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흑인왕자의 금지된 사랑과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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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흑인왕자의 금지된 사랑과 독립운동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21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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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츠와나 케레체 카마와 백인여성의 러브스토리…독립후 경제발전 주력

 

93세의 고령의 나이에도 37년간 장기집권한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질하는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을 추적하다가 바로 이웃나라 보츠와나(Botswana)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면적 58만㎢로 우리나라(남한)의 6배나 넓지만, 인구가 고작 220만이다. 칼라하리 사막이 이 나라 대부분을 차지해 인구밀도가 극히 적고, 영화로 잘 알려진 부시맨의 나라다. 영화 『부시맨』은 미개한 토착인을 코미디화했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나라 사람들이 너무나 훌륭하다는 느낌이 든다. 더욱이 영국에서 독립한 후 초대대통령이 된 세레체 카마(Seretse Khama)가 보여준 세기의 러브스토리는 드라마틱한 감동을 준다. 사랑은 국경과 인종을 넘어선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그의 사랑이야기는 이 사막의 나라를 독립으로 이끌고,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을 살만한 곳으로 끌어올렸다.

 

▲ 보츠와나 위치 /구글지도

 

세레체 카마는 1821년 바망와토(Bamangwato)족의 왕자로 태어난다. 당시 보츠와나는 베추아날랜드(Bechuanaland)라는 이름의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부족장(왕)이 통치하는 자치국으로, 영국이 외교권을 갖는 형태였다.

4살 되던해 부왕이 죽고 카마는 코씨(Kgosi, 부족장=왕)가 되고, 삼촌 체케디 카마(Tshekedi Khama)가 섭정이 되었다. 그는 부족의 통치를 삼촌에게 맡기고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영국식 교육을 받았다.

▲ 세레체 카마 보츠와나 전 대통령/위키피디아

26살 되던 해인 1947년 그는 한 선교회 댄스파티에서 두 살 아래 영국여인 루스 윌리엄스(Ruth Williams)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영국 육군 출신인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당시 로이드 보험에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1년의 연애기간을 거쳐 둘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의 청혼 소식은 영국은 물론 아프리카를 뒤흔들었다. 아무리 왕자라고 하더라도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당시로선 받아들일수 없는 일이었다.

흑인 왕자와 백인 보통여성의 결혼은 신데렐라의 꿈은 아니었다. 루스의 가족들은 반대했다. 군인 출신인 아버지는 흑인 남성과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영국 상류층에서도 노골적으로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커플은 런던 사회의 부정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카마의 부족에서 거센 반발이 터져나왔다. 원로들은 왕이 바망와토의 여인과 결혼하는 게 원칙이라며 백인 여성과의 결혼을 거세가 반대했다. 국내에서 섭정을 맡고 있던 삼촌 체케디는 조카에게 당장 귀국해 결혼 무효를 선언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 간신히 부족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세레체 카마는 부족장 회의에서 왕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부인 루스도 베추날랜드로 돌아와 남편과 여행을 하며 백인 왕비로의 지지를 얻어냈다. 카마는 부족원들의 이해를 구한 다음 남은 공부를 마치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갔다.

 

이것으로 문제가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이웃의 영국령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반발하면서 국제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당시 남아프리카는 인종차별의 아파르트헤이트(the apartheid)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감히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과 결혼하디니….”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는 있을수 없는 일이 북쪽 흑인부족에서 발생한 것이다.

당시 베추날랜드는 영국의 보호령(protectorate)이었고, 식민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가 직접 개입할 근거는 없었다. 대신에 본국인 영국에 카마의 결혼을 무효화하기 위해 부족장 지위를 박탈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당시 영국엔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 내각이 물러나고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총리의 노동당 내각이 집권하고 있었다. 노동당 정권은 보수당에 비해 인종 정책과 식민지 정책에 전향적이었지만, 애틀리 정부는 2차 대전 직후의 심각한 전쟁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남아공의 금과 다이아몬드가 필요했다. 노동당 정권은 흑백 부부의 결혼을 허용하라는 진보주의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카마의 부족장 지위에 대한 심사를 실시했다.

영국 의회의 심사 결과는 카마에게 유리했다. “둘의 결혼은 불행하지만” 카마의 부족장 지위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틀리 정부는 이 심사결과도 무시하며 카마의 부족장 지위를 박탈하고 베추날랜드에서의 추방을 명령했다. 1951년의 일이다.

 

▲ 세레체 카마와 루스 윌리엄스 부부가 자녀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데일리메일

 

카마 부부는 베추날랜드에서 추방돼 영국으로 갔다. 하지만 애틀리 정부의 결정에 베추날랜드는 물론 영국 내에서도 거센 항의가 제기되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에도 인종차별정책을 버리지 않았다는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영국정부는 마지못해 카마 부부에 대해 개인적 목적에 한해 베추날랜드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락했다. 1956년 부부는 칼라하리 사막으로 돌아왔다. 카마는 부족장의 왕관을 버리고 목장을 운영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결혼과 추방 과정을 통해 독립의 절실함을 느꼈다. 1961년 카마는 베추날랜드 민주당을 창당했다. 1965년 실시된 총선에서 그의 정당은 사회당 좌파를 누르고 압승했고, 그는 영국 보호령 아래에서 베추날랜드 총리가 되었다. 그해 헌법을 제정하고 이듬해인 1966년 카마는 나라 이름을 보츠와나로 바꿔 독립을 선포했다.

그는 새 헌법에 따라 자동적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1980년 임종시까지 보츠와나 대통령으로 일했다. 1966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카마에게 대영제국의 기사작위를 하사했다.

(그의 러브스토리는 2016년 엠마 아산테 감독에 의해 『어 유나이티드 킹덤』(A Uited Kingdom)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가장 먼저 할 일은 경제건설이었다. 신생 보츠와나에는 바다도 없고 농사지을 땅도 없었다. 그야말로 앞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황무지였다. 독립당시 포장도로가 고작 12km, 1인당 평균소득 60달러로, 병원은커녕 학교조차 없었다.

▲ 이언 카마 보츠와나 현 대통령 /위키피디아

그는 유엔 개발자금 등 외자를 끌어와 학교와 병원을 짓고, 관계시설을 만들고 농업기술을 개량했다. 운좋게도 1969년에 남부 국경지대에 다이아몬드 광맥이 발견돼 재원을 보충할수 있었다. 보츠와나는 이제 아프리카 중위권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의 맏아들 이언 카마(Ian Khama)도 정치에 뛰어들어 국방장관, 부통령에 이어 2008년 대통령에 취임해 현재 3연임하고 있다.

이 나라에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하여 종족간 갈등이 거의 없고 민주주의 제도가 발전되어 이웃나라의 무가베와 같은 독재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은 경제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초대 대통령이 나라의 길을 잘 닦아 놓은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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