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복지, 임금상승이 빚어낸 영국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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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복지, 임금상승이 빚어낸 영국병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0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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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류국으로 전락…개혁주의자 마거릿 대처 총리 선택

 

1979년 1월말, 런던 거리마다 쓰레기 더미가 넘쳤다. 20년만에 닥친 혹한이었지만, 얼어붙은 쓰레기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쥐가 들끓었다. 병원에서는 시신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영국 사회는 마비되었다.

이른바 1978~1979년 겨울에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의 풍경이었다. 임금 인상을 위해 공공부분 노동조합에서 시작된 총파업은 운수 노조로 이어졌고, 쓰레기 청소부와 장의사마저 파업에 참가했다.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당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임금 상승률을 5%로 제한하는 바람에 노동자의 삶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발생하고,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웠던 대영제국은 회복 불능의 병을 앓고 있었다. 이른바 영국병(British disease)이 만연하면서 생산력은 떨어졌다. 1975년 영국의 노동생산성은 미국보다 50%, 독일보다 25% 뒤쳐졌다.

이런 파국을 겪은후 영국인들은 그해 봄 총선에서 보수당의 마가릿 대처(Margaret H. Thatcher)를 총리로 선출했다. 영국병을 치유하고, 이른바 시장경제로 환원하는 내용의 대처리즘(Thatcherism)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면 영국병은 어떻게 해서 도져 나왔을까. 한세기전, 동양의 강국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세계의 대양을 장악했던 영국은 어찌하여 순식간에 망하게 되었던가. 1차, 2차 대전의 전승국이 식민지였던 미국은 물론, 패전국인 독일, 일본에 뒤쳐진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병의 원인은 멀리는 2차대전 말기의 베버리지 보고서(Beveridge Report)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가깝게는 1970년대말 노동조합의 무리한 요구에서 찾을수 있다.

 

▲ 1978~79년 ‘불만의 겨울’ 당시 런던거리의 쓰레기 더미 /출처: conservapedia

 

① 베버리지 보고서…“요람에서 무덤까지”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윈스턴 처칠은 보수당과 노동당이 모두 참여하는 거국 내각을 구성했다. 처칠 내각에 참여한 노동당은 평소에 주장하던 복지국가 수립을 처칠에게 요구했고, 처칠은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당근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처칠 내각은 전쟁의 포화가 끝나면 영국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연구 용역을 윌리엄 베버리지(William H. Beveridge)라는 경제학자에게 주었다.

1942년 베버리지는 이상향의 사회를 그린 보고서를 제출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는 이 보고서는 2차 대전후 사회복지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보고서는 인간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결핍(want) ▲질병(disease) ▲불결(squalor) ▲무지(ignorance) ▲태만(idleness)을 5대 사회악으로 지적하고 6개 원칙의 사회보장제도를 제시했다.

이 보고서 발표를 놓고도 보수, 노동당이 대립을 벌였지만, 일단 발표한 후에 영국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처칠의 보수당은 반대했다. 하지만 춮간된 보고서를 사기 위해 1마일 이상 줄을 섰다고 한다.

1945년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자 영국인들은 전쟁의 영웅 처칠을 버리고 복지주의를 주창한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R. Attlee)를 선택했다. 6년후 다시 영국인들은 처칠의 보수당이 집권했지만, 이미 단물을 맛본 영국인들에게서 복지혜택을 되돌릴수 없었다.

세계 최초 복지국가를 지향한 영국은 연금보조, 무료시술, 결혼수당, 임신수당, 아동수당, 과부수당, 장례수당 등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생을 관통하며 국가가 지원해주었다.

 

▲ 1978~79년 ‘불만의 겨울’ 당시 영국 총파업 /출처: libcom

 

②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

 

복지제도는 한때 세계 패권국이었던 영국의 부를 서서히 갉아먹었다. 그 결과는 재정 적자였다.

복지제도는 냉철하고 적극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영국인의 기질을 바꿔버렸다. 국가가 먹여살려주는데 일할 필요가 없었다. 젊은이들이 직장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직장을 그만두면 실직수당을 줬다. 연금에 적자가 발생하면 예산으로 메웠다. GDP에서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2차대전 직후 30%대에서 1970년대엔 40%대로 불어났다.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조폐창에서 무한정 찍어낼수는 있다. 빌려올수도 있다. 영국 정부는 인플레이션과 채권발행 등 두가지 방법을 모두 썼다.

재정 적자가 늘어나면서 기업에 대한 세율도 증가했다. 노조의 천국에서 기업은 착취의 무리로 낙인찍혔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나라에서 반기업정서가 극에 달했다. 기업들도 혁신을 하지 않았다. 적자가 나면 인력을 줄였고, 노조는 파업투쟁으로 대응했다. 1967~69년 사이에 파업이 50%나 증가했다.

근로의욕, 투자의욕이 공히 사라졌지만, 복지수요는 늘어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회보장 확대→근로의욕 감퇴→재정적자 누적→ 세율인상→투자감소의 악순환이 계획되었다.

노동당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자 1970년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Edward R. G. Heath) 내각이 정권을 잡았다. 보수당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고 개인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줄이려고 했다. 부실기업을 퇴출시키고, 노조에게 파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이내 보수당 정권에 실망을 느끼고 노동당을 밀어줬다. 히스 총리는 물러나면서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노조이냐. 국민이 참아내지 못할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고 예언했다.

노동자 정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노조의 요구를 무조건 다 들어주고, 재정적자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노조는 더 많은 임금을 요구했다. 1975년 석탄 노동자들의 임금은 30%나 올랐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영국 경제는 외풍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오일쇼크였다. 중동발 유가 상승은 영국 경제를 기진맥진하게 했다. 인플레이션이 극심하게 발생했다.

 

③ 부실만 키운 국유화 정책

 

이 무렵 기막힌 발상이 노동당 정권에서 대두된다. 바로 대안경제정책(alternative economy strategy)이다. 노동당내 좌파진영의 이론가였던 토니 벤(Tony Benn, 후에 산업부 장관)이 주창한 국가사회주의 이론의 일종이다. 국가가 지주회사가 되어 주요산업과 대기업을 국유화하고 생산과 수요를 통제한다는 내용이다. 그중 하나가 파산하는 기업을 도태시키지 않고 노동자가 인수해 정부가 관리한다는 것이다.

1974년 다시 집권한 노동당의 제임스 윌슨(James H. Wilson) 2차 내각은 영국 100대 기업 가운데 25개 기업을 공기업으로 전환하고, 나머지 사기업과도 계획계약을 맺어 국가가 기업의 생산과 투자, 기술, 고용, 가격 경쟁을 총체적으로 결합시키려 시도했다. 그 일환으로 노동당 내각은 최대 자동차 기업인 브리티시 레일랜드와 항공우지기업인 에어로스페이스(BAe)를 국유화했다. 영국통신, 브리티시가스, 내셔널버스, 철도, 항공은 이미 국유화되었으므로, 영국 정부는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변했다. 영국의 상징인 롤스로이스는 이미 1971년에 국유화되었다.

국유화된 기업은 생산성이 떨어졌다. 적자가 나면 국가가 보전해주기 때문에 경영자의 창의성이 떨어지고 근로자들의 노동의욕이 감퇴했다. 정부는 공기업 고용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재정적자가 더 커지는 요인이 되었다.

 

▲ 그래픽=김송현 기자

 

④ 지옥으로 변한 노동자 천국…대처리즘 탄생

 

영국의 복지제도는 국민들에게 일시적으로 빵과 풍요로움을 주었지만, 영원히 지속되지 못했다.

1976년 영국은 하락하는 파운드화를 지탱하기 위해 보유외환을 퍼붓다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국가경쟁력이 떨어지면 통화가치가 하락하는데, 이를 버티려 하다가 국가파산위기에 몰린 것이다. 미국과 선진국들의 지원에 힘입어 1년 4개월만에 IMF 관리체제를 졸업하기는 했지만, 영국경제는 이미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노동당은 스스로의 함정에 빠졌다. 과도한 임금인상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과도한 복지정책이 재정적자를 유발시켜 국가파산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임스 윌슨을 뒤이은 1976년 노동당의 레오나드 캘러헌(Leonard James Callaghan) 총리는 임금 인상률 5% 상한을 노조에 요구했다. 노조가 뽑은 정당의 총리가 노동자 임금을 억제하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노조가 받아 들일리 없었다. 노동자들은 불만을 터트렸다. 1978년 겨울 ‘불만의 겨울’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다.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을 약속했던 노동당 정부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자, 자동차, 운수, 병원, 청소 노조가 연합해 총파업을 일으켰다. 런던 시내엔 쓰레기가 넘쳐나고 들쥐가 들끌었다. 불만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 1979년 5월 총선거에서 불만에 가득찬 노동자 세력은 사회주의 척결, 시장경제 주의를 내세우는 마가릿 대처에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대처의 개혁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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