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떠난후③…신임 경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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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떠난후③…신임 경영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1.0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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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식-조말수-장중웅 체제의 구축…처음엔 서구식으로

 

주총을 통해 박태준이후의 포철 경영권을 장악, 실세로 부상한 정명식 회장과 조말수 사장, 그리고 장중웅 상무도 물러난 임원들과 마찬가지로 박태준 사단의 정규멤버였다. 그러나 그들은 황경로 전회장, 박득표 전사장, 이대공 전부사장, 구자영 전상무등과 같이 박태준사단중에서도 로얄패밀리가 아니었고, 박회장 말기에는 포철임원들 간의 주도권싸움에서 로얄패밀리와에 밀려 다소 아웃사이더에 처져 있었을 뿐이다.

정 회장의 경우 90년 주총 직전만 해도 박태준에 이어 포철에서 2인자였다. 그는 박태준과 군에서부터 생활을 함께해 온 황경로라는 인물이 그의 윗자리에 등장하는 바람에 서열이 한칸 밀려나 있었고, 따라서 포철내의 주요한 일에 황 전회장에 비해 뒤떨어지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철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을 정도로 통이 큰 사람이었고, 끝까지 박태준사단의 일원으로 의리를 지켜왔다.

그러던 그가 포철의 신경영진의 최고자리에 오르는데는 조말수 사장의 힘이 컸다. 그래서 그는 포철개혁의 얼굴마담으로 등장하지만 때로 강력한 개혁의 대시를 주장하는 조 사장과 견해차를 드러냈다.

조말수 사장과 장중웅 상무는 경남김해 출신으로 동향관계. 그들은 박태준 말기에 소외돼 있었다는 점이 신권력층의 눈에 들었을지 모르지만 그들 자체가 박태준의 정치활동에 적극 지원했던 인물들이다.

외국어대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학사편입한 조 사장은 김영삼 권부에 중요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동향이며 외국어대 동기생인 엄호연씨가 바로 그다. 엄씨는 대선때 김영삼 후보의 참모 사조직인 임팩트코리아의 부실장을 했고 신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런데다 조 사장은 포철 비서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포철과 관련된 문제중 「정치적 해결」이 필요한 일이 발생할 때 야당 총재인 김영삼씨와 접촉하는 역할을 그가 맡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맥이 그를 신한국 포철의 대표주자로 만들어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고 볼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조씨가 보여준 결단이었다. 만일 그가 박태준의 비서를 16년이나 했다는 정에 끌렸더라면 포철사장을 맡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다름 임원들처럼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그가 사장에 오르기 직전 주재지인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것도 박 회장의 구명운동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곳저곳 알아보니 대세는 이미 물 건너간 직후였고 그때 자신은 어떤 루트를 타고 포철 신경영진을 구성하라는 밀명을 받게 된 것이다.

종종 선택의 순간에서 결단을 하는 사람과 우유부단한 자는 선택의 시가가 지나면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박 회장의 구명운동을 하던 조 사장도 박 회장에 대한 절교를 선택하는데는 번민과 의리를 교차하며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짧은 순간에 고민을 극복하고 신권력에 「OK」사인을 보냈다.

늘 조용한 목소리에 비서부 생활에서 몸에 배인 다정다감하고 싹싹한 태도의 연약한 모습의 그였지만 그와 대화를 해보면 대화도중 가끔 매서운 눈매로 먼곳을 쳐다보는 싸늘함을 느낄수 있다. 그 싸늘함이 박태준과의 절교를 선택하고 박태준사단에 대한 매서운 칼을 휘두르는 힘이 되었던 것일까.

조 사장은 박태준 시절 이대공 부사장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고, 1992년 동남아 현지법인 총괄담당으로 파견될 때 박태준에 대해 󰡔내가 어떻게 모셨는데󰡕하며 불만을 품었었다.

장중웅 상무는 김영삼 정부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 정치에는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시절 학생회장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모기관의 제지를 받고 포기하는 등 학창 시절부터 권력의 실상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군생활에서 정보장교를 맡은 경험을 살려 정보를 분석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장 상무는 조 사장과 동향인데다 조 사장이 비서부장을 할때 비서과장을 하는등 조 사장과는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사이였다. 그는 박태준 시절, 홍보를 맡으면서 조말수 사장과 라이벌관계인 이대공 전부사장으로부터 견제를 받아왔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이 전부사장이 나에게 시말서를 쓰라고 해서 차곡차곡 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 밑에 있는 동안 죽은듯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 상무는 그런 면에서 포철핵심에서 소외됐으면 소외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그는 정 회장-조사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조 사장의 오른팔이 되어 신포스코 운동의 이론을 제공하고 조말수 체제의 포철경영에 야전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정 회장과 조 사장은 주총이 끝나자마자 「군살빼기」의 일환으로 임직원 후속인사를 단행하고 권위주의적인 사내 분위기를 뜯어고치는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조용하면서도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신경영진은 3월 15일 이동춘(李東春), 조관행(趙寬行), 김진주(金鎭珠)씨등 3명을 촉탁전무로 임명했다. 이들 세 전무는 모두 포철 자회사에 근무하다가 조 사장에게 발탁됐으며, 조 사장과 장 상무와 함께 포철개혁 5인방을 구성, 신한국포철건설에 앞장섰다. 이들은 모두 박태준에 의해 키워졌으나 70년대말 현대그룹이 주도한 제2제철로 한때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복귀, 박태준의 미움을 사서 자회사에 밀려나 있었다.

포철의 개혁은 서울사무소 직원들이 착용했던 근무복을 폐지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됐다. 회사창립이래 포철의 상징처럼 굳어진 짙은 누런색의 근무복은 일사분란한 회사기풍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외부인들에게는 획일주의적 군사문화의 산물쯤으로 비쳐진 게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근무복의 폐지는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사소한 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포철 직원들의 입장에서는 크나큰 변화의 서막으로 간주됐다.

회장,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같이 줄을 서서 배식을 받고 식사를 함께 하며 직접대화를 나누는 것도 예전에 없던 일.

이사회 등의 회의운영이나 임원자리 배치방식도 바뀌었다. 과거 1인 지배체제 하의 박태준씨가 막강한 힘을 휘둘렀을 때 같은 임원이라도 그의 앞에서는 말단직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공식회의 좌석배치에 있어 정 회장과 조 사장은 나란히 앉는 모습을 취했다. 집무실 배치도 정 회장은 종래 부회장시절 방에 간판만 바꿔 그대로 사용했다. 대신 조 사장이 박태준전 회장이 사용하던 방으로 들어갔다. 방의 문제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정 회장이 “번거롭게 두 사람이 동시에 방을 옮기느니 나는 그냥 그대로 있고 조 사장이 큰방을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3월 15일 주총이후 처음열린 월례운영회의에서 “회장과 사장이 대내외적으로 공동대표권을 행사하게 돼 있는 만큼 앞으로는 사장과 역할을 분담해 서로의 능력과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우리회사는 오너 회장도 없고 고용사장도 없습니다. 회장과 사장은 임원 중에서 서로 역할을 분담해서 회장은 이사회의 회장 역할을 하는 이사이고, 사장은 이사회에서 사장 역할을 하는 이사일 따름입니다. 이사회에서 정해 놓은 모든 운영계획 사항과 기타 회사가 필요로 하는 계획을 실질적으로 집행하고 총책임지는 사람은 사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장이 참석한 회의를 사장이 주재하는 것이 이상하다든지 하는 사고방식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정 회장은 “회사의 대내적인 업무는 사장이 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실질적인 책임자가 될 것이고, 회장은 대외적인 일에 힘쓸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른바 서구식 경영기법인 더블시스템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서구식 사고는 이상으로 끝나고 이후 회사경영의 축은 조 사장쪽으로 성큼 옮겨갔다.

출발구도가 그랬던 것일까. 정 회장의 입지는 시간이 갈수록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추락해갔다. 당초 업무구도인 「정 회장=해외업무」, 「조 사장=국내업무」조차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정 회장으로서는 결재는 커녕 업무보고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으니 포철이 돌아가는 일조차 파악하지 어려운 처지였다. 1월3일 정 회장이 칼을 뽑아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명색이 내가 회장인데,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정 회장의 섭섭한 심정은 갈수록 커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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