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떠난후②…사단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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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떠난후②…사단의 몰락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0.3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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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 후반에 정치에 참여한 박태준 회장의 마무리

 

1993년 정기 주주총회에 앞서 조말수 사장이 청와대에 보고한 포철개혁안의 내용을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당사자들은 일체 함구를 했다. 그러나 새경영진 출범전후에 진행된 일련의 개혁을 거꾸로 짚어보면 그 실체가 드러난다.

그 첫번째가 박태준사단의 제거다. 이에 대해 장중웅 상무는 「단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박태준 체제의 「승계」냐, 「청산」이냐로 고민을 했지요. 두 가지 반대의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승화시킨 것을 포철개혁의 논리로 보면 적절할 것입니다.”

조말수 사장이 구심점이 된 포철 개혁세력들은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고 박태준사단의 제거를 단행한다. 당초 예상한 박 명예회장, 황 회장, 박 사장, 이대공 부사장 외에 여상환 부사장,구자경 상무,차동해 감사도 개혁의 대상에 포함됐다. 여 부사장은 조 사장의 선배였고 구 상무는 박태준씨가 외유할때 이대공 부사장으로 날라온 정세판단 메시지를 전달해준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구 상무, 차 감사는 박태준씨와 같은 경남양산 출신이다.

그러나 포철의 새로운 집행부가 비록 선배의 가슴에 못질을 해 내몰아쳤어도 가슴아픈 고뇌의 결단이라는 평가도 있다.

“조 사장은 박태준씨의 비서생활을 오래해 TJ의 분신이나 다름없지요. 포철을 살리는 길이 이것외에 더 있겠습니까. 새정부는 서슬퍼렇게 포철을 바라보고 있고 시대도 뭔가 포철의 뭔가 변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정 회장, 조 사장의 심성으로 보아 TJ 인맥을 차단함으로써 TJ를 살리고 포철을 구한다는 역설의 논리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주총이 끝나고 신임 포철 집행부에서는 자진사퇴한 박태준 전명예회장 황경로 전회장등 선배에 대한 예우에 한때 고민했다.

장중웅 상무는 “그들이 비록 자의에 의해 물러났지만 주변여건이 포철에 더 있지 못하게 한 만큼 후배들로서 뭔가 공로를 인정해줘야 한다”며 공로금을 주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음을 밝

혔다.

당시만해도 포철 집행부는 순진했다. 외국의 기업에서는 비록 대주주가 아니더라도 기업발전에 공이 큰 기업인에 공로와 명예를 인정해주는 게 관례다. 박 회장이 정치적으로 회사를 떠났어도 경제인으로서, 기업인으로서 공적은 인정해 줘야 한다는 게 당시 포철에 잔류한 임원일부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게 통하지 않았다. 포철 신임 경영진은 그후 박태준의 공로를 인정하는 어떠한 일도 않았다.

 

정명식 신임 회장은 조말수 신임 사장과 함께 주총 직후 포항본사 임원회의실에 나란히 앉아 기자회견을 갖고 취임소감과 앞으로의 경영방침을 밝혔다. 정회장과의 일문일답을 들어보자.

- 회장내정사실을 언제 알았나.

“오늘 아침에 알았다.”

- 박태준 전명예회장의 퇴임에 대한 소감은.

“애통하게 생각한다. 25년간을 모신 분이 떠나니 함께 일했던 사람으로서 섭섭하다.”

-지금까지 추진해온 중국 동남아합작사업의 계속추진여부는.

“포철은 그동안 해외에서 사업을 적극 추진해운 유망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

- 미국의 반덤핑판정에 대한 대책과 수출전망은.

“󰡔세계철강업 전체가 오늘날 공급과잉상태다. EC(유럽공동체)국가들도 과대한 국가보조금지 급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다자간 또는 양자간 협상을 통해 하나하나 해결해나가겠다.”

- 포철에 대한 국세청세무조사는 계속되는지.

“국세청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박 전명예회장 퇴임후 회사 발전방향은.

“지난해 공양4기 준공으로 철강회사로서의 양적 질적성장은 끝났다. 철강업의 경쟁력을 높여나가기 위해 회사의 축적된 기술 인력 신용을 토대로 국가에 유익하게 기여할 수 있는 사업을 올해도 계속해나가겠다. 지난해 추진했던 이동통신등 사업다각화에 힘쓰겠다.”

 

포철 주총은 김영삼 정부가 박태준과 그의 측근을 제거하되, 내부승진으로 충격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포철 임원진을 개편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신 정부가 주총을 통해 그린 포철에 대한 청사진은 포철이 자랑해온 낙하산인사 배제 원칙을 존중하되 엔지니어중심으로 개편, 정치권과의 연계를 끊고 경영활동에 전념토록 한다는 것.

그러나 정 회장-조 사장의 새체제는 25년간 포철을 이끌어온 박태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포철을 세워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당시 인사는 상공자원부등 관계부처의 의견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채 철저히 청와대에서 결정된 것. 대주주인 정부를 대표해서 포철 주총에 참석하는 상공자원부 제철과장은 임원인사 명단을 가져오지 않았고, 그는 백지 상태에서 주총에 참석했다.

주총에서 드러난 가장 큰 특색은 TJ와 그의 측근을 제거한 것. 물론 정 회장-조 사장, 유상부 부사장등도 TJ측근임에는 틀림없지만, 물러난 임원의 면면을 보면 TJ와의 거리가 보다 가까웠던 인물들이다.

황 전회장은 박태준이 물러나면 함께 물러나겠다고 말했으며 박득표 전사장 이대공 전부사장등은 TJ 제거와 함께 속죄양으로 물러난 케이스.

이들의 퇴진으로 포철에는 일단 TJ사단의 큰 줄기가 빠져나가게 됐으며 정 회장-조 사장라인은 TJ없는 포철을 이끌게 됐다. 따라서 포철의 새경영진이 극복해야 할 과제는 박태준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하는 것.

 

주총이 끝나고 하오 2시에는 같은 장소인 국제회의장에서 임직원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장과 사장에 대한 이취임식이 열렸다. 물러나는 황 전회장과 박 전사장, 새로 취임하는 정 회장과 조 사장의 목소리와 말하는 주제가 달랐다.

황경로 전회장의 이임사.

“박태준 명예회장의 아낌없는 지도와 임직원들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대과 없이 3년임기를 마칠수 있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2,100만톤체제에 걸맞는 새로운 경영체제와 21세기 대도약을 향한 경영기반을 구축해 왔습니다.”

박득표 전사장의 이임사.

“국내외적으로 위기의 파고가 드센 이 시점에서 회사를 떠나게 되어 임직원들에게 송구스럽습니다. 몸은 비록 회사를 떠나지만 항상 자랑스런 포스코맨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포항제철의 발전을 위해 조그만 정성이라도 보탤 것을 약속드립니다.”

정명식 신임 회장의 취임사.

“포항제철 회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어 큰 부담을 느낍니다. 본인은 변회와 개혁을 통한 새로운 체제로 정비해 나감으로써 첫째 맑고 깨끗한 기업상 창조, 둘째 자체기술력 확보와 판매력 강화, 셋째 수요가와 지역사회등 회사 주변의 모든 이해관계 집단들과 다함께 발전하는 한 차원 높은 국민기업 이미지 확립등 세가지 목표를 중점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이를 위해 오직 전임직원의 하나로 결집된 힘이 전제되어야 하며 변화의 시대에 맞는 과감한 의식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조말수 신임 사장 취임사.

“국가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해온 우리 포항제철은 경제활성화의 선봉장 역할을 하는 등 신한국 창조에 적극 동참해야 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하기에 사장으로서 실로 무거운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사 전분야에서 개혁의 노력을 함께 기울여 나갑시다.”

 

포철 주총이 있기 전인 2월 22일 박태준씨는 자신의 사퇴결정을 측근들에게 알렸는데 김호길(金浩吉) 포항공대 학장등의 만류로 사직원 제출을 연기해오다 주총 직전인 11일 정명식 대표이사 앞으로 제출했다.

주총 이틀전 박태준씨는 포철 대표이사 앞으로 포철및 제철학원 이사장직에 대한 사표를 내고 출국했고 이때 부인 장옥자여사가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출국을 서둘렀다. 장여사는 일본까지의 길안내를 위해 포철 비서부의 김모 부장(차장)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김 부장이 출국수속을 체크하던 중 출국정지대상자로 지정돼 있음을 확인했다.

현직간부는 당시 정황을 이렇게 분석했다.

“박 회장이 출국하자마자 국세청은 자금줄이 대거 해외로 도피할 것을 우려, 출국정지신청을 냈던 것 같습니다. 주총에서 물러난 임원 6명과 김용운 전무뿐 아니라 비서 자금 경리부의 부장 차장 과장급 10명까지 출국정지를 요청한 것은 국세청의 이같은 인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박태준 측근에 의한 박태준사단의 몰락. 이는 김영삼 정부 출범뒤에 발생한 일이지만 6공화국 후반에 정치에 참여한 박태준 전포철 회장의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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