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⑥…체코 군단 무기로 승리한 청산리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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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⑥…체코 군단 무기로 승리한 청산리대첩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20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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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인들, 식민지 민족에 연민…볼셰비키 배신으로 자유시 참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항일 독립군들에게 최선의 방법은 최신 무기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었다. 1910년 나라가 없어지자 독립지사들은 중국 땅인 만주로, 러시아 땅인 연해주로 가서 독립군 부대를 만들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무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1920년 10월 빛나는 청산리 대첩의 승리는 우리 독립군이 러시아혁명 내전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해온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으로부터 다양한 최신 무기를 구했기 때문에 이뤄낸 쾌거였다.

 

러시아혁명 내전 과정(1919~1922)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역할은 유명하다. 그들은 1916년 5월 우랄산맥 도시 첼랴빈스크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볼셰비키와 싸우면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이동하며 귀국길을 준비했다. 첫부대가 그해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해 마지막 부대가 도착하는 1920년 9월까지 블라디보스톡에 체류했다. 그들은 열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에 체류하면서 신문을 발행했다.

그 신문이 『덴니크』(Dennik)다. 90년후인 2011년 야로슬라브 올샤 2세 주한 체코 대사가 프라하 도서관과 고서점을 찾아다니며 수집한 한국관련 자료들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그의 수집품 중에는 체코 군단이 발간한 덴니크 원본도 포함되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발간된 덴니크 1920년 3월 7일자에는 체코 군단이 한국독립투사들 사이에 비밀스런 무기 거래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 무기가 만주에 산재해 있던 우리 독립군에 전해져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10여회의 전투를 통해 독립군 2,500명이 일본군 5만 병력을 맞아 3,300명을 죽인 청산리 대첩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청산리 대첩의 주인공 이범석(李範奭) 대장은 자신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독립군 무기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서 구입했다는 사실을 회고했다.

“블라디보스톡항에서 서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제국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기로 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다. 이러한 무기들은 우리 진영으로 옮겨져 숲속에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 모신나강(M1891) 소총 /위키피디아

 

이 무렵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일본군은 동맹 관계에서 대립 관계로 변해 있었다. 1920년 초 체코 군단은 러시아 백군의 지도자 알렉산드르 콜차크를 체포해 볼셰비키에 넘겨주었고, 콜차크가 이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체코 군단의 귀국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7만명이나 시베리아에 파병하고 백군을 지원했는데, 체코 군단이 볼셰비키와 손잡고 백군에 등을 돌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간의 진영이 뒤바뀌었다. 일본은 더 이상 체코군의 귀국을 돕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일본은 체코군이 대량의 무기를 한국 독립군에 넘겨주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일본은 러시아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체코 군단이 볼셰비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았고, 당시 블라디보스톡은 백군들이 마지막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체코 군단에서 구입한 무기를 수송하는 작전의 책임자는 김좌진(金佐鎭)과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에서 활약하던 이우석(李雨錫)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 작전에 동원된 한국인은 230명이었고, 200정의 권총과 기관총, 탄약을 옮겼다”고 회고했다.

 

▲ 러시아 내전의 체코슬로바키아군단 /위키피디아

 

그러면 체코 군단은 왜 무기를 한국 독립군들에게 넘겼을까. 그 첫째는 더 이상 무기가 필요없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강대국에 의해 식민지가 된 한국에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북로군정서 지휘관이었던 이범석은 체코 군단에 무기를 달라고 하면서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당신들처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들이오”라고 했고,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 제국 식민 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리면서 연민을 표시했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1918년말 1차 대전이 종전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했고, 체코 군단이 돌아갈 땐 더 이상 무기를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 라돌라 가이다 장군 /위키피디아

체코 군단의 총지휘자 라돌라 가이다(Radola Gajda) 장군이 1920년초 귀국하기 앞서 그의 부대가 보유 무기 일부를 우리 독립군에 팔도록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때 독립군이 구매한 무기의 상당수는 미국제였다. 1차 대전때 제정러시아는 육군을 모신나강(M1891) 소총으로 무장했는데, 러시아 산업능력으로 충분히 생산할 수 없어 미국에 발주했다. 차르(황제)군에 소속된 체코 군단은 이 무기로 무장했고, 한국 독립군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러시아 무기를 들고 일본군을 물리쳤다.

당시 독립군이 체코군단에서 사들인 무기는 소총 1,200정, 기관총 6정, 탄약 80만발, 박격포 2문, 권총과 다량의 수류탄 등이었다. 체코 군단에서 사들은 무기는 암시장에서보다 상대적으로 쌌다는 평가다.

▲ 최재형 선생 /국가보훈처 사이트

무기구매에는 민족의 정성이 들어갔다. 나중에 체코 골동품 시장에는 종종 금비녀, 금반지, 비단보자기 등이 나왔다고 한다. 아마도 선조들이 총 한 자루라도 더 사기 위해 금붙이들을 요강에 숨겨서 가져갔던 것이 체코 병사들에게 넘어가 보관하던 것이리라.

항일 독립군들은 총 한 자루에 한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을 정도로 무기 조달에 최선을 다했다. 조국에서 금반지며 금비녀를 팔아 한푼 두푼 모은 돈을 모두 무기 사는데 썼다고 한다. 당시 체코 군단과의 무기거래협상에는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를 이끌던 최재형(崔才亨)이 나섰다고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블라디보스톡에 이주해 선원, 무기공장 노동자로 고생한 끝에 군수산업으로 돈을 벌어 안중근 의사를 후원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선생은 1920년 4월 일본군에 피살돼 순국했다.

 

▲ 모산나강 소총으로 무장한 1차대전시 러시아 황제군 /위키피디아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독립군 근거지를 없애려고 갖은 시도를 다하였다. 독립군은 물론 만주에 사는 조선인 양민 학살, 조선인 학교 방화 등은 물론이고, 간도에서는 무려 3,600여 조선인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 독립군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와 만주 국경으로 집결했다가 다시 볼셰비키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볼셰비키 적군은 치타에 수도를 둔 극동공화국을 수립하며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동진했다. 볼셰비키는 극동의 알렉세예프스크(Alexeyevsk)를 점령했다. 알렉서예프스크는 황족의 이름을 딴 도시명이었으므로,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어로 ‘자유’라는 뜻으로 스보도니(Svobodny)로 바꾸고 해방구라고 선전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이 도시의 이름을 자유시(自由市)라고 불렀다.

 

▲ 자유시 위치 /그래픽=김송현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들은 일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령의 자유시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때까지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톡은 백군 지역으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적(敵)의 적은 아군이라고 했다. 독립군의 적은 일본이었고, 일본군의 적은 볼셰비키였기에 독립군은 그들이 도와줄 것으로 믿었다.

1921년 3월부터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군들은 거의 다 자유시로 이동했다. 대한독립군은 만주와 연해주에 산재하던 10개 무장단체들을 합친 것으로, 3,500명의 전투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유시에서 합류한 독립군들 사이에 군권 장악을 위한 권력투쟁이 발생했다. 우리 독립군의 분열도 문제였지만, 소비에트 정권의 태도는 더 큰 문제였다. 그들은 자국 국경내에서 무장한 외국인 부대를 원하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무장봉기로 혁명이 뒤엎어질 가능성도 보았던 그들이었다.

볼셰비키 정부의 요구는 독립군이 자신들의 휘하에 들어올 것, 그리고 무장해제를 할 것 등이었다. 곧 체코 군단의 마지막 부대가 블라디보스톡을 떠나면 일본군도 철군하고, 그러면 백군을 완전히 소탕할수 있는 시기에 볼셰비키들은 자유시에 대규모의 외국인 무장병력이 집결한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1년 6월27일 자유시의 독립군을 무장해제 시키기로 결정하고 포위했다. 독립군은 이 요구를 무시했다. 적군의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로 자유시에 모였던 대한독립군의 핵심세력이 와해되었다.

이를 ‘자유시사변’ 또는 ‘흑하(黑河) 사변’이라고도 한다. 이때 대한독립군 272명이 죽고 250명이 실종되고, 917명이 포로로 잡혔다. 대한독립군 대장 서일(徐一)은 그후 자결, 순국했다.

자유시 참변을 통해 소비에트 정권의 소수민족에 대한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볼셰비키 혁명정부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대한독립군을 와해시킴으로서 극동시베리아 지역에서 통치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백군과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 독립군을 철저히 이용했지만,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된 순간 그 군사력이 부담스러워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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