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철의 통신보국⑩…승리후 물러나는 경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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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철의 통신보국⑩…승리후 물러나는 경영진
  • 김인영 기자
  • 승인 2017.10.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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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심사에서 사업권 얻었지만, 경영진은 끝내 퇴진

 

포항제철의 정명식 회장과 조말수 사장은 제2이동통신을 둘러싼 코오롱과의 대접전에서 돈독한 협력관계를 외부에 과시했다. 2통 주도사업자 낙점이 주총의 재신임과 직결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 사장의 행보가 빨라졌다. 이웅렬 코오롱 부회장을 비롯, 1월 28일까지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김석준 쌍룡그룹 부회장을 만났다. 포철측은 이에 대해 “전경련 회장단이 참여업체간 자율조정을 강조한 만큼 비회장단사로소 포철의 의견을 제시하고 참여회사 간 의견조정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조 사장으로선 이통사업자선정에 자신의 운명을 걸다시피하고 뛰었다.

2월 4일은 이동통신 참여업체들이 전경련에 2통사업 신청서류를 접수시키는 날이었다.

적과의 동침이라 할까. 2통 지배주주를 두고 맞붙은 포철과 코오롱이 상대방을 제2주주로 설정했다.

두 회사는 이날 하오 전경련에 2통사업 신청서류를 접수시키면서 서로를 파트너로 삼은 컨소시엄구성안을 냈다. 준비상황이 가장 좋다는 두 회사를 아우른 안이 누가 봐도 가장 이상적인 컨소시엄이라는 판단에다 지배주주경쟁에서 탈락할 경우 차선책으로 제2주주 자리라도 확보해두자는 계산이 맞아떨어진 제휴였다.

포철은 자기지분율을 14~16%로, 코오롱은 11~12%로 배정해 양자간 지분차가 2~4%에 불과하다. 이처럼 코오롱을 후히 대접한 포철안은 일단 지분배분에서 경쟁사인 코오롱에 상당한 양보를 했다는 인식을 심사위원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포석으로 분석됐다.

이에 대해 장중웅 상무(당시는 사표를 낸 상태였음)는 “포철의 기업규모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인 만큼 사업자로 선정되어야 하지만, 국민기업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는 선에서 1%만 지분율이 높게 이기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반면 코오롱은 3개안 모두 자기지분율을 23%로 고정하고 포철에게는 8~12%를 배정했다

막판세몰이작전으로 동부-삼환-영풍-건영-아남등을 컨소시엄으로 합류시킨 포철은 모두 1백80여개사로 진용을 짜는 물량작전을 썼다.

코오롱측은 1백8개사로 진용을 짠 코오롱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결국 다윗이 이겼듯 공정하게 심사만 진행된다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2통지배주주에 대한 경쟁이 뜨겁게 달아 올랐던 2월 19일 코오롱측은 자사가 보다 많은 지분율을 갖기로 포철과 협의가 진행 중이라는 내용의 자료를 언론사에 흘렸다. 협의 중인 내용의 자료를 언론사에 유출하지 않기로 협상당사자들은 합의해 놓고 있었다. 포철측은 즉각 반박자료를 내놓았다.

그러자 코오롱의 H이사가 포철의 신세기이동통신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당신들 무얼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소. 정말 그렇게 나오면 당신회사의 회장, 사장을 날려보낼수 있소.”

전화를 받던 포철의 간부는 화가 났다.

“왜 남의 회사 경영진을 들먹입니까. 정말 그래도 됩니까.”

포철의 정명식, 조말수 사장은 1월 7일 경영갈등의 책임을 지고 김철수 상공자원부 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해 놓은 상태였다. 정 회장과 조 사장은 3월로 임원임기의 연장도 연장이지만, 포철의 지배주주선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영빈관인 승지원에서 가진 여러 차례의 전경련 회장단회의 결과, 2월 28일 포철이 15%의 지분율을 확보, 지배주주로 선정됐다. 그리고 코오롱은 지분율 14%로 제2주주로 선정됐다. 정명식 회장과 조말수 사장의 운명이 걸려 있는 포철 주총을 열흘 남겨놓았을 때의 일이다.

이동통신선정에서의 정 회장과 조 사장이 쏟아부은 노력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포철은 엄청난 홍보물량을 쏟아부었고, 인적라인을 총가동했다. 두 사람 스스로도, 외부에서도 연임을 확신하기에 충분했다.

포철경영진은 코오롱이 제2주주로 후퇴한 대가로 코오롱그룹의 무역회사인 코오롱상사에게 포철 수송물량의 배분을 늘려주었다. (그러나 김만제 회장이 들어서면서 코오롱에 배분된 물량이 잘못 배분됐다는 지적으로 물량축소를 지적한 바 있다)

포철 신세기이동통신 팀은 2통지배주주 최종 낙점에 대해 “상식이 이견을 눌렀다”고 표현했다. 즉 실력의 승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포철이 길고도 험난했던 이동통신 레이스에서 마침내 승리, 월계관을 차지하게 된 과정은 수많은 우여곡절이 파노라마처럼 교차한 한편의 드라마였다고 자평하고 있다.

더우기 포철은 사업자선정구도에서 탈락하기 직전에 기사회생하기를 수차례나 반복, 결국 사업자로 선정됨으로써 남다른 감회와 성취감을 맛보게 됐다. 그래서 사업자로 선정되는 과정을 「4전5기」로까지 표현하며 포철 특유의 저력과 끈기의 승리라고 스스로 평가를 내렸다.

포철이 이통사업을 추진하면서 맞은 첫번째 고비는 91년초 이통사업자격을 규정하는 전기통신기본법및 사업법개정 때. 당시 관련법 개정골격이 기기제조업체와 정부투자기관을 배제하는 쪽으로 잡혀가고 있는 가운데 포항제철도 정부출자기관이어서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 것이다.

사업에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중차대한 고비를 맞은 포철은 공청회등 정부의 여론수렴과정에서 포철의 특수한 기업성격과 여건을 국민여론에 호소, 결국 포철은 이통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에 이르렀다.

참여자격에 관한 논쟁을 어렵게 극복한 포철은 92년 4월 「이통사태」로 알려진 선경의 사업권 자진반납 전후에 두번째 위기를 맞게 된다. 정부는 포철등 6개 컨소시엄이 제출한 사업계획서심사를 거쳐 이통사업자로 선경의 대한텔레콤을 선정했으나 특혜의혹에 따른 부정적 여론이 거세게 일자 일주일만에 이를 전면 백지화하고 이에 대한 모든 사항을 차기정부로 넘기게 된다.

당시 포철은 선경이 정부에 의해 사업자로 선정됐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끝까지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세번째 시련은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제1이동통신)에 포철은 참여할 수 없다는 방침을 체신부장관이 밝힌 93년 12월의 상황이다. 당시 체신부 장관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포철은 공기업이므로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천명했다.

당시 상황에는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대한 참여제약을 받는 것은 곧 제2이통 참여에도 제약을 받는다는 등식으로 이해됐다. 이에 따라 포철은 체신부의 이러한 방침에 대한 논리적 모순을 국민여론에 호소하는 기민성을 발휘, 이틀만에 장관의 발언이 철회되는 결과를 얻게 됐다.

세번째 결정적 위기를 넘기면서 포철은 94년 2월말 사업자선정을 며칠 앞두고 또한번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2월 중순에 있는 전경련의 합동구두심사에서 경쟁업체와의 현격한 실력차이를 입증함으로써 사업자로 선정될 것이 유력시되는 와중에 일부 회장단이 「포철 공기업론」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에 휩싸여 최종 결과발표 하루 전까지만 해도 순수 사기업인 경쟁업체의 유력설이 설득력 있게 제기됐다.

그러나 공기업의 논리도 포철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을 잠재우지는 못했고 실력차이를 무시할 만큼 설득력은 없었다. 전경련회장단은 2월 28일 회장단이 만장일치로 포철을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한다고 공식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국민적 관심속에 수많은 곡절을 겪으면서 4여년 동안 추진되어온 제2이동통신사업자선정은 포철이 최후의 월계관을 차지한 가운데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 포철이 이처럼 수많은 어려움을 딛고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됨으로써 제2창업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한 배경은 무엇인가. 포철 이동통신추진팀에서 만든 자체분석을 통해살펴보자.

첫째 이동통신사업에 대한 전사적인 목표의식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임직원들의 노력을 들수 있다. 포철은 「제철보국에서 통신보국까지」라는 슬로건 아래 최고경영자로부터 일반직원에 이르기까지 이동통신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모든 경영자원을 집중하면서 실력을 쌓아왔다. 이러한 철저한 사업준비와 투철한 의지가 사업권 획득의 결정적 동인이 됐다.

둘째 우수한 인력과 기술력과 사업계획서를 들수 있다. 포철은 최첨단 통신방식이라 할 수 있는 CDMA(코드분할 다중방식)기술이 국내표준으로 채택되기 훨씬 이전부터 해외파트너와 긴밀히 협력하며 이 분야의 기술을 축적해 왔으며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CDMA분야에서 국내정상의 위치를 확보한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또한 제철업의 양적확장종료에 따라 발생한 충분한 신규사업에의 의욕적인 투자계획도 경쟁업체와 차별화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해왔다.

셋째 여론의 지지다. 여론은 전파를 이용하는 이동통신사업 특성상 기업이윤보다는 공익을 가장 중시해온 포철이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3월 8일의 포철주총에서는 정 회장과 조 사장이 동시에 퇴진한다. 포철내에서는 이들 최고경영자의 퇴진이 이동통신사업과 관련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포철의 한 간부가 들려주는 설명.

“두 사람은 불화로 인한 감점요인을 이동통신으로 만회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코오롱과의 싸움에 말려들었고 코오롱과 청와대 실세와의 고리에 대한 시중의 소문에 대해 책임을 뒤집어 썼다. 자신들의 퇴진은 이동통신의 무리한 대시에서 나온다. 정명식과 조말수는 박태준 전회장처럼 포철의 오너처럼 행동했다.

지금 정부는 국영기업의 민영화 쪽으로 정책을 이끌어 가고 있다. 제1이동통신을 선경그룹에게 넘겨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2이동통신 출범의 명분도 민간에 활력을 불어넣어 효율성을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제1이동통신은 민영화되는 판에 제2이동통신은 공기업인 포철에 돌아갔다. 정부정책의 흐름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이는 포철의 경영진이 정부정책을 거꾸로 되돌린 결과가 됐다.“

또 다른 간부 K씨의 분석이다.

“포철과 코오롱이 한창 접전하고 있을때 시중에는 코오롱의 이웅렬 부회장과 고위층과 연계돼 있다는 소문이 난무했습니다. 그당시 열렸던 국회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됐지요. 이 소문에 고위층의 귀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소문을 포철에서 흘린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지요. 정 회장과 조 사장이 동시에 퇴진한 것은 단순히 경영갈등의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포철이 최대주주인 신세기이동통신은 1888년 SK텔레콤과 전략적 맺고 2001년 사명을 SK신세기통신으로 바꾼뒤 2002년 SK텔레콤에 흡수합병되면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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