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 100년③…죽음의 얼음 대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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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100년③…죽음의 얼음 대행군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14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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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믿고 동진하다 백군진영 수십만명 시베리아 겨울바람에 동사

 

1917년 11월 러시아 혁명 이후 벌어진 적백(赤白) 내전은 외국군의 간섭을 초래했다.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은 러시아가 단독으로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은데 대한 불만에다 볼셰비키가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개입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 발트 3국, 핀란드, 폴란드, 카프카즈, 중앙아시아의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은 차르(황제) 체제가 무너진 것을 기화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 /출처: 20세기 러시아현대사, 존 M 톰슨저

 

유럽지역에 영국, 프랑스, 미군 개입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들은 국내의 백군과 내전을 펼치는 한편 연합군들의 군사적 개입도 직면했다.

연합국의 개입을 촉발한 것은 러시아 혁명정부와 독일 사이의 정전 협정이었다. 혁명 직후인 1918년 3월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지도하는 볼셰비키는 동맹국들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wsk) 조약을 체결해 1차 대전에서 손을 뗐다.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군대를 빼서 서부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스위스에 머물던 레닌을 독일 점령지를 경유해 모스크바에 입국하도록 허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당황한 것은 연합국이었다. 연합국의 주축인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 영토에 대한 제국주의적 욕심마저 냈다. 두 나라는 러시아 혁명에 개입해 프랑스가 우크라이나를, 영국이 카프카즈와 카스피해를 각각 지배하기로 합의했다.

영국과 프랑스, 일본(당시 연합국에 줄을 섰다)은 미국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 압박을 넣었다. 민주주의와 민족 자결을 놓고 고심하던 윌슨은 볼셰비키의 체코 연대 탄압을 보고 개입을 결심한다.

영국군과 미군은 1918년 3월 러시아 북부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에 병력을 투입했다. 이유는 독일 편에 섰던 핀란드에 군수물자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영국은 러시아 북부에 백군 정부가 수립되도록 지원했다.

미국의 러시아 개입은 소규모였고, 한시적이었다. 윌슨은 국내서 의회 비판이 거세지면서 그해 여름에 러시아 북부지역에서 철군했다. (소련은 이 사실을 두고 냉전시절에 미군이 러시아 땅을 점령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1차 대전이 종전하자 연합국은 러시아 군사개입의 정당성을 상실했다. 단독강화에 대한 보복이라는 명분이 사라진데다 국내의 염전(厭戰)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서구의 연합국은 러시아에서 철군을 서둘렀다.

다른 한편 서구 연합국은 러시아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상을 제의했다. 1919년 1월 영국과 미국은 터키의 프린키포 열도(Prince Islands)에서 만나 회담을 열자고 제의했다.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볼셰비키는 찬성했지만, 반볼셰비키의 백군은 회담을 거부했다. 회담은 무산됐다. 이 와중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육군장관은 연합국으로 하여금 전면적인 반볼셰비키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촉구했으나, 한낱 주장으로 그쳤다.

연합군들은 평화중재 노력이 회담이 무위로 끝나자 러시아 백군에 군사고문단을 보내고 군수물자와 자금을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프랑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19년 3월 루마니아와 그리스군과 합동으로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원정대를 파견했지만, 일부 부대의 반란으로 포기했다.

 

▲ 1918년 9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사열하는 연합군 병사들 /위키피디아

 

극동지역에서 가장 오래, 가장 많이 군대를 주둔시킨 일본

 

연합군 가운데 일본군의 군사 개입이 가장 집요하고 오래갔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일본은 만주와 시베리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욕을 불태웠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만주를 공략할 때 가장 반대가 심한 나라가 러시아였다.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 조선왕실의 아관파천, 러·일 전쟁을 경험하면서 러시아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중국 만주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러시아 극동지역에 완충국가(buffer state)를 수립한다는 전략을 꾸미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 극동지역에 개입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는 초조감을 느끼고 있었다.

1918년 1월 12일 일본은 미군과 영국군이 오기 전에 전함 이와미호를 블라디보스톡에 입항시켰다. 하지만 무장 폭도들이 일본인 소유 가게를 약탈하고 일본인을 살해하자 일본 정부는 해병을 상륙시켜 블라디보스톡시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어 영국과 미국의 해군이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했다.

1918년 7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극동지역 연합군 부대를 2만5,000명으로 증원하기 위해 일본에 7,000명의 병력 증파를 요청했다. 반혁명 백군을 지원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본국으로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일본은 연합군의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군을 지휘한다는 조건으로 병력을 증파했다. 일본은 한발 더 내디뎠다. 마침내 일본은 7만명이라는 막대한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병했다. 이는 연합국이 요구하는 수준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영국군과 미군은 블라디보스톡 인근에서 제한된 작전만 수행했지만, 일본군은 바이칼호 인근 이르쿠츠크까지 진출했다. 1920년엔 미쓰비시, 미쓰이등 일본 자이바츠(財閥)들이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 치타 등지에 사무실을 열면서 민간인 5만명을 데려 왔다.

영국과 미군이 군대를 철수했을때도 일본군은 남아있었다. 일본 군부는 시베리아에서 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합병하고 싶었으나, 일본내 야당의 반발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군이 러시아 땅에서 철수한후 2년 이상 극동지역에 머물면서 최후까지 백군을 지원했다. 러시아에 볼셰비키 정권을 저지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백군을 앞세우 영토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알렉산드르 콜차크(Aleksandr Kolchak)가 1920년 체포될 때까지 그의 백군을 지원했다. 이어 일본군은 몽골계 그리고리 세묘노프(Grigory Semyonov)가 세운 트랜스바이칼 백군 정부가 1922년 패망하기까지 지원했다. 1922년 11월 일본군은 볼셰비키의 적군이 블라디보스톡을 장악하자 사할린을 제외하고 시베리아에서 철수했다. 연합군 가운데 가장 늦게 러시아 내전에서 철수한 것이다.

 

▲ 러시아 극동 공격을 찬양하는 일본의 선전물 /위키피디아

 

죽음의 시베리아 얼음 행군

 

중국공산당의 대장정(1934~35년)에 관한 스토리는 많이 알려져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들은 끝내 성공했기에 많은 기록들이 전설처럼 전해온다. 하지만 패자의 고통은 잊혀진다. 중국 홍군(紅軍)의 대장전에 앞서 15년전에 중국 북쪽 바이칼호 근처에 러시아 반혁명 백군 일행 수십만명이 얼어죽은 시베리아 얼음행군(Great Siberian Ice March)은 기억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 콜차크 우표(1919)/위키피디아

1918년 11월 트로츠키가 이끄는 적군이 백군 정부 수도인 옴스크를 함락시키자, 백군 지도자 알렉산드르 콜차크는 후일을 기약하고 남은 병력을 후퇴시켰다. 정통 그리스정교 신도로 구성된 백군은 적군이 장악하고 있는 서쪽으로 갈수도, 이슬람 지역인 남쪽 중앙아시아로 갈수도 없었다. 그들은 수도 옴스크를 버리고 시베리아 동쪽을 향해 대장정을 시작했다.

처음 콜차크가 시베리아 대장정을 시작할 때 거느린 부대의 규모는 대략 50만에 가까웠다. 그 뒤에는 75만의 피난민이 뒤따랐다. 러시아 정교의 주교 25명, 사제 1만2,000명, 수도사 4,000명, 구 러시아 경찰 4만5,000명에 20만 이상의 부녀자들이 포함되었다. 게다가 백군 부대에는 구러시아 정부가 군자금으로 보유하고 있던 500톤 가량의 금을 확보하고 있었다. 백군은 이 금을 28량의 화차에 실고 시베리아 대장정을 떠났다.

콜차크는 바이칼호의 도시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배신으로 적군에 넘겨져 처형당하고 말았다. 지도자를 잃은 이후 백군과 피난민들은 블라디미르 카펠(Vladimir Kappel)을 지도자로 삼아 후퇴를 계속했다.

군대와 피난민이 뒤섞인 대규모 행렬은 거대한 인간의 흐름을 형성했다. 이들은 한편으로 적권의 추격을 막아내면서 피난민을 보호하며 바이칼 호에 이르렀다. 그들은 여기서 더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베리아 동장군(冬將軍)이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방향을 바꿔 중국 국경선이 있는 남서족으로 방향을 바꿨다. 지도부는 얼어붙은 바이칼호를 건너 중국 국경으로 피하자는 계획이었다. 생존한 백군 병사는 처음 행군을 시작할 때의 10분의1도 안되는 3만 명 정도였다. 민간인들의 생존율은 더 낮았을 것이다.

1920년 2월 백군이 바이칼 호반에 도착했을 때 얼음 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30만명 정도였다. 길에서 무려 70% 이상이 죽은 것이다. 이들은 잠시 쉴틈도 없이 남은 힘을 다해 호수를 건너 몽골 쪽으로 가려고 했다. 바이칼호는 1월부터 3월까지 결빙기다. 당시 호수 표면에는 3m 두께의 얼음이 얼어 있었다.

바이칼 호를 건너는 병사와 피난민을 공격한 것은 적군의 포화가 아니었다. 엄청난 북극의 추위와 바람, 그리고 피로였다. 허허벌판 바이칼 호수는 조금도 바람막이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 왔다. 병사와 피난민들이 시베리아 폭풍한설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 죽었다. 이들의 시체는 겨울 동안 바이칼 호 위에 그대로 동상처럼 남아 있었다. 봄이 와 얼음이 녹으면서 동사한 시체들과 그들이 가져간 보물들도 함께 1,600m 호수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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