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의 안전 코리아] 현장의 안전이 멍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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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의 안전 코리아] 현장의 안전이 멍들고 있다
  •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 승인 2022.10.3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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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세월호 침몰사고와 같은 대참사를 막기 위해 중대재해처벌법까지 제정했는데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서울 이태원에서 대참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번 참사의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중대재해처벌법이지 않나 싶다. 이 법이 예방역량 강화보다는 공포감 조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지자체를 포함한 많은 수범기관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 보자는 생각과 처벌을 피하는 일에만 골몰한 것이 이번 사고에 별다른 대비를 하지 못하게 된 하나의 요인이 아닌가 싶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수범자들에게 안전조치가 예방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생각은 한가한 일이 돼버렸다. 이 법에 규정된 의무사항만을 형식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가 됐기 때문이다. 실효성 있는 안전조치를 면밀히 강구하기보다는 처벌 회피용 서류작업 작성에 매몰됐다. 실질적 안전이 있어야 할 곳에 '보여주기 식'의 형식적 안전이 자리 잡았다. 현장의 안전이 멍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입법기관과 행정(수사)기관은 처벌하는 것에만 집중했지, 예방기준을 실효성 있게 만들거나 정교화하고 예방지도를 하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이러한 부작용은 시민안전 영역뿐만 아니라 산업안전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니 더 심하게 발생하고 있다.  

지난 정부에선 큰 사고가 터질 때마다 시스템을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고 처벌의 희생양을 만들고 행정인력·예산을 늘리는 즉자적이고도 손쉬운 대응으로만 일관했다. 산재예방 행정조직이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져 행정조직 간에 조직과 기능이 중복되고 심지어 방만한 상태가 된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사고가 터질수록 인력이 늘어나는 도덕적 해이에 빠져, 행정기관은 툭하면 사고발생의 책임을 인력부족 탓으로 돌리고 대책을 세울 때마다 인력증원 타령을 해왔다.  

기업을 포함한 수범자들도 안전조직·인력을 늘리는 일에만 혈안이 됐고, 정작 현장의 안전역량을 높이는 일은 등한시하고 있다. 안전의 이행과 실천은 현장에서 이뤄지는데도 불구하고 현장의 안전을 강화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현장인력을 빼 안전인력만 늘리다 보니, 안전부서와 현장부서 간 분절이 심화되고 현장안전은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전보다 오히려 약화되고 있다.   

3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인파' 압사 사고 현장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3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인파' 압사 사고 현장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산재예방 행정조직의 전문성 역시 오히려 확연히 뒷걸음질하고 있다. 행정인력이 늘어나고 교육기간도 늘어났지만 인력은 '오합지졸' 수준이고 교육훈련 프로그램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처벌만 잘하면 중대재해가 줄어들 거라는 생각에 처벌을 위한 조직과 인원을 늘리는 데만 골몰할뿐, 예방역량을 강화하는 일에는 의지도 전문성도 부족했다. 산업안전보건청을 만들겠다는 민주당의 대국민 약속은 헌신짝처럼 내팽겨쳐진 지 오래다. 또 한 번의 '먹튀정치'다. 사람의 생명에 직결되는 문제를 정치적 이해득실에만 이용하는 모습은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국민을 우롱하는 정치권은 더 이상 안전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행정기관이 기본적인 제 역할조차 못하고 있는 부분 역시 비판 받아 마땅하다. 산업현장에서 재해예방에 대한 행동기준을 제시해 주는 기능을 하는 질의회시 행정이 몇 년 전부터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한 사항에 대해 정부에 질문을 하더라도 묵묵부답이거나 무책임한 답변 일색이라고 한다. 수범자의 기초적인 요구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모든 책임을 기업에만 돌리는 '내로남불' 행정을 혁신하지 않고는 산업현장 안전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처벌수준을 높이는 일에만 의지를 보일 뿐 엉성하고 모호한 법령을 정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의적인 지침으로 땜질을 하려다 보니, 일선행정기관조차 우왕좌왕하면서 갈지자 법집행을 남발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데도 귓등으로 들을 뿐이다. 기업에서는 예측 가능성이 없다 보니 실질적 안전을 하기보다는 '감독 대비용' 안전을 하고 있다. 기업 스스로의 예방역량을 올릴 생각은 하지 않고 돈벌이에 혈안인 로펌 등 외부기관에 '묻지마' 컨설팅을 의뢰하면서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재해예방에 많은 비용을 들이고 있지만, 안전역량의 향상과 재해예방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고비용 저효과의 안전이 고착화된 데에는 무엇보다 재해예방의 조타수 역할을 하여야 할 행정부와 정치권의 기능이 먹통이 되어 버린 탓이 가장 크다. 희생양 만들기와 창피주기, 군기잡기가 본연의 역할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안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 행정부와 정치권의 처절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안전선진국으로 발전하기는커녕 '안전후진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다. 

정진우 교수는 행정고시 합격후 고용노동부에서 19년 6개월간 근무했다. 일본 교토대학교에서 법학석사학위 취득 후 고려대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부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에서 안전관계법, 안전관리 등 안전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안전보건법론, 산업안전관리론 등 11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이 중 3권은 세종도서와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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