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버블 붕괴⑩…디커플링 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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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버블 붕괴⑩…디커플링 착시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1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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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자금이 신흥시장으로 빠져나가며 생긴 일시적 현상

 

2000년대초, 미국 경제가 슬럼프에서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하고, 뉴욕 증시가 몇 년째 내리막길을 걷자 뉴욕 월가의 기간투자자들이 돈되는 곳, 유럽이나 아시아에 눈을 돌렸다. 특히 2002년 상반기에는 한국등 아시아 시장에 눈독을 들이면서 뉴욕 증시와 아시아 증시의 차별화를 의미하는 이른바 ‘디커플링(de-coupling)’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월가 펀드들이 이머징마켓(신흥시장)에 비중을 높인 것은 뉴욕증시의 주가가 고평가돼 있는데다 미국 달러화 약세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메릴린치가 해외 투자에 적극적인 견해를 보였다. 메릴린치 증권의 글로벌 투자전략가 데이비드 바우어스는 2002년초 보고서에서 “미국 경제회복이 부진하고 달러가 약세로 돌아서면서 미국증시가 매력을 잃고 있기 때문에 이머징마켓의 포트폴리오를 높일 것”을 권했다. 또 미국의 단기금리가 40년 만의 최저인 1% 대에서 운용되고 달러하락 속도가 빨라지면서 안정성과 환차익을 노려 미국 금융시장에 유입됐던 해외자본이 수익성이 높은 이머징마켓으로 이동했다.

2002년에 월가의 글로벌펀드들이 투자유망국으로 꼽은 나라는 한국과 멕시코였고, 러시아ㆍ헝가리ㆍ터키ㆍ브라질도 그 다음 순위로 이어졌다. 메릴린치의 애널리스트 티모시 본드는 이머징마켓 가운데 선두주자로 한국을 꼽고 그 다음으로 타이완ㆍ홍콩ㆍ싱가포르 등 아시아 네 마리 용을 들었다.

미국의 경제뉴스 케이블채널인 CNBC는 해외 투자유망국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신설, 방영했다. 뉴욕증시가 3년째 죽을 쑤면서 월가 펀드들의 관심이 수익성 높은 이머징마켓에 쏠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수십조 달러에 이르는 뉴욕 월가의 방대한 자금시장에 역류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은 국제금융시스템에 변화가 생기고 펀드 운영자들의 심리가 바뀐 것이다. 세계가 동시 불황에 빠졌을 때는 국제유동성이 안전한 미국으로 유입됐으나 미국 경제가 오랜 기간 부진의 늪에 허우적 거리자 미국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이머징마켓에서 높은 수익을 얻을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 2013년 기준 신흥 산업국(Newly industrialized countries) /위키피디아

 

달러 하락도 미국 자본시장에 대한 매력을 잃게 했다. 국제유동성의 유입은 통화강세에 비례한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한계에 이르면서 달러가 하락하고 달러표시 유가증권의 상대적 가치가 떨어졌다.

또 저금리 기조도 미국 자본시장의 수익률을 낮추는 조건이었다. 단기금리가 40년 만에 최저인 1%대로 떨어져 돈이 많이 풀려났지만 뭉칫돈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뉴욕증시 이탈의 또다른 이유는 주가 하락에도 불구, 여전히 고평가돼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블루칩 500개 종목(S&P500)의 주가수익률(PER)은 2002년초 24로 과거 50년간 평균치 15보다 훨씬 높으며 대공황 직전의 최고 수위를 넘어섰다. 2차대전 이후 최악의 수익저하에도 불구, 주가 하락률이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PER는 낮아지지 않았다. 경기침체 후유증으로 모든 상품 가격이 하락했는데도 뉴욕증시만 비싸게 거래되고 있는 셈이다. 로버트 쉴러 예일대 교수는 뉴욕 주가가 1929년 대공황 직전보다 높게 평가돼 있다고 경고했고, 루트홀드 그룹이라는 투자회사는 “S&P 500 지수가 지난 50년간의 PER 평균치에 접근하려면 주가가 40% 이상 하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월가 펀드매니저들은 몇 년째 뉴욕증시가 하락, 큰 손실을 봤기 때문에 이문을 남겨 투자자들에게 돌려주고 보너스를 제대로 챙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이들 매니저는 위험성보다는 수익성을 우선하고 상승 여력이 높은 이머징마켓으로 눈을 돌렸다. 또 엔론 파산 이후 월가 투자자들이 미국기업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있는 것도 해외시장을 찾은 이유다. 내로라는 미국 기업들이 회계를 분식하다 매출과 수익을 부풀린 혐의가 드러나고 미국의 간판기업인 제너럴일렉트릭(GE)ㆍIBM마저 불신받자 해외투자자는 물론 월가 투자자들마저 미국 기업에 투자를 기피했다. 더구나 지난해 9월 테러 이후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투자처라는 2차대전 이후의 고정관념이 흔들리고 있는 점도 국제자금이 미국을 떠나고 싶어한 원인이 됐다. 테러 이전에는 국제분쟁이 발생하면 뉴욕 금융시장으로 돈이 몰렸으나 9·11 이후엔 미확인 테러 경고에도 뉴욕증시가 가라앉는 것이 이런 심리 변화를 반영했다.

 

월가를 이탈한 거대한 자금은 빠르게 회복하고 있는 동아시아 시장에 눈을 돌렸다. 1990년대초 미국의 저금리 기조가 형성됐을 때 막대한 자금이 한국을 비롯,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등 아시아의 ‘네마리 용’ 국가로 이동했을때의 양상이 또다시 재연될 가능성이 대두됐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뉴욕 증시의 거품(버블)이 꺼지지 않았지만, 뉴욕 동아시아 증시는 저평가돼 있고, 상승 여력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월가 투자자들은 미국 경제가 회복될 경우에도 아시아 증시가 가장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믿었다. 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 26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의 분석을 보자.

이 신문은 “미국 경제가 내년에 빠른 회복세를 보인다면, 동아시아 증시가 중남미나 동유럽보다 더큰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 경제가 회복되면 이머징 마켓이 가장 큰 덕을 보았는데, 이번 회복과정에는 아시아가 그 혜택을 보게 될 것으로 신문은 진단했다.

첫째 이유로 미국 경제가 회복되면 수입이 늘게 되고, 이에 따라 수출지향적인 한국과 대만의 경제가 활성화될 것으로 이 신문은 꼽았다. 아시아 시장에 대한 낙관론의 근거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초저금리 정책, 부시 행정부의 경기부양 정책으로 미국 경제가 회복하고, 이에 따라 아시아 경기도 상승세로 돌아선다는 것.

월가 투자자들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경우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안정된 한국과 홍콩에의 투자를 선호하고 있다고 저널은 전했다. 월가 사람들은 아시아 네마리 용 가운데 미국과 일본의 경기침체에 영향을 가장 덜 받는 나라로 한국을 지목, 원화 환율이 아주 안정돼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둘째로, 역사적으로 아시아 증시가 침체기엔 55% 하락했지만 바닥을 친후 1년 내에 두배 상승하고, 5년 사이에 거의 3배 가까이 오른 것으로 분석됐다. 월가 투자자들은 지난 1999년에 아시아에서 한해동안 두배 장사를 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미국 경제 회복 소식과 함께 아시아로 몰려든다는 것.

이 같은 분석은 2002년 상반기에 뉴욕 증시가 침체하고 있는데도 불구, 아시아 증시가 달아오르는 원인을 제공했다.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탈동조화’라고 불렀고, 영문 그대로 ‘디커플링(de-coupling)’ 또는 ‘디링크(de-link)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월가의 많은 해외투자가들은 아시아, 특히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크기 때문에 아시아 증시가 뉴욕 증시와의 연동관계를 끊고, 차별화하면서, 국제유동성의 새로운 피난처를 형성할 것이라는 주장했다.

 

그무렵 뉴욕에 본사를 둔 프루덴셜증권의 보고서를 소개한다.

미국의 프루덴셜 증권은 아시아보고서에서 “뉴욕 증시와 동아시아 증시의 탈 연동관계가 이제 본격화됐다"며 "뉴욕 주가가 고평가돼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주가의 가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뉴욕 증시와 동아시아 증시의 탈 연동성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며, 뉴욕 증시가 하락하더라도 동아시아 시장은 완강하게 하락을 거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프루덴셜은 특히 한국과 타이완 증시가 올해 상당한 힘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뉴욕 증시의 주가가 고평가돼 있지만 한국과 타이완의 주가는 지난해말 이후의 급격한 상승에도 불구, 아직 저평가돼 있다는 분석이 이런 전망을 뒷받침했다. 게다가 미국이 저금리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여 미국의 금융자산 수익률이 낮을 것으로 관측되기 때문에 월가의 자금이 동아시아로 몰려갈 것이라고 관측했다. 프루덴셜은 “최근의 주가 상승에도 불구, 한국에는 싼 주식들이 많이 있다”면서 “한국 주가는 지금까지 올해 수익을 전제로 상승했지만 내년 수익 상승이 분명하게 보이면 주가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디커플링 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2년 여름이 지나면서 아시아 증시는 뉴욕 증시를 따라 곤두박질쳤다. 오히려 뉴욕 증시보다 큰 폭으로 떨어졌다. 디커플링이 아니라 동조화가 재연되는 ‘리커플링(re-coupling)’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디커플링이란 용어는 모건스탠리의 수석이코노미스트 스티븐 로치가 만들어낸 용어였다. 하지만 디커플링이 해소될때도 모건스탠리가 이의를 제기했다.

2002년 7월 잇달은 기업 회계부정으로 뉴욕 증시가 폭락할 무렵 디커플링의 원조인 모건스탠리가 디커플링 대신에 ‘리커플링’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시했다. 모건스탠리 홍콩지점에 근무하는 애널리스트 앤디 시에(Andy Xie)는 아시아 증시가 그동안의 디커플링 관계를 끊고 다시 동조관계로 돌아섰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미국 경제가 2차 침체(더블딥)에 빠질 경우 수출중심의 아시아가 큰 타격을 받고, 세계 최대금융시장인 뉴욕 증시가 흔들리는데 아시아가 좋을수 없다는 것이었다.

뉴욕 월가에서 디커플링 현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무렵, 한국에서는 디커플링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박승 한국은행 총재 같은 분도 그런 부류에 해당했다.

박 총재는 2002년 8월 6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ㆍ미 증시의 디커플링이 가시화될 것”이라며, “원화강세까지 가세해 한국 증시의 메리트는 갈수록 돋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은행 총재가 다양한 정보와 자료를 토대로 낸 결론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2002년 7월 뉴욕증시 폭락 이후 한-미 증시에 디커플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증시의 유행어는 특정한 시기와 상황을 설명하는데 적합하지만, 영구한 진리를 담을수 없다. 디커플링의 논리는 2002년 상반기에 2년동안 수익을 내지 못했던 월가 투자자들이 고평가된 뉴욕증시를 떠나 리스크가 높은 아시아 지역을 찾을 때 만들어냈던 것으로, 월가 사람들은 그 효과의 단맛을 다본 시기에 한국은행 총재가 그런 주장을 했던 것이다. 2002년 여름 이후 미국 경제가 다시 꺾이고, 뉴욕 증시가 폭락하면서 미국의 투자자들이 주식에서 대거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의 펀드들은 국내외서 상환자금 마련에 급급, 그동안 주가가 많이 올랐던 아시아 시장에서 돈을 빼냈고, 그동안 수익을 많이 냈던 아시아 시장에서 돈을 빼내 국내 투자가들에게 돌려주었다.

최신 증권용어는 국제금융시장의 주도권을 가진 월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관례다. 그들이 몰려갈 땐 ‘디커플링’을 주장했다가, 빠져나오면서 ‘리커플링’을 제기한 것이다. 일종의 투자 구호와 같은 것일뿐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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