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떠난 포철⑬…東京 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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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떠난 포철⑬…東京 체류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2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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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조사 발표와 검찰 수사로 박태준, 일본에 장기 체류

 

1993년 3월초 출국해 일본 동경에서 장기체류하던 박태준은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발표와 검찰의 수사 소식을 듣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극도의 쇄약상태에 빠졌다. 이 무렵 국내증권가에서는 박 전회장이 자살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측근들이 나서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다.

그는 동경에서 장기간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언젠가 때가 되면 철강인으로 되돌아가고 싶은데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포철의 후임경영자들이 포철 내에 산재한 자신의 이력을 난도질 할 때 창업자로서 가슴 아팠던 것도 포철에 대한 그의 애정에 대한 반증이었다.

그는 동경에서도 철강인으로서의 국제적 흐름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일본의 철강회사인 신일철로부터 세계철강업계에 관한 정보를 입수, 국제적 흐름을 짚어나갔으며, 포철의 세세한 움직임에도 늘 관심있게 지켜 보았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병원에 입원한 후 바로 전체검사를 받았다. 그는 명예회장 시절인 1월말 장기외유에서 돌아오기 직전에 일본동경 시내 한 외과의원에서 지병인 치질 수술을 한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직경 8~9cm크기의 종양이 왼쪽 흉부와 복부 사이에 생겨났음이 발견됐었다.

또다시 포철명예 회장직 사표를 내고 동경에 머물면서 CT 촬영을 한 결과 가슴과 늑막사이에 주먹만한 물방울이 발견됐다. 그래서 병원을 세 군데나 돌아다니며 정밀검사를 받아야 했다. 결핵균이 침투했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치유된 후 덩어리로 남아 있다가 악성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의 증세가 악성이냐, 양성이냐를 규명하는데 세달이나 난리를 떨어야 했다. 그 때문에 국내에는 그가 암으로 입원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어쨋든 박태준은 동경여자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겨 내과전문의들로부터 정밀하기로 소문난 MRR촬영까지 마쳤다. 그는 지병치료에 따른 체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세무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심각한 정신적 괴로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밤에 자다가도 갑자기 깨어나 “여기가 어디지. 왜 내가 여기와 있어” 하면서 중얼거린뒤 잠들기도 했다. 그러는 바람에 부인 장옥자 여사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병구완을 해야 했다.

박태준이 아무리 일본통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은 역시 그에게는 남의 나라임에 분명하다. 박태준이라고 타국살이가 어렵지 않을 수 없는 법. 그러나 그가 포철 회장과 민자당 최고위원을 하면서 사귄 일본정재계의 인사들이 그의 일본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 총리를 지낸 나카소네, 미야자와, 다케시타씨등이 그를 도와줬고, 우리에게는 「불모지대」라는 소설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세지마 류조(懶島龍三) 이토추상사 고문이 그의 생활비를 도와줬다. 일본의 어느 재계인사는 개인돈으로 그의 동경생활비와 병원비를 도와준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회장은 동경시내 중심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14평에 방이 2개인 월세아파트에서 부인 장옥자씨와 아들 성빈군과 함께 지냈다. 아들 성빈군은 미국 MIT공대를 나와 이 대학 경영대학원을 1년반쯤 다니다 일본의 한 기업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다.

부인 장여사는 박전회장의 병구완을 하랴, 1년여 까다로운 그의 식성과 성미에 비위를 맞추느라 얼마전부터는 자신이 무척 수척해지고 병이 났고, 그래서 94년 여름 그는 딸이 거처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박 전회장의 또다른 고민은 가족문제. 그는 경남양산의 박씨 생가에 나이 아흔에 가까운 노모(김소순 여사)가 있는데, 박태준이 일본에 체류할 때 노모의 병세가 악화됐다. 노모는 연세도 연세지만 고혈압과 심장병으로 몇번이나 위독한 순간을 넘겼다. 박 전회장은 병약한 노모의 문병을 위해 귀국을 희망했지만 그는 탈세와 뇌물수수혐의로 귀국 즉시 사법처리되기 때문에 귀국을 할수 없었다.

노모 김씨는 한때 “내아들을 만나기 전에 숟가락을 안 들겠다”며 단식에 돌입, 주위사람들의 애를 태웠다. 이같은 소식을 듣고도 아들 박태준은 귀국하지 못학도 며느리인 장여사가 급히 귀국, 시어머니께 달려갔다. 그녀는 눈물로 호소했다.

“이렇게 굶으신다면 애비의 처지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애비를 보고 싶으신다면 진지를 많이 드시고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합니다.”

모친에 대한 박회장의 효심은 대한하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그러나 사정이 사정인지라 1주일에 한번씩 노모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문안인사를 드릴 뿐이다. 그는 노모와의 통화에서 그만 목이 메어 통화중간에 전화기를 그만 내려 놓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 장성한 아들 성빈군의 혼인에 신경을 쓰고 있으나 동경에 나와 있는 몸으로 그 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박태준은 국내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중국의 수도강철그룹과 북경과학기술대에서 추대한 종신고문직은 갖고 있었다. 93년말 중국에서 경제와 철강산업에 대한 그의 견식을 높이 인정, 그의 중국방문을 정중히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정부차원의 대중국외교와 한국철강산업과의 이해관계 등을 고려, 완곡히 거절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정치적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당장이라도 귀국, 일정기간 감옥생활을 하더라도 재기의 기회를 노린다고 하지만 정치는 이제 신물이 났다고 말하곤 했다.

 

여권일각에서는 박 회장의 신변처리문제를 풀기 위해 그에 대한 법적 제재를 누그러뜨려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었다.

김도언 검찰총장은 93년 가을 국회법사위 대검찰청감사에서 답변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박 전회장의 구속등 사법처리부분은 그가 귀국하는대로 혐의내용을 조사한뒤 정상을 참작해서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화해와 청산이라는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연설을 참조할 것이다.”

또 민자당 정세분석위의 문건에서도 박태준씨 문제를 화합차원에서 접근한 적이 있다. 거기서는 정세분석위는 박씨를 조기귀국시키는 쪽으로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

내용인즉 박태준전최고위원의 노모가 위독해 그의 귀국문제가 언론에서 거론되고 있는만큼 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고위층에서는 이런 건의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동안 줄곧 동경에 머물고 있던 박태준은 93년 11월 중순 잠시 홍콩을 다녀왔다. 자신의 66회생일에 맞추어 그곳에 사는 막내딸 경아씨 부부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경아씨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차남 재용씨와 이혼한지 2년만에 재혼, 옥동자를 낳았다. 남편은 하버드대 경영학박사출신으로 미국의 유력중권회사인 골드만 삭스 홍콩부지점장을 맡아 93년 여름부터 홍콩에 살고 있었다. 박전회장은 막내딸인 경아가 자신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이혼이라는 상처를 입은게 아닌가 하는 부담을 늘 지니고 있었고, 외손자를 안아보고서야 그런 생각을 털어낼수 있었다고 한다.

박태준은 자신이 정치에 몸담았던 3년간에 있었던 일들에 관한 회고록을 쓰고싶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 집필을 보류했다.

그는 경제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처한 입장을 이렇게 표현,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기업을 오너의입장에서 발전시킨 사람, 전문경영인의 입장에서 발전시킨 사람이 있는데 내가 후자의 대표적인 사람이죠. 전자에는 이병철씨와 정주영씨가 있습니다. 정주영씨의 경우 기업을 하다 손수 당을 만드로 했지만 저는 기업도 정치도 고용당했던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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