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위례성이 충남 천안일까…아직은 입증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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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위례성이 충남 천안일까…아직은 입증 어려워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13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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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목곽고 유구 발굴…숱한 발굴로 백제의 것 나왔지만 도읍지 입증 못해

 

우리나라 고대사는 미스터리가 많다. 특히 백제사가 그러하다.

백제 건국 임금 온조왕이 첫도읍지로 정한 위례성(慰禮城)은 어디일까. 대다수 사학자들은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위례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충북 천안시 성거산(聖居山) 일대가 백제가 첫도읍으로 삼은 위례성이라는 주장도 여전히 버티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백제본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비류와 온조는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들과 남쪽으로 떠났는데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거처를 정하려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말하였다.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 한강)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가로막혀 있으니 얻기 어려운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弥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 18) 이었다.

 

대다수 학자들은 삼국사기를 근거로 북한산(부아악), 한강(한수), 하남 등의 지명을 보아 위례성의 위치로 서울 송파 일대와 경기도 하남지역으로 비정한다.

하지만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다른 얘기가 나온다. 삼국유사 기이편 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들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한나라 성제 홍가 3년(BC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한 것을 보고는, 결국 뉘우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다 위례성으로 돌아왔는데, 후에 돌아올 때 백성들이 즐거워하였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백제의 계통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해(解)를 성씨로 삼았다.

[미추홀은 인천이고, 위례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彌雛忽 仁州 慰禮 今稷山)

 

삼국사기에는 위례성 인근에 있는 한산, 부아악, 한수등의 지명을 열거하는데 그쳤지만, 삼국유사는 구체적으로 위례성의 지명을 직산(稷山)이라고 적시했다. 이 직산은 현재 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을 말한다.

직산 인근 성거산에는 위례성(慰禮城)이라는 지명과 성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충청남도는 이 성터를 충청남도 기념물 148호로 지정했다.

조선 시대인 1429년(세종 11)에는 온조왕 사당이 직산 지역에 지어졌으며, 지금도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온조왕에 대한 다양한 추모 행사가 행해지고 있다.

 

▲ /그래픽=김인영

 

백제의 첫 도읍 위례성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놓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분분하다. 위례성 송파설이 대세이긴 하나, 천안설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

백제 초기의 주적은 동북부 지역의 말갈과 북부의 낙랑이었다. 두 세력은 연대해서 백제를 공격했다. 온조는 13년(BC 5년) 도읍을 남쪽으로 옮기고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아 말갈과 낙랑으 공격을 방어하는데, 이때 옮긴 도읍이 천안 직산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당시 천안은 마한 목지국(目支國)이 버티고 있었다는 게 학계의 주장인 바, 위례성 직산설이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최근 향토사학이 발전하고, 지방자치단체들아 지역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타고 천안의 향토사학계는 직산 위례성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향토사학계는 『삼국사기』 온조왕조의 위례성 주변 지형지세에 대한 설명이 직산 지역과 부합된다는 점도 주장한다. 즉, 온조왕이 도읍을 정할 때 올랐던 부아악은 용인의 부아산이며, 한수는 안성천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사료의 불분명함을 극복해주는 것은 땅 속에서 나오는 유구와 유물이다.

천안시는 백제 초도지로 전해지는 위례산성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학술 조사와 고고학적인 조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1989년에 단한 시굴 조사를 실시했다. 이어 1995년과 1996년에도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조사 결과 위례산성의 축조 시기가 대략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으로 비정되었다. 내부에서 토기조각등 백제 시대 유물이 다수 확인되었지만, 백제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구체적인 자료는 확보하지 못했다.

이후 서울대 인문학연구소에서 3차례(1989~1996년),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2차례(2009~2010년) 발굴조사를 진행해 위례성 성곽의 현황과 서문지 등을 확인한 바 있다.

 

▲ 천안시 온조왕 사당 /천안시 홈페이지

 

이번에는 천안 성가산 위례성 우물지에서 목곽고(木槨庫)가 확인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1,690척의 성이 있고 우물이 하나 있다고 전해진다.

천안시와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지난해 작년 6월부터 시행한 위례성 내 용샘(물웅덩이)에 대한 1차 조사에서 조선 시대 석축 우물을 확인한데 이어 올해 시행한 2차 조사에서는 백제 시대 목곽고가 나왔다. 이 목곽고는 백제 시대에 처음 조성된 이후 통일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석축우물로 개축이 되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발굴팀은 판단했다.

이번에 확인된 목곽고는 평면의 사각 형태로 가로 550cm, 세로 545cm, 깊이 약 180cm의 크기로, 대전 월평동산성에서 나온 목곽고(520×521cm) 등 기존에 발견된 백제 시대 목곽고보다도 규모가 큰 편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백제 시대 목곽고 중에서는 국내 최대급 규모로 확인된다.

바닥에는 목재를 격자 형태로 결구(結構,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맞물려 맞추는 기법)하여 3×3칸의 규모로 조성되었다. 바닥 목재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지름 12㎝ 구멍을 뚫고 하단에 촉을 만든 기둥을 끼웠는데 중앙에 4개, 외곽에 12개의 기둥을 세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은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시대 유적을 확인했다는데 의미를 두었다. 그동안엔 백제 시대 유물만 수습될 뿐 유적은 나오지 않았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이번에 발굴된 천안 위례성 목곽고가 사비 도읍기(서기 538~660년)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했다. 충청남도역사문화원 관계자는 "목곽고에서 눈에 띄는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대형 백제시대 목곽고가 확인됨에 따라 천안 위례성을 추가로 연구하고 조사할 필요성이 생겼다"고 말했다.

아직은 땅속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구로는 위례성 직산설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직산 위례성이 백제의 첫도입임을 입증하려면 적어도 1~2세기의 유물과 유구가 나와야 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선 더 많은 발굴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 용샘 목곽고 발굴 전경 (북쪽에서) /문화재청 제공
▲ 용샘 목곽고 발굴 전경 (동남쪽에서)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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