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싸인 가락국 오백년 왕궁터, 어디일까
상태바
베일에 싸인 가락국 오백년 왕궁터, 어디일까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21 13: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봉황동 추정지에서 70여차례 발굴조사 불구, 왕궁터 입증 증거 나오지 않아

 

가락국의 왕궁은 어디일까. 이 미스터리를 찾기 위해 고고학자들이 김해의 가락국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을 70여차례나 파헤쳤다.

▲ 봉황동 유적에서 발굴된 통형기대. /문화재청 제공

물론 발굴조사에서 많은 성과가 있었다. 건물터와 토성, 접안시설등의 유적이 나왔고, 토기와 토우, 각배등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가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은 허다하게 발견되었는데, 딱히 왕궁터임을 입증할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발굴은 문화재청 산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올해 3월부터 실시한 발굴조사에서도 많은 가야 유구와 유물을 발굴했다. 연구소는 김해시 봉황동 312(회현동 주민센터 앞)를 가락국 왕궁터로 추정하고 있다.

올해 발굴조사에서는 왕궁추정지 동쪽을 파헤쳐 가야 시대의 것으로 확인되는 건물터를 무더기로 찾아내고 화로형 토기, 가야 시기 대형 건물지군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또 ▲ 화로로 쓰던 토기, 통형기대(筒形器臺, 긴 원통을 세워둔 모양의 그릇받침), 각배(角杯, 뿔 모양 잔), 토우 등 의례용 유물들을 다수 발견했다.

하지만 이들 유구와 유물은 김해 대성동 고분이나 고령 대가야 고분에서 지금껏 발견된 것들과 비슷하다. 가야의 수장급들이 쓰던 집터나 물건으로, 굳이 왕궁터라고 입증할만한 것들이 못되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도 “당시 유력계층의 흔적”이라고만 했을뿐 “가야의 왕궁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고 밝혔다. 가야문화재연구소는 그곳에서 상위 계층의 유구와 유물이 계속 발견되고 있으므로, 앞으로 왕궁터 추정지를 더 파볼 계획이다.

 

▲ 김해 봉황동 유적 조사구역 (북쪽에서) /문화재청 제공

 

그러면 가락국, 즉 금관가야의 왕궁터는 어디란 말인가. 지금 헛다리를 짚고 엉뚱한 곳에서 발굴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금관가야를 멸망시킨 장군은 신라 법흥왕때 이사부(異斯夫) 장군이다. 그 사실은 우리 역사서에는 나오지 않고 『일본서기』에 나온다.

일본서기 계체천황 23년(서기 529년, 법흥왕 16년) 기록을 보자.

 

“상신(이사부)이 4개의 촌[금관(金官), 배벌(背伐), 안다(安多), 위타(委陀)가 4개 촌이다. 다른 곳에서는 다다라(多多羅), 수나라(須那羅), 화다(和多), 비지(費智)를 4개 촌이라 했다.]을 초략(抄掠)하고 그곳의 백성들을 모두 데리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갔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국 멸망시기를 법흥왕 19년(532년)이라고 했다.

 

“법흥왕 19년(532년),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등 세 아들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했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가락국 멸망 3년전에 이사부가 침공해 금관가야와 본거지를 거의 빼앗고, 주민 대부분을 끌고 가고, 임금만 남겨두었다. 마지막왕 구해는 3년후에 신라에 나라를 들어 바치고 경주에서 상대등이라는 허울만 남은 벼슬을 받아 살아가게 된다. 주민은 모두 끌려가고 임금은 적의 수도에서 생활했으니, 가락국 왕궁은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그후 1,5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터의 위치조차도 실종된 것이다.

 

아직도 금관가야 5백년의 왕궁지를 찾지 못하는 것은 도읍지와 궁궐에 관한 기록이 극히 드믈고, 그마저 애매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초대임금 수로왕이 궁궐을 짓는 기록이 나온다.

 

“(수로왕이) 왕위에 올랐다. [중략] 임시로 궁궐을 짓고 살았는데, 검소한 것을 바랄 뿐이어서 이엉의 끝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만든 계단도 3자밖에 되지 않았다.”

“즉위 2년 봄 정월에 왕이 말하였다. “짐이 수도를 정하려고 한다.”

그리고는 임시로 지은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이것은 옛날부터 묵혀 오던 밭인데, 새로 경작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답(畓)은 속문(俗文)이다.]으로 나아가 사방의 산악들을 바라보다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곳은 땅이 좁아 여뀌잎 같지만, 지세가 빼어나고 특이하여 16나한(羅漢)이 살만한 곳이다. 하물며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칠을 이루니, 일곱 분의 성인이 머물 땅으로 여기가 참으로 적합하다. 이 땅을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1,500보 둘레의 외곽성을 쌓고 궁궐과 전각,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고, 창고 등의 터를 정한 뒤,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인부와 장인들을 징발하여, 그 달 20일에 성을 쌓아서 3월 10일이 되어 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궁궐과 여러 집들은 농한기를 기다려서 지었으니, 그 해 10월에 시작해서 갑진년(서기 44) 2월에 완성하였다. 좋은 날을 받아 새 궁궐에 들어가서 모든 정사를 처리하고 여러 업무도 부지런히 처리하였다.

 

가락국기에 왕궁터로 지적한 신답평은 구체적인 지명이 아니라, ‘새로 경작한 농토’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다. 이 기록으로는 왕궁터의 위치를 비정하기 쉽지 않다.

그러면 신답평은 어디일까. 수로왕이 지은 임시궁궐은 구지봉과 대성동 고분 사이일 것이라는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따라서 가락국 5백년의 왕궁터는 그 남쪽, 지금의 회현리(會峴里)가 될 것으로 많은 이들이 추정하고 있다.

1899년 발생된 김해군읍지 고적(古蹟)조에는 "수로왕궁지는 지금의 (김해)부 내에 있다고 전해지며, 고궁지는 서문 밖 호현리(狐峴里)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회현리 일대를 금관가야 왕궁터로 보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왕궁터추정지에서 금관가야의 왕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른 곳에 왕궁이 있었지 않을까 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일설에는 김해시 동상동 874-9 일대에 있는 가락국의 마지막 궁궐터라고 알려져 있다.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이 봉황동에 있던 본궁에서 동상동으로 왕궁을 옮겼다고 하며 그때의 내궁(內宮) 자리가 바로 이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또한 근거는 없다.

지금 동상동에 있는 연화사라는 절에는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라고 새긴 자연석 비표만 서있다. 높이 1.9m, 너비 90㎝, 두께 30㎝의 이 비는 서기 1928에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어, 사료로서 근거는 희박하다.

 

▲ 1. 봉황동 출토유물 2, 김해지역 툴토 기미인물형 토기 3. 봉황동 출토 유물 /문화재청 제공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