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바브웨는 광산업자 세실 로즈의 회사 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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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는 광산업자 세실 로즈의 회사 부지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1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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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와 금 채굴 위해 개척…백인 정부 독립후 흑인 반군에 권력 이양

 

짐바브웨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세계 3대 폭포의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가 있고, 한때 영국 식민지로 로디지아(Rhodesia)라고 불리웠던 나라,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전설적인 골프선수 닉 프라이스(Nick Price)의 나라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 보다는 37년간이나 장기 집권하다가 궁정반란 성격의 쿠데타에 의해 쫓겨나게 된 93세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의 나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러면 짐바브웨라는 나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아보자.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몰려오기 이전에 그 땅은 쇼나(Shona)족과 은데벨레(Ndebele)족이 차례로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드디어 영국인이 나타났다. 1851년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 잠베지(Zambezi)강을 탐험하고, 1855년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당시 유럽인들의 탐험대는 현대식 총으로 무장한 인간 사냥꾼들이었다. 리빙스턴의 탐험은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져주었다.

▲ 세실 로즈 /위키피디아

그다음 나타난 자는 영국의 대표적인 제국주의자로 알려진 세실 로즈(Cecil John Rhodes)다. 그는 광산업의 대부이자, 장사꾼이었다. 1853년에 영국에서 지주출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건강이 좋지 않아 따듯한 남아프리카로 요양을 갔다. 목화 농장을 운영하던 형의 집으로 요양을 하던 그는 농사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다이아몬드 광산에 눈을 돌린다.

마침 1871년 남아프리카 킴벌리 지역에서 요하네스와 디데릭 드비어 형제가 자신들의 농지에서 83.5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발견했고, 이후 많은 광산업자들이 다이아몬드 채굴을 위해 킴벌리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18살이던 세실 로즈도 작은 회사를 차려 광산업자들에게 물을 공급하며 많은 이윤을 남겼다.

1888년 세실 로즈는 당대 유럽을 휘어잡고 있던 유태계 금융가문인 로스차일드(Rothschild)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킴벌리 지역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인수해 나갔다. 그는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기 위해 경쟁업체였던 바나토 다이아몬드 광산회사를 통합해 드비어스 광산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가 오늘날 국제다이아몬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드비어스(De Beers) 브랜드의 시초다.

로즈는 다이아몬드 사업을 바탕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영국의 케이프 식민정부 의원, 재무장관이 되었고, 1890년에는 케이프 식민정부 총리에 올랐다.

세실 로즈는 영국이 새로운 땅을 확보해야 영국인들에 토지와 일자리를 나눠주고 공산품의 판로를 열수 있다고 주장한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였다. 그의 꿈은 남쪽의 케이프 식민지에서 북쪽 카이로(이집트)까지 아프리카를 종(縱)으로 영국식민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영국 본국 정치인들을 설득해 ‘대영 남아프리카 회사’(BSAC: British South Africa Company)를 설립했다. 말이 회사지, 이 회사는 경찰력도 보유했다. 경찰은 사실상 군인이었고, 동인도회사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침략군 조직이었다. 세실 로즈는 BSAC를 개인조직처럼 부렸다.

 

▲ 세실 로즈의 짐바브웨 공격 (은데벨라 전투. 1893. 10. 25) /위키피디아
▲ 맥심기관총(1896년 제작) /위키피다아

 

세실로즈는 금과 다이아몬드를 찾아 북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의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 지역이다.

1894년 세실 로즈는 BSAC을 앞세워 원정군을 북쪽 내륙으로 파견해 영국 본토의 4.5배에 해당하는 광대한 토지를 빼앗아 BSAC 지배하에 두었다. 그의 군대는 로디지아를 점령하기 위해 은데벨레족과 두차례의 전쟁(1893~1894, 1896~1897)을 벌였다.

이때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맥심 기관총(Maxim gun)이 사용되었다. 1차 전쟁에서 현지 부족은 10만명의 병력(이중 2만명이 소총수)을 투입했다. BSAC는 750명에 타부족 지원병 700명이 고작이었다. 숫자상으론 토착부족이 100대1로 압도했지만, 기관총 앞에는 추풍낙엽이었다. 아프리카 왕국과 토착인들에겐 전쟁이었지만, 기관총으로 무장한 유럽인들에겐 사냥이었다.

싸움은 일방적으로 끝났다. 로즈의 군대는 게임을 즐기듯 잠베지 강까지 점령했다. 회사가 정복한 이 땅을 식민자들은 세실 로즈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로즈의 땅)라고 명명했다. 개인 영지나 다름 없었다.

세실 로즈의 회사(BSAC)가 차지한 땅을 남북으로 나눠 남(南)로디지아, 북(北)로디지아라고 했다. 북로디지아는 지금의 잠비아, 남로디지아는 지금의 짐바브웨에 해당한다.

초기에 영국은 로디지아를 직접 통치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치의회를 구성하거나 총독이 파견되지 않고, 세실 로즈가 만든 회사(BSAC)가 통치했다. 현지 부족장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BSAC가 경찰력으로 통제하는 동인도회사의 인도 지배방식을 준용햇다. 따라서 로디지아는 국명이 아니라 세실 로즈의 회사가 관리하는 지역이라는 의미였다.

 

▲ 로디지아-니아살랜드 연방 /위키피디아

 

1923년 영국은 남로디지아를 영국령으로 만들어 의회를 구성했다. 이어 2차 대전이 끝난 1953년엔 북로디지아를 합쳐 로디지아-니아살랜드 연방을 구성했다.

그런데 1965년 11월 11일 남로디지아 식민정부는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로디지아 식민정부가 백인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흑인 인권을 탄압하자 영국 노동당정부가 식민정부에 탄압을 중지하라고 요구하자 이에 반발한 것이다. 미국 독립선언 200년만에 식민정부가 독자적으로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기는 처음이었다.

영국은 당황했다. 당시 흑인운동단체들은 독립운동을 벌이며 게릴라전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었고, 국제사회도 영국의 식민지들을 현지인들에게 이양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백인들로 구성된 식민지 정부의 독립선언은 시대 조류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본국인 영국은 물론 미국, 유엔이 로디지아 정부에 경제 제제를 가했다.

이어 1970년 3월 로디지아 백인들은 헌법 제정과 정부 수립을 거쳐 이언 스미스(Ian Smith)를 총리로 선출했다. 소수의 백인들은 마지막 저항으로 흑인 게릴라의 공세에 대응했다. 백인정부는 의무병력제를 시행하고 병역기간도 늘렸다. 하지만 22만의 백인인구로 아무리 군대를 징집해도 2만을 끌어모으기 힘들었다. 유엔의 경제 제재로 무기 수입도 어려워 졌다. 이에 비해 흑인 게릴라들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전차부대도 구성했다.

 

▲ 1965년 11월 11일 이언 스미스가 로디지아 독립선언에 서명, 일방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위키피디아

 

스미스의 백인정부는 마침내 전세계에 용병을 모집했다. 그 때 그린베레나 SAS, 프랑스 외인부대 등 각국의 특수부대원들이나 프로용병이 돈을 보고 뛰어들었고, 이들에 힘입어 일시적으로 흑인 반군의 공세를 저지할수 있었다.

▲ 로버트 무가베 /위키피디아

하지만 장기전으로 들어가면서 백인정권은 손을 들었다. 1979년 백인 정부가 흑인 반군과 협상을 통해 흑인 정부에게 정권을 이양하려 투표를 하기로 합의했다.

1980년 2월 영국의 감시 하에 하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2월 14일 백인 의원 선거에서 이언 스미스 전 수상의 ‘로디지아전선’이 20석을 차지했다. 2월 27일~29일간 실시된 흑인 의원 선거에서는 로버트 무가베의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애국전선(ZANU-PF)’이 압승해 80석 중 57석을 차지하였다.

독립운동 지도자 무가베가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이후 37년간 무가베는 나라 이름을 짐바브웨로 바꾸고 장기집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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