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신용의 위기⑤…추락하는 미국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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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신용의 위기⑤…추락하는 미국 기업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2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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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회계감사회사, 증권회사, 은행, 신용평가기관 등 줄줄이 불신 받아

 

존스 홉킨스 대학의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교수는 그의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신고전학파의 시장 자유주의는 이제 대체할수 없는 경제이론으로 자리를 잡았다. 자유주의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로 확산됐다. 신고전학파의 이론은 80% 옳다. 그러나 나머지 20%의 진리는 바로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Trust)’다.”

1997년으로 되돌아가보자. 그해 7월 2일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발원한 아시아 금융위기의 태풍이 북상해 그해 겨울엔 한국을 집어삼켰다. 그때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타임스는 연일 1면 기사로 한국 정부와 기업, 금융 기관의 유착관계를 질타하면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회계 투명성을 높일 것을 요구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 재무부는 뉴욕 금융가의 이익을 대변해 한국이 경제개혁을 하지 않으면 인공호흡기(자금줄)를 떼버리겠다고 압박했다. 한국은 마지못해 회계제도와 기업지배구조 개선등 경제개혁을 약속하고, 500여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아 파산을 겨우 면할수 있었다.

그때 한국을 향해 쏟어부었던 ‘기업 지배구조’, ‘투명성’, ‘회계관행’등의 용어가 2002년 미국 언론을 도배했다. 이번엔 그 대상이 미국 기업이었다.

에너지 그룹 엔론의 파산 이후 많은 미국 기업들이 분식회계와 내부자거래, 탈세, 가격 담합, 주가조작등으로 미국 금융감독당국(SEC)의 조사를 받았다. 월드컴, 타이코, 엘파소, 아델피아, 제록스, 임클론, 머크에 이어 이젠 IBM과 제널럴 일렉트릭(GE), 제너럴 모터스(GM)등 미국의 간판 기업마저 회계 부정 루머로 시달렸다.

연이은 회계조작 사건으로 미국 경제는 심각한 ‘신용의 위기(confidence crisis)’에 빠졌다. 뉴욕 월가에는 “9·11 테러가 외부 세력에 의한 폭발(explosion)이라면, 엔론 사건으로 인한 신용의 위기는 내부의 폭발(implosion)”이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테러와 전쟁의 와중에 2002년 여름까지 거의 매일같이 터져 나온 기업인과 금융인의 화이트컬러 범죄가 미국 경제와 금융시장에 치명적이었다는 뜻이다. 그동안 기업 범죄 문제를 언급하지 않던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뉴욕에 와서 강경 대응방침을 밝혀 미국 기업과 금융계가 병들어 있음을 반증했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 /위키피디아

 

엔론 파산이 가져온 가장 큰 문제는 기업과 회계감사회사, 증권회사, 은행, 신용평가기관등 미국 신용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그룹들이 집단으로 불신받았다는 점이다. ‘신용의 위기’가 확산되면서 회복의 징조를 보이고 있는 미국 경제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엔론 주가는 잘나갈 때 주당 90달러까지 치솟았지만, 회계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급락해 1달러 이하의 휴지조작으로 변해버렸다. 스톡옵션으로 자사 주식을 배당받았던 엔론 직원은 물론 401(k) 연금 포트폴리오로 엔론 주식을 샀던 투자자들도 하루아침에 거액의 재산을 날렸다.

분식회계에 대한 우려는 엔론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 회계법인의 양심이라고 자처하던 아더 앤더슨마저 회계조작에 가담, 서류를 파괴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투자자들은 믿을데가 없어진 셈이다. 조금만 회계에 이상이 있다고 의심이 제기되고 있는 회사의 주식은 곧바로 투매 대상이 되는 현상이 열병처럼 번졌다.

한때 우량종목으로 인기를 끌던 기업들이 줄줄이 분식 회계를 했다는 의심이 제기되고, 주가가 폭락했다. 외국회사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아일랜드의 엘란이라는 제약회사도 회계 조작 루머에 휘말려 뉴욕 증시에 상장돼 있는 DR(예탁증서) 가격이 폭락했다.

미국인들 가운데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은 지난 1990년대에 급증, 1억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들은 노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봉급의 일부를 꼬박꼬박 주식시장에 부어넣었고, 주식투자 대중화로 조성된 수조달러의 자금이 지난 10년간의 뉴욕증시 상승을 이끌었다. 그런데 문제는 엔론 사건으로 인해 1990년대 주가 상승을 이끌었던 월가가 미국인의 절반에 해당하는 투자자 군단으로부터 심한 불신을 받았다는 것이다.

미국 최대은행인 시티그룹과 체이스 맨해튼은행, 최대 증권사인 메릴린치도 엔론에 돈을 빌려준 경위를 의회에 나가 해명했다. 신용등급이라는 무기로 아시아나 중남미의 한 국가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 넣었던 무디스나 S&P등 신용평가회사도 엔론의 투자등급을 제때 조정하지 못한 이유로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2001년 11월 엔론이 파산보호를 신청했는데도 월가의 애널리스트 11명 가운데 8명이 엔론 주식을 추천했으니, 누가 애널리스트를 믿겠는가.

엔론에서 시작된 화이트컬러 범죄는 1990년대의 장기 호황의 산물이다. 10년동안 주가가 상승하는 과정에서 최고경영자(CEO)들은 엄청난 스톡옵션을 챙겼고, 그 부를 불리기 위해 뉴욕 금융가와 유착관계를 맺었다. 주가를 부풀리기 위해 회계를 조작하고, 이를 아더 앤더슨과 같은 회계회사가 도와줬다. 월가는 기업 상장(IPO)에서 돈을 벌기 위해 기업의 부정적 뉴스를 가급적 가리며 투자자를 유혹했고, 그 빙산의 일각이 메릴린치의 애널리스트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돈을 번 사람은 기업 경영진과 금융인이었고, 손해를 본 사람은 선량한 투자자와 근로자였다.

미국의 기업 범죄는 1929년 대공황 이래 최대 규모였다. 대공황때에는 당시 금융계의 황제 JP 모건 가문의 주가 조작 사건을 비롯, 대형 금융사고가 연이어 터지면서 증시가 장기침체에 빠졌고, 경제가 10년 이상 가라앉았다. 대공황은 2차 대전이 터지면서 전쟁 특수에 의해 가까스로 해결됐을 뿐이다.

역사 흐름을 좇아 뉴욕 증시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은 현재의 주가가 거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S&P500 지수를 구성하는 블루칩의 현재 주가수익률(PER)은 10년 전에 비해 3배 이상 높고, 1929년 대공황 발생 직전보다 2배 가까이 높은 수준이다. 엔론 파장이 걷잡을수 없이 확산되고, 월가의 신뢰를 무너뜨리면서 뉴욕증시의 거품이 꺼뜨렸다. 테러 공격으로 잿더미가 됐을 때 애국심으로 무장한 자신감으로 일어섰던 뉴욕 월가는 이제 내부의 투자자들에 의해 불신받는 홍역을 앓았던 것이다

후쿠야마 교수의 지론을 빌리자면, 미국 자본주의가 세계 지배에 성공했지만, 이제 나머지 20%인 신뢰의 문제로 기우뚱거리고 있다. 이 20%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80%의 미국 시장 경제가 통째로 붕괴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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