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상③…청나라 최고의 조선인 상인, 안기(安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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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상③…청나라 최고의 조선인 상인, 안기(安岐)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0.2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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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제일가는 염상(鹽商)’이라는 칭호도…그림 수집과 감정으로 명성 떨쳐

 

조선인으로 중국에 가서 최고의 상인 반열에 오른 사람이 있다. 안기(安岐, 1683~1745?)라는 인물인데, 호는 녹촌(麓邨 또는 麓村)이다.

아버지는 안상의(安尙義)는 조선의 외교사절단과 함게 청(淸)나라 수도 베이징에 갔다가 그곳에 눌러 살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 바이두 백과에는 그를 조선인(朝鮮人) 또는 천진(天津) 사람이라고 했다. 이는 안기가 조선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간 것인지, 중국 천진에서 태어난 것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조선인의 후손인 것은 분명하다.

안기가 살던 시대는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1~1722)에서 옹정제(雍正帝, 재위 1722년∼1735)를 거쳐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년∼1795)의 기간으로, 청나라가 최전성기를 구가할 때다. 나라가 안정되고 물산이 풍부하고 상업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당시 청나라 대상인을 지칭할 때 ‘남마북사’(南馬北查), ‘남계북항’(南季北亢), ‘북안서항’(北安西亢)’이라는 사자성어로 압축했다. 남마(南馬)는 양주의 마왈관(馬曰琯), 마왈로(馬曰璐)의 마씨 형제이고, 북사(北查)는 천진의 대염상 사일건(查日乾), 사위인(查爲仁) 부자의 사씨 일족을 말한다. 남계(南季)는 강소(江蘇) 태흥(泰興)의 대염상 계진의(季振宜)를 중심으로 하는 계씨 가족이고, 북항(北亢)은 산서(山西) 평양(平陽) 항씨를 말한다. 북안(北安)은 천진의 안기(安歧)이고 서항(西亢)은 앞서의 평양 항씨를 말한다.

안기는 청나라에 손꼽히는 거상에 속했던 것이다. 북안(北安)으로 지칭되는 안기는 천진과 양주를 오가며 활약했다. 남쪽 양주((揚州)에서는 소금상을 했고, 북쪽 천진에서는 그림수집과 감정을 했다. 현재 양주에는 안기가 살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 지명이 ‘안가항’(安家巷, 안씨의 거리)이다 청말의 금석학자이자 교육자인 단방(端方)은 안기를 ‘천하에서 제일가는 염상(爲鹺商甲天下)’이라고 평가했다.

 

▲ 안기(安岐, 1683~1745?) 초상화 /바이두백과

 

안기가 장사를 하는데 필요한 종자돈은 당대 고관의 집에서 집사 노릇하면서 마련했다.

안기는 부친을 이어, 당대 최고의 실세였던 만주족 출신 관료 납란명주(納蘭明珠)의 집사로 일했다. 그는 권세가의 집사 노릇을 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것 같다.

청말 학자 단방은 자신의 저서 『묵연휘관록』 서문에 이렇게 정리했다.

“녹촌(안기)은 일찍이 남란 태부 집안의 급사였다. 태부의 권세가 조정을 좌지우지했을 때, 그 집안을 분주하게 드나들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녹촌에게 뇌물을 바치고 내통했다. 녹촌은 욕망을 다 채우고 그 집을 떠나 천하에서 제일가는 소금장수가 되었다.”

안기가 씨앗 돈을 마련하는 과정은 정당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만주족이나, 한족이 아닌 조선인 출신으로 기득권도 없었을 터이고, 고관대작 밑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그 집을 드나들며 청탁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뒷돈을 챙긴 듯하다.

 

그는 강남으로 가서 염상(鹽商)이 되었다. 청나라 때 소금산업은 정부가 관리하는 전매제도였다. 조정 관리의 뒷배경이 없으면 장사를 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안기는 납란명주의 집사를 하면서 챙긴 돈을 가지고 자립을 하게 됐는데, 물론 그 배경에는 강희제 때 권세가의 배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명·청기에 염상은 엄청난 특권사업이었고, 당대 최대산업은 소금산업이었다. 소금은 주로 황하와 양쯔강 사이에 있는 회하(淮河) 부근에서 생산되었는데 청대에 들어서 특히 회하 남북의 소금 상인들이 엄청나게 재산을 모았다. 주로 안휘성 출신의 휘상(徽商)이 그 중심이었다.

안기가 활동하던 17~18세기에 매년 1억 근(斤) 이상의 소금이 양주를 거쳐 안휘 하남 강소 강서 호남 호북 등지로 운반되었다. 건륭제 당시 이들 6개성의 양회 염상이 전성기를 누렸다. 양회의 염상들은 한해 1,500만냥의 소득을 거둬 600만냥의 세금을 냈다. 이 세금의 청나라 전국 과세의 60%를 차지했다. 특히 양주 염상이 내는 세금은 재정수입의 26%를 차지했다고 하니, 강남의 염상들의 부는 국가와 대적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런 강남 염상 가운데 안기가 ‘천하에서 제일 가는 염상’이라 했으니, 그의 재산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당시 대염상들의 사치는 극에 달했다. ‘양주화방록’(揚州畵舫錄)이라는 당대의 책자에 안기의 사치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안록촌(안기)이 가장 극성을 부렸고, 가문이 번성한 뒤에는 더욱 기이해졌다. 만금을 일시에 써 버리고 싶어 했으니, 문하객이 금박(金箔)을 모두 사서 금산탑(金山塔)으로 싣고 가 강을 향해 날리니 순식간에 강을 따라 초목 사이로 흩어져 거둬 들이지 못했다. 또 삼천 금으로 소주(蘇州) 오뚜기(不倒翁)를 사서 물에 떠내려 보냈는데, 이 때문에 물길이 막혀버렸다. 예쁜 것을 좋아해 문지기에서 부엌 아낙까지 모두 10대의 잘생긴 무리를 뽑았다.”

 

하지만 안기는 미술에 감각이 있었고, 사치를 하고도 남은 돈을 명화와 법첩([法帖) 수집에 열을 올렸다.

단방이 묵연휘관록에서 안기를 서술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안기는 구름 같이 많은 저택에 진귀한 보물을 전시하였는데, 수집하고 소장한 물건의 다양함이 거의 사대부에 맞먹었다. 그렇게 되니 국내에 법서와 명화가 녹촌에게 흘러들었는데, 마치 고기가 물을 찾는 것 같았다. 또 그는 감별에 정통해 우수한 글씨와 그림을 얻으면 바로 그 종이와 먹을 조사하고 인장을 기록했으며, 그 진위를 감별해 기록했다. 그 기록이 오래 쌓여 장편의 책이 되었다. (중략) 국가가 흥성하고 물자가 풍족했을 때, 그는 비록 돈을 모으는 천한 휘상(徽商)이었지만 오히려 수집에 관심을 쏟아 이토록 풍성하게 모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법첩과 명화를 시랑했으며, 특히 감상과 수집에 뛰어나 당대의 명작들은 대부분 소장했다. 특히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수많은 작품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 안기의 묵연휘관 /바이두백과

그는 나이 60세 자신이 감상하고 수장한 법첩과 명화를 정리해 『묵연휘관』(墨緣彙觀)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작품을 시대 순으로 목록화하고, 그것을 조목 별로 기록했다. 매 조목마다 작품의 소재와 크기, 착색을 기록했고, 작품에 대한 앞사람의 평가에 대한 오류를 수정하고 보충했다. 이 책자는 오늘날 중국예술사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예술품 감정가로서 대단한 명성을 날렸다. 송(宋)나라 시절 산수화의 명인 범관(范寬)이 남긴 작품 중에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두 점에 불과하다. 한 점은 대만 고궁박물관에 있는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이고, 또 한 점은 천진박물관에 있는 ‘설경한림도’(雪景寒林圖)인데, 설경한림도의 진위 여부를 감정하고 사인을 남긴 사람이 안기였다. 설경한림도는 강희제기 친히 수집했는데, 황제마저도 그의 감정 결과를 높이 평가한 셈이다.

안기는 천진과 양주에 웅대한 저택을 짓고 살았으며 무수히 많은 귀중 예술품을 소장했으며, 청나라 초기 4대 수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천진 동남쪽 고수(沽水)에 거주하면서 고향서옥(古香書屋)을 만들어 소장품을 보관했다.

그는 사회사업이나 기부도 엄청 많이 했다. 천진에 큰 화재가 닥치거나 홍수가 났을 때, 여러 번에 걸쳐 거액을 기부해서 기반시설을 수리하고 재건축하고, 많은 이재민들을 구호했다. 이로 인해 황제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흔히 중국 휘상을 유상(儒商)이라고 했다. 휘상들은 돈도 많이 벌었지만 유학을 숭상했다. 유명한 유학자를 가정교사로 초빙하기도 해고 과거를 통해 권력에도 진출했다. 유학자의 풍을 따라 문화 예술의 주요 후원자이기도 했다.

안기는 청초 제일의 화성(畵聖)이라 불리는 왕휘(王翬)를 후원했다. 왕휘는 안기를 위해 ‘안록촌상권’(安麓村像卷)을 그리기도 했다. 유럽 르네상스 시기에 이탈리아의 피렌체가가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였다면, 청나라 전성기의 예술계에 안기가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인가는 소장한 대부분의 서화작품을 건륭제에게 바쳤다. 건륭제는 그를 높이 평가해 은 천냥의 상금을 하사했다.

그가 죽은후 집안은 조금씩 쇄락해 자손들은 남은 미술품을 보존할 여력이 없게 되자 정품을 전탕포에 잡히거나 팔았다. 그가 소장하던 작품들은 대부분 강남 지역에 퍼졌는데, 태평천국의 난(1850년~1864년) 이래 반은 재가 되고, 남은 것도 상당수 보존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그가 황실에 바친 것은 보존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 ‘안가항’(安家巷) 거리 /바이두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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