루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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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 광산에서 강제 노역…한국여성들의 자살 바위도 근처에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관문 신치토세(新千歳)공항에서 기차로 1시간여 가면 오타루(小樽)라는 소도시가 나온다. 동해에 맞닿아 있는 도시로, 인구는 13만명 정도. 서울과 경도 13도의 차이가 있어 한 시간의 시차가 나야 하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이 같은 시간대를 사용하므로, 오타루에선 서울보다 한시간 먼저 해가 뜨고 진다. 지금 계절에 오후 4시가 되면 어두워진다.

 

▲ 오타루 위치 /구글지도

 

오타루는 메이지(明治)유신(1968) 직후인 1872년 부두를 건설해 메이지 정부가 홋카이도 개척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도시다. 러시아가 연해주에서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다급해진 일본이 서둘러 홋카이도 개척에 나서면서 지은 항구도시다. 개척이라기보다 침략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150년전에 도시를 지었기 때문에 고픙스럽다. 곳곳에 근대회 초기의 일본 모습이 엿보인다.

메이지 이전까지만 해도 홋카이도는 아이누족의 생활터전이었다. 러시아가 사할린에 이어 홋카이도로 내려오자 일본은 무력으로 홋카이도를 점령한 것이다. 지명도 아이누족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아이누족은 그곳을 오타오르나이(모래사장 가운데의 하천)라고 불렀는데, 대화족(일본족)이 그 지명을 옮겨 오타루라고 했다고 한다.

오타루는 메이지 정부의 홋카이도 개척 교두보였고, 개척과 동시에 인근 이시카리(石狩)에서 탄전을 발견했다. 지금은 탄맥을 거의 채굴해 폐광이 되었지만,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오타리 항구에 파헤쳐놓은 운하와 채탄시설이 남아 관광명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 채탄장은 일제 시대에 조선의 광부들이 징용을 간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오타루항 운하 야경/위키피디아

 

한겨레신문 1990년 1월 4일자에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가 홋카이도를 다녀온후 쓴 르포기사가 실려 있다.

 

필자는 재작년 8월 두 번째로 홋카이도에 갔을 때 그곳에서 만난 일본 주민과 징용을 갔다가 살아남은 한국남성, 그리고 징용병의 아내(한국여성)들의 증언, 당시의 기록등을 통해 한국의 어린 딸들이 이미 1910년 무렵에 일본으로 갔다가 속아서 일본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를 상대로 매춘을 강요당했던 것임을 알수 있었다.

일본은 개항 이후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본 축적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에도 시대부터 시작한 홋카이도 개척, 러시아 전쟁에서 이겨 따낸 이권인 연해주 지방의 벌목, 그 연안의 어획, 그 시대의 에너지원인 채탄등에 필요한 노동력이 일본 남성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지자 일본은 1910년 조선을 합방하고 조선에서의 토지조사, 쌀증산계획과 함께 중국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인 노동자의 입국을 엄히 막던 1899년의 칙령을 폐지하였다.

<자치연 삿포로>에 의하면 1939년의 한국인 강제연행수는 일본 전역에 5만2천1백20명인데 1945년엔 1백51만1백4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략]

 

그들이 죽음의 길로 택한 곳이 ‘자살의 명소’가 되어버린 다치마쓰 미사키라는 절벽이다. 하코다테 YWCA의 소개로 필자의 안내를 맡아준 이케다 하루오와 함께 좁은 오르막길을 지나 다다른 절벽은 험하고 사나웠다. 태평양에서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부서지는 절벽 아래에는 파도가 할퀸 바위가 널려 있었다. 그 절벽에서 한번 떨어지면 살아남을 길은 없어 보인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어머니-, 어머니-”하고 울부짓는 소리로 들린다고 이케다가 전해주었다.

아시라가 보여준 1923년 12월 18일자 <하코다테 신문>에는 “가엾은 조선 미인의 죽음. 17세”라는 기사가 있었다. [중략]

1941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의 남녀 젊은이들을 더 많이 끌어갔다. 이중에 많은 여성들이 계속해서 자살했고, 신문은 계속해서 이 사실을 보도했다. 드디어 1943년 일본당국은 한국 여성의 자살을 기사화하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렸다. [중략]

 

1940년 1월 7일자 <오타루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유우비리탄광에는 7백4명의 반도인(조선인) 광부가 있다. “멀리 타향에서 국책산업에 종사하는 이들 전사를 위안하기 위해 이들이 오기전부터 일을 추진했으나 금번 협화료 근처에 3동을 개설하고 조선 향토요리점을 경영키로 했다는 것이다. <자치연 삿포로>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70년이 지난 지금, 오타루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그 곳 항구 운하에 한국인 징용자들의 땀이 흘렀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 일본은행 오타루 지점 /위키피디아

 

오타루는 홋카이도 제1의 상업항구인만큼 부두 근처엔 제관(製罐)·목재·고무·제분·식품 등의 공장들로 공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1880년 삿포로(札幌)와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어 삿포로의 외항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러시아의 사할린·프리모르스키(연해주)와의 교역도 성했다.

메이지 말기의 많은 건축물이 잘 보존돼 있다. 일본은행 지점도 있고, 주요은행 지점이 고풍스런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관광명소로는 오타루 특산품인 오르골과 유리 제품을 살 수 있는 공방이 있다. 그 앞에 증기시계가 있다. 만화 《미스터 초밥왕》의 무대로도 쓰였다.

석탄 채굴이 끊기고 오타루의 산업 활력은 삿포로에 뒤쳐졌다. 오타루 해안은 니세코샤코탄오타루(ニセコ積丹小樽) 해안 국정 공원으로 단애 절벽의 경승지이며 해수욕장 등이 있다. 오타루 공원 배후 구릉지에는 스키장이 많다.

 

▲ 오타루항 요트정박장 /사진=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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